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92)
EP.293 사실 나는
히스토리아는 잠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는 버벅거렸다. 그녀의 침묵을 메우듯 막시밀리앵의 요란한 목소리가 들어찼다.
“히스토리아 소장. 이제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겠나? 자네와 나는 굳이 다툴 이유가 없었네. 자네가 나를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자네를 무시했을 거네.”
“…그게, 어떻게 된.”
놀란 얼굴이다. 그럴 만하지.
군국의 무기개발국장이 사실 내 아군이라니? 이건 나도 직접 만나 생각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으니까.
“이건 막시밀리앵 씨 탓도 있어요.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불필요한 싸움을 줄였을 거 아니에요.”
사실 아군이라고 해도 별로 도움은 안 되었다. 호응을 기대했는데 정작 맞서 싸운 대상은 히스토리아였으니까. 이딴 게 아군?
내가 탓하자 막시밀리앵이 변명했다.
“내가 늦은 것은 천통 때문이라네. 급한 볼일을 마쳤을 때는 이미 천통의 관제가 시작된 후였지. 통신병은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내 충실한 심복들은 다른 곳으로 배치되었다네.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한 채로 방치되었다가 총성만 듣고 움직였으니 지금 도착할 수밖에.”
“남 탓하는 거예요?”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만일 천통이 나를 경계하느라 조심하지 않았다면. 자네가 이토록 수월하게 중심부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그렇다. 천통 에이메데르는 원견의 성녀 유엘. 앉은 자리에서 세상을 내다보는 천리안의 소유자.
유엘은 우리의 접근을 알아채고, 천사를 보내 우리를 비밀스럽게 인도했다. 통신병의 정체를 밝히면서까지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다. 그건 우리 전력이 특출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막시밀리앵의 존재도 분명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생각하니까 화가 나네. 진작 왔다면 훨씬 유리했잖아? 왜 세상은 내가 계획대로 안 돼? 하필 판돈으로 목숨을 올려놨을 때만 이리 아슬아슬해지냐고!
“별다른 도움은 안 됐거든요? 결국 큰일은 리아가 다 했다고요. 당신은 늦어놓고선 힘 빠진 히스토리아를 공격하기나 했잖아요!”
이대로는 못 넘어간다. 무능도 어느 수준을 넘으면 죄다. 죗값으로 뭔가 받아내야겠어!
내 추궁에 막시밀리앵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자꾸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자네 탓이 더 크지 않은가? 자네가 소장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불필요한 충돌도 없었을 것 아닌가.”
“뭐,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넘기고, 이제 다음 일을 생각해야겠죠.”
“바라던 바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서로 입장을 확인했으니, 일단 리아부터 풀어주시죠.”
아군이라면 히스토리아를 묶어둘 이유가 없으니까. 정당한 요청이었으나, 막시밀리앵은 응하지 않았다.
“풀기 전에, 소장의 궁금증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풀어주었다가 또 공격당하는 건 사양이네.”
공격당하는 건 사양이다. 즉, 히스토리아가 해방되었을 때 또 자신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달리 말해, 나를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뜻. 히스토리아가 자신을 공격한 건 내가 언질을 주지 않아서였으니까.
“일 처리가 꼼꼼하시네요.”
“직업병 아니겠는가? 괘념치 말게. 나에게도 나름대로 확신이 필요하다네. 군국은 내가 가장 공들여 만든 장난감인데, 그걸 100%가 아닌 가능성에 베팅하기는 아쉽지 않은가.”
대답도 논리정연해서 파고들 틈이 없다.
히스토리아에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막시밀리앵도 납득시켜야 한다. 쳇, 이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꽉 쥐고는 놓으려고 하질 않네. 유리한 위치를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이리 까다롭구나….
그때 히스토리아가 고개를 들어 막시밀리앵을 바라보았다.
“국장. 그 가능성이 무엇입니까? 어째서 국장이 휴이의 아군이 된다는 겁니까?”
“인내심이 부족하군. 조금만 기다리게. 그가 말할 걸세.”
“국장이 말해주십시오. 휴이의 말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나를 힐긋 쳐다보는 히스토리아의 시선에 불신이 담겨있었다.
야, 내가 너를 속이면 얼마나 속였다고. 나한테 속은 사람들이 저리 말하면 억울하지나 않지, 히스토리아가 그러니까 괘씸하네. 묶여있을 때 한 대 때릴까?
거센 살의를 쏘았지만 히스토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장은 휴이에게 호의적입니다. 그에 반해 천통은 휴이를 전력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휴이에게 무엇이 있어서 다들 그러는 겁니까? 영궤, 지크흐룬드 공안부장은 어째서 죽이려고 들다가 태도를 바꾸어 호의를 표한 겁니까?”
“지크흐룬드 공안부장? 그것도 그랬나! 하하, 이거 점점 확신이 생기는데!”
이 자리를 반긴 사람은 막시밀리앵만이 아니었다. 히스토리아마저도 이 순간을 틈 타 자기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했다. 나는 육장성 둘이 대화하는 이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일단, 하나 말해주겠네. 나와 지크흐룬드는 딱히 천통의 부하가 아니네. 천통이 우리를 군국에 데려왔을 뿐, 군국의 지휘체계처럼 명확한 상하관계가 있지는 않네. 따지자면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 가깝지.”
