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84)
EP.285 축복받은 나라, 저주받은 인간 – 8
금방이라도 천장이 무너질 것만 같은 위급한 상황. 하물며 이곳은 수십 미터 아래에 있는 지하다. 땅이 무너진다면 내 대지술로도 버틸 수가 없다.
에이비 대위는 고유마도로 유엘의 행동을 제어하려고 했다. 동조의 고유마도를 지닌 통신병끼리는 유효한 방법이었고, 에이비 대위 자신도 한 번 당했던 일이다. 바닥을 타고 뻗어나간 나팔꽃 줄기가 유엘을 옭아맸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 위로 나팔꽃 덩굴이 휘감긴다. 미세한 잔뿌리가 성녀의 피부를 파고들려고 애썼다.
“사랑으로 꽃피워낸,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 낭만적이네.”
그러나 유엘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힘도, 고유마도도 통하지 않는다.
성황청의 근원, 처음의 성녀. 그녀를 믿는 자는 그녀가 행했던 기적의 일부를 재현할 수 있다. 지금 유엘이 하고 있는 건 성녀에게만 허락된 보름의 기도다.
-성녀가 기도하는 동안, 어떠한 자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다.
처음의 성녀가 시체의 누각 위에 올라 보름 동안 기도를 바쳤을 때 탄생한 기적. 굶주림도, 질병도, 저주도, 불신자가 던진 돌멩이마저도 그녀의 기도를 막지 못했다. 그로 말미암아 생긴 기적은 성녀가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개 인간이 농성전을 할 수 있는 기적. 아마 세상에 진정한 의미의 ‘무적’이 있다면 저게 아닐까.
저걸 상대로는 내가 꼬챙이로 비집고 찔러도 구멍 하나 안 날 거다. 심지어 세상의 규칙을 덧씌우는 고유마도도 통하지 않는다. 이치에 닿는 공격이라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도 쉽지 않겠지.
실제로도 그러하겠지만, 유엘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태도로 말했다.
“그게 정신오염이야, 에이비. 통신병은 자기 목숨보다도 기밀과 명령을 소중히 해야 해. 자기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다면 동조는 무의미해지니까.”
“유엘…!”
“네가 정녕 통신병이라면, 기뻐하면서 묻히도록 해.”
‘공격, 무효! 전략을 수정합니다!’
동조를 통한 강제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에이비 대위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고 해냈다.
“멈추십시오! 현시점에서 본관을 제거한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밖에는 히스토리아 소장님께서 대기하고 있으며, 시조와 짐승의 왕 역시 건재합니다! 이곳에서 그이가 죽는다면 그들과는 최소한의 협상조차 불가능! 차라리 인질로 삼으십시오! 그편이 훨씬 전략적입니다!”
차라리 내가 인질이 되어 안전을 보장받으라고. 일개 통신병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다. 에이비 대위에게는 정보가 부족하니까.
문제는, 에이비 대위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점이다.
한순간 유엘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유엘이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생각해. 비록 네가 곧 죽을 운명이라고 해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 본관은 모르는 내용입니까? 그렇다면, 본관과 무관한 공격…?’
유엘은 비밀을 밝히지 않았으나, 그래도 에이비 대위는 통신병이었다.
평생 골렘으로만 인간을 접해온 그녀가 사람의 심리를 잘 읽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주어진 정보를 엮어 핵심적인 정보를 도출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공격 목표는, 본관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애초에 에이비 대위가 혼자 왔다면 역으로 제압당했을 거다. 상대는 최초의 통신병 에이메데르이자 성녀 유엘. 고작 일개 통신병에게 정체를 들켰다는 이유로 동귀어진하진 않겠지. 차라리 살인멸구하면 모를까.
당연히, 목표는….
흠. 자기 입으로 내막을 더 설명해주었으면 했지만, 느긋하게 있다간 땅이 무너질 것 같네. 생매장은 사양이다. 일단 이것부터 멈춰야지.
“천신교는 자살을 금하고 있지 않나요? 천장이 무너지면 당신 몸은 멀쩡해도 결국 굶어 죽을 텐데, 이래도 돼요? 아니면 천사로 바위를 파내려고요?”
유엘은 내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도 대놓고 무시당하니까 조금 서럽다.
“현혹할 생각 말고 사라져라. 야만.”
목소리 쌀쌀한 것 봐. 확실히 유엘은 에이비 대위에게 호의적이었던 게 맞았다. 나를 대할 때랑 비교하면 부드럽잖아.
“야만이라니. 나 같은 문명인에게 너무한 소리를 하시네요.”
“문명인이란 규범을 지키는 인간. 더불어 살기 위해 필요한 제약을 받아들인 자. 하나, 너는 모든 규범을 부정하나니. 네 어디에 문명이 존재하지?”
“여깄잖아요?”
내가 카드 뭉치를 톡톡 두들겼다. 몇 개 사용하느라 닳아버린 카드 뭉치지만, 여전히 반은 넘게 남아있다. 약, 무기, 마법, 그리고 지식. 하나같이 문명의 이기들이다.
내 카드 뭉치의 정체를 알아본 유엘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오직 힘으로만 존재하니. 그게 네가 있어선 안 될 이유다.”
말이 끝난 직후 진동이 더해갔다. 이제 금방이라도 무너질 기세다. 신전의 기둥을 흔드는 성녀를 죽여버린다면 이 진동이 멈출지도 모르지만, 성녀가 기도하는 동안 타격을 입힐 수단은 없다.
