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89)
EP.290 축복받은 나라, 저주받은 인간 – 마무리
아무리 뻔한 답이라도 그것을 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 간격이 지극히 짧은 사람을 이성적이라고, 긴 사람을 감성적이라고들 하지만. 그 문제에 걸린 것이 나라 정도로 무겁다면 누구든 감성적으로 되리라.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유엘은 원망을 가득 담아 말했다.
“…이 나라가 그렇게 잘못되었어? 네가 직접 망가뜨려야 할 정도로?”
“세상에 잘못 잘잘못이 어딨겠어요. 그냥 그렇게 된 거죠.”
“나는, 군중이 이끄는 나라를…. 그의 꿈을 이루고 싶었을 뿐인데…. 그건,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잖아….”
“잘못 잘잘못 같은 건 없다니까요. 아, 그리고.”
자꾸 모두가 이끄는 나라니 뭐니 하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말한다.
군국 어디가 군중의 나라냐?
“군국은 모두가 이끄는 나라가 아니죠. 누구도 이끌지 못하는 나라에요. 제가 본 그 누구도, 이 나라를 이끌고 있지 않더라고요. 깔려있으면 깔려있지.”
“…그건.”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저 누구도 믿지 못했을 뿐이야. 군인도, 백성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군중이 이끌려면 군중이 주인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군중은 이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집단을 이룰수록 개인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가혹한 선택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선택하고 만다.
인간을 믿지 못한 유엘은 가상의 존재, 군국을 만들었다. 군국이 그들을 지켜보고, 감시하고, 심판했다.
꼭 신처럼.
성녀라서 그런가, 어디서 베껴오는 것도 신심 가득하네. 다른 점이 있다면 군국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심판한다는 거겠지만.
“당신이 말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나는 확실하네요. 이런 나라, 그는 바라지 않았겠죠. 당신과는 달리 ‘그’는 인간을 더 믿었을 거예요. 아니었다면 그런 바보 같은 꿈을 꾸었을 리가.”
그가 만들고자 한 건 아름다운 모래성이지, 강철로 만들어진 잔혹한 영원의 성이 아닐 테니까.
사실만을 꾹꾹 눌러 담은 말은 유엘이 절규했다.
“어떻게 믿겠어! 나는 전부 ‘보았’는데! 그들이 웃는 낯으로 다가와서는, 뒤로는 무슨 짓을 벌이는지! 전부 지켜보았는데…!”
왕국이 무너지고 군국이 다시 세워지는 도중에도 이기적인 인간군상은 존재했다. 자기 잇속만 차리려는 이들, 과거의 권세를 부러워하는 이들, 빠진 이들을 대신하여 새로운 기득권이 되려는 이들.
하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만 보아온 원견의 성녀에게, 인간 세상의 악다구니는 이질적으로 보였겠지. 적출하듯이 그들에게서 자유를, 책임을, 죄를 빼앗아가고 싶었나.
“어쩌겠어요. 그게 인간인데요.”
하지만 어쩌겠어. 그것까지 포함해서 전부 인간인데.
흐느끼듯 하던 목소리가 끊어졌다. 유엘은 주먹을 꾹 쥔 채 고개를 떨구었다. 아래쪽을 향해 중얼거린 목소리가 돌바닥에 반사되어 귀로 들어왔다.
“…에이비. 너는 군국을 망가뜨릴 거야. 아니면 네가 망가지던가.”
“본관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만사가 생각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니. 하지만 안 돼. 무능하다면 외압에 짓눌리고, 유능하다면 네 속을 갉아먹겠지. 이 나라에서 생기는 모든 죄악이 네 것이 돼. 너와 무관하게 생겨난 비극도 네 책임이 되고, 무심결에 내뱉은 원망은 비수가 되어 네 심장을 찌를 거야. 너는 버티지 못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면 더더욱.”
대다수의 경우 경험자의 조언은 비경험자에게 해묵은 텃세로 보이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기적적으로 전해졌다. 아마 에이비 대위의 공감능력 덕분일 것이다. 동조마법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공감능력.
에이비 대위는 각오를 굳게 다지며 말했다.
“원망받을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본관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이라. 에이비, 너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할 셈이니? 그 꼬마의 요구사항대로 이미 일어난 전쟁을 막을 생각이니?”
회귀자의 표면적인 목적은 군국과 열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을 막는 거였지. 애초에 군국이 받아들일 리 없다고 믿었지만, 일단 주장은 그랬다.
에이비 대위는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소모비용이 극심한 전술행동입니다. 하물며 강력한 존재가 그것을 막기 위해 습격을 벌인다면 더더욱. 만일 전쟁을 치르지 않고 사태를 완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전쟁을 속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이유라면 있지. 너는 그때 통신이 끊긴 채라 듣지 못했겠지만. 이유는 분명해.”
“무엇입니까?”
되묻는 에이비 대위를 지켜보던 유엘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전쟁의 문제점은 둘 중 하나가 그럴 의도를 가져도 일어난다는 점이지. 군국이 벌이지 않더라도, 열국이 그럴 마음만 가진다면 전쟁이 일어나.”
“따라서 그들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겠다는 의도입니까? 그것이야말로 비합리적입니다.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아니. 내가 ‘보았어’. 열국은 이미 전쟁을 일으켰어. 선전포고도 없이 병력을 모아 무저갱이 있던 황야로 향하고 있지.”