“고용인…입니까? 불성실했던 국장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공안부장은….”
“나도 나름 성실하게 일했다만…. 공안부장에 비하면야 손색이 있지. ‘그건’ 아마도 성검대의 일원일 테니까.”
막시밀리앵의 입에서 흘러가듯 스친 단어. 세상에서 한 손가락에 드는 무력집단의 이름에 히스토리아가 반응했다.
“…성검대…? 성황청의 정예 말입니까…?”
“정예? 아니, 노예겠지.”
짧게 조소를 머금은 막시밀리앵은 자기 아는 바를 다 떠벌렸다.
“운명에 버림받았으나, 갸륵하게 여긴 신이 거두어간 강자들. 그들에게는 자기 삶이 없네. 남은 것은 오직 신앙뿐이라 목숨을 아끼지도 않지. 지크흐룬드는 그랬을 걸세. 따라서 천통 역시도 그것만은 신뢰했겠지.”
“…그 말은, 천통이 사실….”
“나도 천통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으니 자신할 수는 없네. 하지만 천사를 수족처럼 부리는 존재가 성녀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당연한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라지 말게.”
미간을 좁힌 막시밀리앵은 바보에게 설명하듯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사실 맞는 말이다. 군국의 수호천사가 존재하는 시점에서 크든 작든 성황청과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뭐, 유엘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성황청을 등졌으니 크게 상관은 없지만.
“공안부장은 천통의 수족이지. 그러나 신앙은 더 확고한 믿음 앞에서 깨지기 마련이라네. 신이라고 떠받들며 믿음을 강요한들 그건 실존하지 않는 것, 눈앞에 버젓이 존재하는 것 이상의 믿음을 줄 수 없지. 그래서, 처음의 성녀는 신을 만들기 위해 왕을 없애야 했다네.”
“…왕.”
이왕 등졌다면 끝까지 등질 것이지, 한 줌 남은 신앙을 꽉 쥐고 있어서 말이야.
“그래. 나는 그가 인간의 왕이라-고 추측한다네.”
———-
“…인간의, 왕이라고요?”
땅 밑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같은 고요라도 인간이 없어서 생기는 침묵과는 질이 다르다. 섣불리 소리를 내었다간 조금 전에 들린 사실이 움직일까 봐. 차마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도, 그렇다고 섣불리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예리엔 그란디오모르였다. 왕과 직접 연관이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그냥 성격 문제일까. 그녀가 침묵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 어, 어떻게? 어떻게 알죠?”
“몰라.”
“네?”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발설한 유엘은 무책임하게 대답했다.
“알 수 없어. 그게 인간의 왕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몰라.”
“하지만, 유엘 님은 그가 인간의 왕이라고 하셨잖아요!”
“양의 피냄새는 늑대가 가장 잘 맡는 법이니까. 인간의 왕을 쫓아다니는 이들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근거가 있겠지.”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초연하고 무책임한 대꾸다. 유엘을 원망스럽게 바라본 예리엔은 자기 머리를 양손으로 쥐며 벌벌 떨었다.
“으으, 어, 어쩌죠? 저희가 무슨 불경한 짓을 한 걸까요….”
“불경한 건 휴이 그 자식이지. 공주님, 저 말을 진짜 믿는 거예요?”
시아티는 여전히 불신 가득한 눈으로 유엘을 쏘아보았다.
“돋보이는 능력도 없으면서 허세만 가득했던 녀석이에요. 그딴 게 인간의 왕일 리 없어.”
“그렇지만, 단순히 허세라고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비범하잖아요!”
“저는 휴이와 학창시절을 같이 했어요. 진짜 인간의 왕이었다면 그때부터 무언가가 달랐어야지. 비극을 방관할 뿐인 왕이라면 더더욱 필요 없어!”
“…내가 인간의 왕을 변호하는 건 아니지만.”
시아티의 말을 듣다 못한 유엘이 답했다.
“인간의 왕에게 특별한 힘은 없어. 처음의 성녀께서는 당신의 힘으로 온 미래에 걸쳐 인간의 왕을 배격했으니. 인간의 왕조차도 아무런 힘 없는 평범한 인간. 따라서 세상은 왕 없이 오롯이 인간의 것…. 죄도 벌도, 선과 도덕도 모두 온전히 인간의 것.”
유엘의 말은 점차 기도와도 같은 읊조림으로 변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도리어 시아티를 자극했다.
“인간의 것? 네가 한 일이잖아!”
“…그래. 그 죄는 내 것이지.”
“말로만 네 거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야!”
화가 잔뜩 난 시아티가 씩씩거리며 유엘에게 무언가를 따져 물었다. 성녀라면서 이딴 지옥을 만들었냐, 네가 저질러놓고서 멋대로 죄를 운운하지 말라고. 하나하나 유엘의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는 외침이었다.
그러나 유엘은 조금 다른 부분에서 고통을 느꼈다.
“만일, 그가 정말 인간의 왕이라면… 인간의 왕은, 아니, 인간은… 이 나라를….”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유엘은 지끈거리는 가슴을 다잡으며 군웅의 시체 위로 몸을 숙였다. 죽어서도 슬퍼할 그를, 혹은 그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