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93)
EP.294 톱니바퀴로 만들어진 세상 – 1
비장의 패일수록 손안에 감추어야 한다. 그게 진귀하나 별로 실용적이지 않은 패라면 더더욱 그렇다. 쏟은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노출된 정보는 다시 감출 수 없으니. 최대한 꼭꼭 숨겨 가장 중요한 시점을 노리는 게 최선.
그래도 꼭 안은 채 저승에 갖고 갈 게 아니라면 언젠간 쓰긴 써야지.
자, 무엇을 속이랴.
나는 사실 인간의 왕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존재라는 건 아니다. 이 사실은 내 인생 전반을 통틀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으니까.
짐승의 왕이라면 원래 각 짐승을 대표할 법한 강력한 힘을 지닌 채 개체 위에 군림해야 한다. 그게 세상의 섭리이며, 마땅한 이치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다.
심지어 내가 왕임을 증명할 수단도 없다.
왕관도, 용포도, 옥좌도. 그 무엇도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타향에 덩그러니 놓인 벌거벗은 임금님, 그게 바로 나다. 벌거벗진 않았지만 어쨌든.
“인간의 왕…?”
히스토리아는 반신반의했다. 사실 반신반의도 아주 좋게 쳐 준 거지, 막시밀리앵이 진지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냥 헛소리로 치부했을 거다.
나는 히스토리아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나섰다.
“맞아. 나는 인간의 왕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꼬박꼬박 폐하라고 부르고, 내 비위를 맞추고, 번 돈의 50%는 세금으로 내.”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 봐.”
“네.”
이거 봐. 인간의 왕이든 뭐든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니까?
내가 입을 조용히 다문 동안 발칙한 백성은 멋대로 질문을 계속했다.
“…인간의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 왕을 스스로 고를 수 있어, 지상을 지배하는 존엄한 존재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고?”
막시밀리앵의 얼굴에 기계적인 조소가 서렸다.
“자네 같은 위인마저도 그런 말에 속는데, 다른 우민들은 어떨까? 아무리 외면하고 싶더라도 진실은 분명하네. 인간은 본디 짐승이며, 다른 동물과 비교했을 때 더 나은 점은 조금 더 강하다는 것뿐. 어리석은 인간은 자신이 특별하다 믿고 있지만, 희망은 언제나 진실과는 동떨어진 법이지.”
“하지만….”
“하지만! 인간은 특별해지기 위해서 기상천외한 방법을 썼지! 인간의 손으로, 자기들의 왕을 죽임으로써! 짐승도 하지 않을 짓거리를 해낸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네! 도대체 어떻게 죽였는지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말일세!”
참고로 나도 모른다. 나 태어나기 전의 일이거든.
왕이라도 자기 생전의 일은 알지 못하는 법이다.
“휴이가 인간의 왕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래. 이왕이면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세상에 알리든가. 왜 음습하게 암약하기만 하는 건지. 이왕이면 가진 힘을 가지고 나를 왕으로 추대하라고.
히스토리아의 물음에 막시밀리앵은 점차 기세가 올라서 대답했다.
“할 수 없네!”
“국장은 확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확신? 전혀!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해! 자기들 손으로 왕을 죽인 덕분에, 인간은 수많은 왕을 가졌으니까! 거지도 왕관을 씌우면 왕이 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인간의 왕을 가려낸다는 말인가!”
나를 상대로 이것저것 쟀던 아까와는 달리, 히스토리아에게는 자랑스레 떠벌리고 있다. 아는 척하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타입인가 보다.
비밀조직을 운영하기에는 별로 어울리는 성격은 아닌걸.
“그럼에도 인간의 왕은 왕, 모든 인간의 대언자! 만일 인간의 왕이 존재한다면 그는 필시 어떤 인간이든 이해할 수 있겠지. 얼마나 비틀리고 엇나간 인간이라도, 그것이 인간이라면 반드시!”
비틀리고 엇나간 인간. 그 말을 듣고 히스토리아가 순간적으로 한 인물을 떠올렸다.
