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86)
EP.287 축복받은 나라, 저주받은 인간 – 10
공주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군국이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는 건 그녀도 인정했지만, 이 군국을 축복받은 나라로 부르기에는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비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엘은 슬픔을 머금고는 공주의 뒤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보았다.
“그는 왕이 없는 나라를 꿈꿨어. 왕이 없더라도, 모두가 합심해서 미래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영원히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어. 그래서 그는 이 나라를 군국(群國), 군중의 나라라고 이름 지었지.”
군인들이 나라를 움직이고 있기에 우스갯소리로 군인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원래 명칭은 군중의 나라다. 요즘 들어 어느 쪽이 우스갯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 천재는 아니었어. 약해 빠져서 모두에게 걱정이나 끼치고, 생각 없이 한 행동을 유쾌하게 포장하려고 들었지. 지식도 부족하고 시야도 좁아서,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해 속이 터질 뻔한 적도 있어. 내가 무엇을 믿고 여기에 따라왔을까 한탄했었지.”
‘저분, 말은 그렇게 하면서… 웃고 있어요!’
날 선 평가에 비해서 표정이 물에 젖은 듯 부드럽다. 공주는 혹시라도 생각이 입 밖으로 새어나갈까 입을 꾹 다물었다. 좋은 선택이었다.
“그래도 하나 장점이 있다면, 그는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어. 특히, 군국 7대 발명품이라 불리는 것들. 인간이 인간을 위해 선의로 빚어낸, 이제까지 없던 도구들. 7대 발명품이 생긴 건 전부 그의 공로지.”
이 말에는 공주도 놀라워했다.
“키메라 콩에, 의복 패킷에, 메타컨베이어 벨트…? 그것을 전부 군웅이 만들었다고요…?”
“…아니, 그중 대부분은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물건들이야. 그가 한 일이라곤, 내가 ‘본’ 그 광경을 현실로 만든 것뿐.”
천리안을 가진 유엘은 앉은 자리에서 세상 모든 것을 보았다. 그중에는 성황청이 터부시하는 것들도 있었다.
쇠락해가는 지모신교가 어떤 고민에 빠졌는지.
벼락이 쏟아지는 폭포에다 인간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수해 속에 숨겨진 배덕의 나무에는 어떤 과실이 열렸는지.
유엘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답고 좋은 것을 한 데 모으면, 분명 지금껏 보지 못한 아름다운 결과물이 탄생하리라.
그때가 되면 하늘의 성녀도 다시 보리라. 유엘로부터 시작된 희망을 보고 생각을 바꾸리라….
“그는 나를 전적으로 믿었어.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도, 의심 없이 눈을 반짝이며 들었지. 우리 둘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어. 만일 이것을 쓴다면, 어떻게 더 좋게 쓸 수 있을까. 얼마나 만들고 어떻게 나누어야 선한 힘을 더 널리 퍼뜨릴 수 있을까. 잿더미를 밟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별을 쫓았어. 미래는 희망으로 가득했지.”
군국이 만들어낸 발명품은 하나같이 혁명적인 것들이었다. 어떻게 만들었나 했더니, 성녀가 이곳저곳에서 관음하고는 훔쳐 온 것들이었구나.
그러면 발명품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는 괜히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을 새로이 지었어. 우리는 점차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어. 어제보다 오늘이 좋았고, 더 좋게 찾아올 내일을 기대하며 잠들었어. 피곤하고 힘든 날도 있었지. 그럴 때면, 그는 내 곁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어.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신이 이 나라를 저버리지 않고 천사를 내려주어서 다행이라고. 덕분에 오늘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고….”
“군웅이 품은 뜻은 정말로 숭고했네요.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참 좋았겠어요.”
공주는 점차 멀어지는 화제를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돌렸다. 유엘의 초점이 다시 돌아왔다.
“그래. 너희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해. 그의 의지와 노력은 진짜였어. 절대로 너희에게 경멸받고 무시당할 게 아니야.”
“유엘 님.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어요. 지금을 사는 우리는 그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몰라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군국은 상냥함이라고는 없는 나라니까요.”
유엘이 미간을 좁혔다.
“상냥함…. 그런 것을 좇고 있니?”
“상냥함은 필요해요! 지금 군국을 보세요. 그 누구도 즐거워하지 않고, 아무도 희망을 꿈꾸지 않아요. 도대체 그가 품은 뜻은 다 어디로 간 거죠? 그가 보급한 발명품들은 왜 삶에 더해지는 대신, 다른 모든 것을 빼앗는 구실로 사용된 거죠?”
키메라 콩은 분명 뛰어난 발견이다. 그것만 있다면 누구도 영양부족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식사에 더해지지 않았다. 군국은 키메라 콩을 주며 다른 맛을 빼앗아갔다. 군국에는 키메라 콩 이외에 다른 음식은 사치가 되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 의복패킷이 도입되며 미적 가치를 가진 옷은 자취를 감추었다. 휴대성과 보관성이 뛰어난 통조림 덕분에 요리법도 제한되었다. 사치와 즐거움은 점차 사라져갔다.