“넷?”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천리안은 사기가 맞다.
군국의 약점이라고 한다면 짧은 역사와 부족한 신비. 따라서 티르나 회귀자처럼 신비를 지닌 비대칭전력이 휩쓸 때 대항 수단이 적다. 이 약점은 특히 첩보전의 약점으로 나타나는데,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능력이 없다면 첩보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리안을 가진 성녀가 통신병에게 정보를 건네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여기 숨어서 세계 곳곳을 훔쳐보고 있었구나. 그게 군국의 강력한 힘이었고.
“후천적 유목민족들. 땅에 버림받은 열국의 몇 안 되는 장점이 기동성이지. 우리가 그들에 비해 우월한 건 체계뿐이야. 통신병이 급히 병력을 소집한 덕에 지금 무저갱 황야에서는 탐색전이 벌어지고 있을걸.”
유엘은 천리안으로 ‘본’ 내용을 떠올렸다.
우리가 사령부로 향하는 동안, 메타컨베이어 벨트로 모인 군단은 북쪽으로 진군했다. 중무장한 본대가 향하는 동안, 선발대는 우리가 사령부에 도착하기도 전에 황야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열국의 기마부태가 도착했다. 한때 지모신에게 버림받아 모두가 외면한 땅을 두고 두 나라의 군대가 마주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유엘은 사령부를 향한 습격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그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야, 소수의 인원이 군국을 헤집어보았자 어디까지나 게릴라지만, 전장에서는 나라의 명운을 건 전면전이 벌어지기 직전이니까. 열국의 동향을 살피느라 우리 쪽에 관심을 그리 많이 쏟지 못했다.
어쩌면 군국의 사령부까지 손쉽게 들어올 수 있던 것도, 군국의 전력 대부분이 그쪽을 향해서일지도 모른다.
“이쪽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 아니야. 서로와 서로의 이해가 얽힌 전면전이란다. 열국은 정주할 수 있는 땅이 절실히 필요하지. 무저갱이 있을 때는 쓸모없는 땅이지만, 지모신의 저주가 풀린 지금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 네가 그에게 홀려있는 동안 나는 그 모든 것을 ‘보고’는 통신병에게 전했어. 교차검증을 통해 그것을 확인한 통신병 전원은 전쟁이 불가피하다 판단했어.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이 전쟁을 멈추라고 말한다고, 우리가 멈추어야 할까?”
뒤늦게 들어온 정보에 에이비 대위는 이전까지 했던 모든 판단을 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에이비 대위가 회귀자와 접촉했을 때, 회귀자로부터 전쟁을 멈추라는 요구사항을 들었다. 타 통신병과 단절되었던 에이비 대위는 회귀자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에이비 대위의 마음속에서는 이 이 습격을 막을 유일한 방법으로 휴전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이미 벌어졌다. 회귀자의 요구는 애초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격퇴하거나 설득해야 하는데.
“그 사실을 설명했다면 상대도 수용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시점에서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증명하게? 내가 직접 모습을 드러낼까? 시조의 앞에서 구구절절 설명할까? 한때 내가 성녀였으며,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를 보았노라고!”
여기서 성녀라는 사실을 밝히네. 나는 익히 아는 사실이어서 덤덤했지만, 공주는 꽤 놀란 기색이다. 성녀라는 게 동네 목사처럼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니까.
이제는 비밀도 뭣도 없다. 유엘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 장담컨대, 그편이 몇 배는 더 위험할걸! 시조가 공국을 부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안개 공국의 총전력이 어둠을 몰고 쳐들어오는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겠어?! 이왕 격퇴할 거라면 시조가 홀로 있는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어! 이미 늦었겠지만!”
실로 난감한 상황이다. 에이비 대위는 그것을 인정했다.
‘유엘의 말이 합당합니다. 현시점 전쟁을 멈추는 건 불가능. 셰이의 요구는 비합리적일뿐더러 불가능하니, 군국이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은 격퇴뿐입니다….’
그렇지만, 에이비 대위가 유엘과 다른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에이비 대위는 무저갱의 관리자였으며, 회귀자와 꽤 자주 접촉했다. 특히 나를 경유하여 이것저것 말을 섞기도 했다.
유엘은 회귀자의 어마어마한 권능을 보고는 회귀자를 일종의 현상으로 규정한 듯했다. 태풍이나 벼락, 혹은 시조 티르칸쟈카처럼. ‘보는’ 입장에서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에이비 대위는 미래는 몰라도 ‘셰이’라는 인간을 알았다. 날카롭고 퉁명스럽지만, 의외로 이성적이며 묘하게 빈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현상에 비해 작다. 믿기 어렵다.
그러나 소망에 응해주는 건, 현상이 아닌 인간이다.
“늦지 않았습니다. 본관은 여전히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오히려 타협하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타협? 무슨 수로?”
“그의 요구에 진정성이 있으며, 진정 그 목표를 위해 몇 가지 노력을 할 용의가 있다면. 군국을 향하는 이 힘을 외교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에이비 대위는 이전의 군국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못할 제안을 꺼냈다.
“그를 특사로 임명하여 열국으로 파견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전쟁을 멈추고자 한다면, 군국에서 한 것처럼 그 목표를 위해 무력을 투사할 용의가 있다면. 그는 열국의 전의를 꺾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