‘란카르트. 다른 사람은 벌레처럼 보던 그 재수 없는 자식도 휴이에게만은 호의적이었어. 그뿐만 아니야. 시조 티르칸쟈카도 휴이는 매번 신경을 썼지. 보여준 것에 비해 다들 유난히 호의적이었어.’
어이, 이왕이면 자신부터 떠올리는 게 어떨까 싶다. 왜 너는 정상인 줄 알아?
입을 다문 채 태클거는 동안 막시밀리앵은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뱉어내기 시작했다.
“인간의 왕이라면 이해하겠지. 인간의 어떤 부분은 톱니바퀴로 바꾸어도 무방하다는 것을! 팔과 다리, 관절과 근육은 유기물로 지은 기계에 불과하며, 톱니바퀴가 충분히 그것을 대체할 수 있다네! 인간은 톱니바퀴와 함께 더 나아질 수 있어…!”
히스토리아는 막시밀리앵과 싸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조금 전, 막시밀리앵은 강철 딱정벌레를 몰고 나타났다. 그 등장은 너무 요란스러워서 히스토리아는 막시밀리앵이 도달하기 한참 전에 그를 발견했다.
천사와 맞서 싸웠던 히스토리아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총검총의는커녕 기공탄조차 쓸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여러모로 불리했던 히스토리아는 원거리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앵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딱정벌레 안에 탑승한 채로 꾸준히 통신본부를 향해 접근했다. 히스토리아의 총탄은 강력하나, 레벨 5의 연금강이 맞물려 돌아가는 강철 딱정벌레를 관통할 정도는 아니다. 접근하게 둘 수 없었던 히스토리아는 어쩔 수 없이 육탄전을 택했다.
단신으로 강철 딱정벌레와 맞서고, 톱니바퀴를 맨손으로 잡아뜯으며 간신히 만든 틈, 톱날에 몸이 찢기면서도 노출된 막시밀리앵을 공격했을 때.
막시밀리앵의 팔다리는 아주 기묘하게 움직였다. 그건 마치, 기어에 걸린 톱니가 돌아가는 것처럼….
“국장의 팔다리처럼 말입니까.”
거기에는 어떤 의도도 없었다. 단순히 전투를 통해 파악한 사실을 설명하였을 뿐이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건 다름아닌 진실이다.
막시밀리앵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틱, 하고 기어 바뀌는 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말이 너무 길었군. 히스토리아 소장, 자격을 가진 자네라면 이해했으리라 믿네. 나에게 인간의 왕을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막시밀리앵의 기계적인 언행은 감정을 나타내기 적합하지 않았다. 히스토리아는 그의 불편한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 마디를 더했다.
“국장은 휴이를 데리고 무엇을 할 작정입니까? 다른 의도가 없지는…. 아악…!”
물이 넘치는 건 언제나 넘치기 직전 떨어진 한 방울 때문이다.
기분이 상한 막시밀리앵은 손가락을 튕겼다. 톱니바퀴가 무겁게 움직이며 히스토리아의 팔다리를 잡아당겼다.
활 중에는 권양기의 힘을 이용해 활대를 당기는 종류가 있다. 히스토리아의 몸이 딱 그 활대처럼 움직였다. 톱니바퀴가 그녀의 팔다리를 비틀 때마다 허리가 더욱 휘었다. 히스토리아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막시밀리앵은 인간의 사지를 비틀면서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위치를 자각하게, 히스토리아 소장. 자네의 생사여탈권은 나에게 있네. 지금 이곳에서, 자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심문을 해?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아악! 끄읏…!”
“자네는 나의 아군이 될 자격이 있지만, 반복해서 나를 실망하게 하면 내 판단을 재고할 걸세. 제 분수를 알지 못하는 아군은 적보다 위험한 법이거든.”
대놓고 고문이다. 보다 못한 내가 다가가 톱니바퀴를 힘껏 잡아당겼지만 역시나 아무런 영향도 없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이딴 게 왕인가 싶다.
막시밀리앵은 내가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고도 힘을 풀지 않았다.
“제압된 상대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건 내 순수한 호의였다네. 그러나 소장은 호의를 배반하는군. 자네도 이해하겠지?”
“아아. 물론이에요. 완벽하게 이해했어요. 우리 히스토리아가 너무 주제넘었죠?”