공주는 군국에서 자랐지만 공주로 애지중지 자랐다. 덕분에 간간이 찾아오는 즐거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그녀는 군국을 긍정하면서도 완전히 동의하지 못했다.
“그럴 필요 없잖아요!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채 더 좋은 것만 더하면 됐잖아요! 그의 뜻이 숭고했다면! 더욱 상냥함을 갖고 대했어야죠!”
“선심껏 건넨 상냥함은 언젠가 처리해야 할 골칫덩이가 돼.”
“네?”
“부서진 나라를 재건하고,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만들어야 했어. 그래서 지모신도를 받아들였어.”
“네. 저도 들었어요. 군국이 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했을까. 상상이 가니?”
순간 공주의 몸에 닭살이 돋았다.
즐겁게 과거 이야기를 하는 유엘은 추억에 젖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공주는 조금 오만하게 유엘을 꾸짖었다. 그토록 소중한 추억이라면 더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아니야. 저 사람은 과거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를 전부 버리고 나아간…!’
“신전을 부수었지.”
유엘이 빛이 사라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왕국의 상냥함으로 먹고 살던 모든 신전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더라. 신심 깊은 신도들이 합심하여 군국에 대항했어. 공사 도중 사고가 일어나면 지모신교의 책임이라고 몰아붙였지. 심지어 유착 관계에 있던 몇몇 신전은 반군을 돕기까지 했어. 나는 그 모든 것을 ‘보았어’.”
저 보았다는 건 천리안으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봤다는 뜻이다.
이야, 군국.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혼란한 정국을 어떻게 수습했을까 했더니만. 천리안이라는 사기 권능이 있다면 할 만하지.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어. 그게 가장 합리적이며 빠른… 유일한 활로였어. 나는 그래서 했어. 내 믿음을 저버리면서까지.”
“신전을 쫓아낸 건, 세금을 내지 않아서라고….”
“그냥 내칠 수는 없으니, 갖가지 이유를 붙여갔지. 나라를 부흥해야 한다. 세금을 내라. 내기 싫다면 기부금이라도. 이 나라에 호의를 보여라. 당연히, 신전은 거부해. 인간이 신에게 대가를 요구해서는 안 되니까.”
“그럴 수가.”
“그러면 거기서 몰아붙여. 어차피 민심은 이쪽에 있어. 구실만 붙이면 돼. 그러기 위해서 영궤를 데리고 왔으니까…. 신을 향한 원망도 가득했어. 조금 부채질하는 것으로 충분했어. 나는 내 손으로 그들을 내쳤어… 후후. 어때? 대단하지?”
그렇게 박해한 끝에 군국에서는 천신교를 믿는 신전이 사라지고, 그나마 남은 이들은 레지스탕스와 협력하며 음지에서 근근이 살아갔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신이 존재하는 증거이자, 모든 신도의 우상인 성녀가 직접 그들을 내치다니.
“신은 내 곁을 떠나셨겠지. 하지만 괜찮아. 그가 곁에 있었으니까.”
“어….”
“의복 패킷을 도입하기 위해 포목점을 부수었어. 제식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 마탑을 무너뜨렸어. 부족한 식량이 자기 무기가 될 것이라 믿었던 상인들에게 진짜 무기를 선물해주었지. 그들의 몸 속에. ”
그 외에도 유엘은 담담하게 그녀의 행적을 털어놓았다.
더 나은 것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존재하던 것을 없애야 한다. 그것부터 시작이다. 하지만 천 년도 넘게 군림했던 왕국은 나라가 뒤집어지는 와중에도 이전의 삶이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고작 왕이 죽은 걸로 인간이 바뀌지는 않았다.
본래라면 군국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패와 비리. 비협조와 반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진다. 무리를 지은 사람들은 지은 무리가 크기에 생기는 문제점을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그래도 성녀는 해냈다.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으면서도 나는 모든 것을 보았어. 세상 모든 더러운 것을 눈에 담고, 지워지지 않는 피를 내 손에 묻혔어. 그도 이제 왜 죽여야 하는지, 무슨 죄로 가둬야 하는지 더 묻지 않아. 피 묻은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키면 그곳으로 총칼을 든 군인이 달려나가….”
“유엘….”
“그래도 괜찮았어. 여전히 군국은 더 나아지고 있고, 그는 계속 내 곁에 있었어. 상상했던 것과 달라도, 그를 보고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그는 죽었어. 이제 나 혼자야. 방향을 바로 잡아줄 사람은 없어. 이대로 내가 이 나라의 왕이 되어서는… 왕국의 전철을 밟을 뿐이야. 절대로 군국이 되지 못해….”
주문처럼 들리는 말을 중얼거리던 유엘이 느닷없이 공주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나라가 영원히 계속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아니?”
갑자기 닥친 질문에 당황한 공주는 상식적인 대답을 했다.
“…사, 사람이요? 살 사람이 없으면 나라도 없으니까.”