한마디로 절체절명의 상황.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야만! 그대로 나와 함께 묻히거라!”
“미안해요. 못할 건 없지만, 당신 옆자리에는 이미 남자가 있네요. 저는 임자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주의라.”
그 상황에서 내가 농담이나 따먹고 있으니, 유엘은 대단히 미심쩍어했다.
‘이상해. 짐승에게 생존본능이란 지상명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발악하는 게 정상일 텐데…. 왜 가만히 있지?’
농담이 나오지. 그야, 나는 위험하지 않거든.
아지나 나비 같은 짐승이라면 위기감을 느끼고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개나 고양이는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아무리 튼튼하고 탄력적인 줄에 묶어두더라도, 개나 고양이를 높은 곳에서 던지려고 들면 발악할 거다.
하지만 나는 지성과 논리력을 갖춘 인간. 수십 미터 높이에 있다고 해도, 나를 묶은 끈이 충분히 튼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망설임 없이 뛰어내릴 수 있다. 뭐, 구명줄에 문제가 생긴다면 얄짤없이 사고사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구명줄은 지금 도착했단 말이지.
‘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상관없어. 저를 축복하신 처음의 성녀시여. 저를 파문하신 하늘의 성녀시여. 죄 많은 저지만, 마지막에는 당신들께 부끄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용서하소서.’
성녀가 기도를 끝마치려는 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우리 말고도 지하통로로 뛰어든 누군가가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도란거리는 목소리가 밖에서 흘러들어왔다.
“시, 시아티…! 흔들리는데요. 이곳으로 오는 게 맞았을까요?”
“다른 어딘가로 연결되었을 거야! 더 빨리!”
포근하고 고귀한 분위기를 가진 공주. 그와는 반대로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아티.
위쪽에서 벌어진 난리를 피해 달아난 둘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달아날 곳을 찾던 둘은 느닷없이 펼쳐진 신전의 모습을 보고는 멈칫거렸다.
“히에…! 여기는 신전인가요? 어째서 군국에 신전이 있죠?”
“계속 움직여요! 휴이도 이쪽으로 갔으니 분명 어딘가로 이어졌을…! 휴이?”
그리고 성녀의 인지 범위 안에 공주가 들어왔다.
그란디오모르, 처음의 성녀를 지지했던 다섯 군주 중 한 명. 처음의 성녀를 따라 인간의 왕을 몰아내고 ‘마음’을 먹어치운 가장 약한 왕. 그 말예.
어떤 인간도 적대할 수 없는, 다른 의미로 무적인 인간이.
상대를 발견한 순간, 유엘이 처음으로 신음했다.
“아…!”
“당신도 익히 아시는 분이죠? 그란디오모르 왕가에 남은 유일한 공주님. 마지막 왕이에요.”
공주라도 무적은 아니다. 그란디오모르 왕이 인파에 휩쓸려 죽었던 것처럼, 공주도 의도치 않은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만일 이 땅이 내려앉는 도중이었다면 공주도 같이 휩쓸렸겠지.
하지만 아직 성녀에게는 이 상황을 막을 능력이 있다.
그리고 공주를 향한 공격은, 그것이 부작위의 결과여도 불가능하다.
“자. 성녀 유엘. 당신이 이곳을 무너뜨리면, 저 공주님은 죽어요. 와아,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공주님이 무거운 바위에 짓눌려 피떡이 된다니까요!”
혹시라도 외면할까 봐, 나는 성녀를 향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약간의 오해조차 할 수 없도록.
“이, 이익….”
“어어? 안 멈춰요? 죽는다? 진짜 죽는다? 내가 아니라, 공주님이 죽는다니까? 이래도 무너뜨려?”
‘공주를… 데려온 게…!’
최강의 방패니까. 잘 써줘야 하지 않겠어?
떨림이 잦아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던 두꺼운 기둥이 우뚝 멈추고 제 역할을 되찾았다. 한번 흔들린 천장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단시간 내에 무너지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공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동이 멎었어요!”
“또 언제 무너질지 몰라요. 일단 탈출을 생각하죠. 그보다 휴이, 너는 도망치지 않고 뭐하는 거야? 이곳은 도대체?”
둘은 성큼성큼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시체를 껴안은 채 절망하는 유엘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둘의 입장에서는 마치 귀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는 기쁘게 그들을 반겼다.
“어서 와요. 오래 기다렸다고요.”
이걸로 모두 모였다. 군국에게 질문을 던질 이들이.
혹자들은 말한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라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다른 모든 존재보다 우월하며, 특별하다고.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이 지배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에 허점이 생겨난다.
그토록 특별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더 특별한 인간? 애석하게도 자신이 바로 그런 존재라 주장하던 인간들은 대부분 죽었다. 심지어 인간의 왕으로부터 진짜 특별한 힘을 탈취했던 다섯 군주도 사라졌다. 저기, 하나가 남긴 했지만. 잔반이나 마찬가지고.
더 위대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 그러나 정작 극한 상황에서 인간을 이끄는 건 욕망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악은 그것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까지 증명한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이들 중 일부는, 결국 이 모든 게 힘의 논리라고 주장한다. 강력한 개인이든 혹은 같은 뜻으로 뭉친 집단이든, 그들이 힘으로서 타인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 말이 옳다면 인간은 짐승이다.
만일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