시간은 충분했다. 단서도 많았다.
강철 딱정벌레, 이건 수십만 개의 톱니바퀴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정교한 기계장치.
동력? 없다. 오직 톱니바퀴를 돌리는 막시밀리앵의 권능으로만 움직일 수 있고, 그의 지배를 받아야 최대한의 힘을 발휘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고철더미에 불과하지만, 막시밀리앵에게는 절대 빼앗기지 않는 무기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여기. 권능에 더해 기계적인 힘의 증폭으로 팔과 다리를 짓누르는, 톱니바퀴로 만들어진 감옥.
회귀자가 묶었던 천잠사와는 달리, 톱니바퀴에는 지속적인 힘이 가해지고 있다. 기공으로 신체를 변형한다고 빠져나올 수는 없다. 변형한 즉시 그만큼 더 조여들 테니까.
“…하지만, 탈출 마술은 그게 불가능처럼 보였을 때 가장 극적인 법.”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히스토리아의 다리 쪽 톱니바퀴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막시밀리앵의 눈이 가라앉았다.
‘톱니바퀴를 풀어내려 하나? 어리석은, 만일 자네가 강철 딱정벌레의 구조를 알았다면, 그것이 무익한 시도임을 알 텐데. 혹시 이해하지 못했나?’
이해는 했다.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인간의 완력으로 이 톱니바퀴를 풀려면 강철 딱정벌레의 꽁지부터 하나하나 떼어내서 분해해야 한다.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막시밀리앵은 옅은 실망감을 숨기며 말했다.
“자네마저 나를 실망하게 두지 말게. 강철 딱정벌레는 힘으로 움직일 수 없다네.”
“이해했다니까요.”
힘으로만 움직인다면, 절대로 불가능. 강철 딱정벌레를 움직이는 건 오직 막시밀리앵만이 가능한 일.
“나보고 그만두라고 시위하는 건가? 그렇다면 더욱 실망이로군. 떼를 쓴다고 내가 마음을 바꾸리라 여긴다면….”
끼긱.
절대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리자, 막시밀리앵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그는 뒤늦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폈다.
톱니바퀴가 돌고 있다. 거꾸로.
완력으로 해낸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다. 아니, 티르가 와도 순수한 완력으로는 이 강철 딱정벌레가 가하는 힘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미치광이 천재가 수년을 들여 만들어낸 기계장치는 손가락 까닥이는 힘도 몇천, 몇만 배로 증폭시킨다.
이것을 움직이는 방법은 하나. 막시밀리앵의 권능, 건곤감리 중의 리….
인 척하는 고유마도. 그것을 써서 톱니바퀴를 돌리는 것뿐.
“…!”
막시밀리앵은 경악했다. 기계적인 그의 사고조차도 너무나 큰 충격에 따라가지 못한다.
완전히 그의 지배 아래 있고,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할 톱니바퀴가. 오직 그만의 무기였던 강철 딱정벌레가 그의 통제를 벗어난다.
‘설마…! 인간의 왕은, 고유마도조차…!’
그가 다시 정신을 붙잡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몇 초.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
히스토리아의 몸이 튕기듯 빠져나왔다. 톱니바퀴가 가하는 힘이 사라지자 오른다리와 오른팔이 가볍게 빠져나온다. 그러면 나머지는 쉽다. 반대 쪽 톱니바퀴에 손을 대기도 전에 히스토리아는 힘으로 우악스럽게 빼냈다.
순식간에 자유를 되찾은 히스토리아는 비틀거리며 땅 위에 착지했다. 나는 그녀가 착지하기를 기다린 뒤, 양팔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짜잔. 즐거우셨나요? 탈출 마술입니다! 모두 박수를!”
내가 자랑스레 외치자, 막시밀리앵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양손을 들었다. 히스토리아는 공격의 전조라 여기고 움직였으나 그건 공격이 아니었다.
막시밀리앵은 한쪽 손을 눕히고는, 오른팔만 움직여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방어 자세를 취한 히스토리아가 허망해질 정도로 열렬한 박수였다.
오랜만에 호응 잘 해주는 관객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