“틀렸어. 그 반대야.”
“반대? 그러면 짐승이 필요한가요?”
“인간보다는 낫겠지. 하지만 그것도 아니야. 나라가 영원히 계속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닌 것이 다스려야 해.”
그래서 유엘은 자기를 닮은 존재를 만들어냈다. 천리안을 지닌 성녀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도록, 동조의 능력을 가진 통신병에게 골렘을 주어 군국 전역으로 보냈다.
처음 통신병들은 완성도가 높지 않았다. 꽤 나이를 먹은 채로 교육에 임한 통신병들은 불완전해서, 유엘이 꽤 깊숙이 관여해야만 어찌저찌 돌아가는 구조였다. 그러나 더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통신병이 임관하면서 점차 군국은 완성되어갔다.
“무리를 지은 인간은 가장 비정한 선택도 거리낌없이 해. 통신병이 그렇지. 어두컴컴한 방에 홀로 있으면서도, 각지에 펼쳐진 수많은 통신병과 사고를 공유하는 병사. 한 명이면서 무리를 지은, 군국의 정수. 나는 그들에게 군국을 맡겼고, 그들은 능력은 부족할지언정 훨씬 더 체계적으로 군국을 움직였어. 만일 오늘 이 만남이 아니었다면, 군국은 나 없이도 계속되었을 텐데.”
경력자의 말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나 보다. 풋내기 공주보다, 나라를 다스려 본 유엘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기가 죽은 공주는 할 말을 못 고르고 우물쭈물거렸다.
여기서 할 말을 잃으면 내가 보낸 보람이 없잖아. 나는 공주를 대신해서 말했다.
“궤변이네요. 통신병에게서 인간의 삶을 빼앗고 그들을 기계처럼 부려먹는다고 인간이 아니게 되나요?”
내가 비아냥거리자 유엘은 마지막 남은 적의를 담아 나를 노려보았다.
“영원한 군국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해. 문명의 파괴자인 너는 절대로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프레임 좀 그만 씌워요. 지들이 이상한 거 만들어놓고 이건 문명이며, 다른 무엇보다 소중한 거라고 주장하기만 하네요. 안됐지만, 저는 그게 문명인지 뭔지 하나도 관심이 없어요. 그건 보이지도 않고 먹을 수도 없을 뿐더러 실제로 존재하지조차 않는 거니까요.”
그러자 유엘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군국은 존재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군국의 핵심인 당신이 체크메이트 당했는데도요?”
“왕국과는 달라. 지금 여기서 나를 죽인다고 해도 군국은 계속돼. 그것이 군국이니까! 이미 시스템은 완성되었어. 다른 모듈의 통신병들이 이 결과를 관측하고, 평가를 수정하고. 새로운 판단을 내려. 그렇다면 그건 군국의 판단이며, 계속 군국을 이끌 거야!”
모두가 그렇게 믿으니까 군국이 계속된다고?
흠. 확실히. 군국이 존재하냐 안하냐 묻는다면, 모든 인간들이 군국은 ‘존재’한다고 말하겠지.
“…만일 군국이라는 새로운 무언가가 있고, 실존한다면.”
그렇지만 군국에게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책임도 질 수 있겠죠?”
“책…임?”
아지는 군국과 했던 약속의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 왕을 찾았다. 아지에게 있어서 왕이란 다수의 인간에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개인을 의미한다. 그렇게 찾아낸 개인이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고 하자, 아지는 단념하고 물러났다.
왜? 말이 군국과 한 약속이지, 실제로 군국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군국의 그 누구도 아지와 한 약속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군국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아티의 바람은 한계에 부딪혔어요. 군국을 증오했는데, 사실 군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시아티는 저 시체를 가지고 떼를 쓰기로 마음을 바꿨죠. 그게 남은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군국을 설계한 사람도 인간. 쓴 부품도 인간. 인간인 통신병들이 인간인 군인에게 명령을 내리고, 인간인 군인들이 인간인 시민들을 다스린다. 인간끼리 가두기도, 일을 시키기도, 처형하기도 한다.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 인간이 인간을 낳는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치장된 말로 평가하기 이전에 그건 분명히 존재하는 일이며 그 자체로 자연이다.
그럴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에 아무런 유감이 없다.
“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군국’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죠. 인간을 다스리는 명령은 ‘군국’이 한다고 말했죠.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불공평하잖아요? 지배할 때는 존재하다가 책임을 질 때는 사라지는 부도 수표. 우와. 이걸 어떻게 한담?”
“잠….”
“이럴 때 필요한 게 용역이죠. 돈 못 받은 사람들은 대표를 정해서 용역을 맡기곤 하거든요? ‘인간’ 대표로 제가 받으러 왔어요.”
그런데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매우 잘 죽인다면, 그건 인간의 적이 아닌가?
어라. 그러면 내가 일해야 되잖아.
참나, 강제로 은퇴를 당하고도 일해야 한다니. 질 나쁜 직장이야.
“이곳에는 왕이 없네요. 이제 그만 자리를 비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