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03)
EP.303 자연을 보호합시다
다치지는 않았다. 나뭇가지는 나를 마구 찌르는 대신 포근하게 껴안았다. 그것은 자애로웠으나, 항거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가지가 부딪히는 소리. 흘러들어온 한 줄기의 바람이 나무를 연주한다. 번잡하면서도 아름다운 나무의 무질서한 가락이 귓가를 메운다.
“막시밀리앵, 이 내기는 너의 승리로다. 만인이 목놓아 부르기 전까지 임께서는 오시지 아니하리라 믿었거늘, 반대의 길을 선택하여 기어이 임을 찾아내었구나.”
와중에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니,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옹이구멍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나무 안쪽, 어두컴컴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임께서 친히 우리의 앞에 임하였으니. 소신, 감개무량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리고 옹이구멍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기다란 손이 옹이구멍을 잡고는 양쪽으로 벌렸다. 대문처럼 큼직하게 갈라진 옹이구멍 안에서, 한 명의 인간이 구멍을 비집고 빠져나왔다.
나무의 정령은 옹이구멍 안에 산다고 한다. 구멍이 있으니 거기에 사는 무언가가 있겠다는 일차원적인 사고가 민담으로 바뀌어 내려오는 것이겠지만, 지금 그 전설은 현실이었다.
세상에 정령이 있다면 딱 그녀와 같은 외모를 하고 있을 것이다. 성별조차 짐작하기 힘든 중성적인 외모. 바닥에 닿을 만큼 내려오는 녹색 머리카락에는 덩굴처럼 작은 잎사귀가 무성하게 나 있다. 비단으로 만든 도포는 덩굴로 묶여 고정했다. 그래도 품이 넉넉해서, 소매 안쪽으로 팔꿈치까지 보일 정도였다.
이미 충분히 특이하지만,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건 머리에 매달린 뿔. 사슴의 것을 닮았지만 짐승의 뿔은 아니다. 그냥 관자놀이에서 뻗은 나뭇가지다.
내가 중얼거렸다.
“…드루이드?”
그 숫자가 많지 않은 드루이드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며 강력한 한 명.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역사를 지켜본 역사의 주시자.
자연의 대리인. 가장 아름다운 짐승.
…그리고 방금 안 사실이지만, 만물의 영장의 수장.
“소신 네비다. 죽지 못한 짐승이 인간의 왕을 뵙습니다.”
태고의 드루이드, 네비다.
그녀가 옷자락을 추스른 뒤, 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콩, 하고 부드럽게 머리 찧는 소리가 났다.
어, 음.
그저 당혹스럽다. 누가 나무에서 뛰쳐나와서 나에게 절을 한다면 누구라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가 초인을 넘어선… 절대적인 무력을 가진 강자라는 게 문제였다. 수장답게, 막시밀리앵 정도는 따위로 취급될 만큼.
이상하네. 막시밀리앵이 지원을 불렀다는 건 알았는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타국에서 여기까지 도달할 줄이야. 뭐야, 우리 쪽 사람들은 다 어디 있어? 빨리 합류 안 해?
아니, 합류 안 하는 편이 더 좋나?
어차피 합류해도 질 테니까.
등골이 서늘하다. 네비다는 항거할 수 없는 강자. 홀로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순수하게 개인의 전력으로… 티르보다도 강력한 존재.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나를 어떻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거지. 나는 꼬챙이를 뒤로 숨기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 세대 인간의 왕, 휴즈라고 합니다. 일단 고개를 들어주세요.”
내 말에 네비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떡갈나무 색 눈에는 나를 향한 무한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선망, 기대, 그리움, 그리고… 욕망.
아예 감정이 없다면 밑바닥부터 새로 쌓아 나갈 수 있다. 티르와 인연을 쌓았던 것처럼.
그러나 상대가 ‘인간의 왕’에 이토록 분명한 볼 일이 있다면 설득은 불가능하다. 나는 눈을 보고 그걸 확신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괴물은 인간의 왕을 찾는 만물의 영장 중에서도 가장 인간의 왕을 숭배하는 부류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나에게 인사하기 위해 이마를 찧지 않았나. 나를 죽이거나 해치지는 않을 거다.
흠. 혹시 한 번 찔러나 볼까? 나는 태연자약하게 명령했다.
“제가 막시밀리앵 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그런데, 잠깐 비켜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네비다가 다시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내가 흠칫하는 사이 네비다는 바닥에 얼굴을 댄 채 다 울리도록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불민한 소신은 그와의 내기에서 패배하온즉, 그를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함이라.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죽이지 말라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인간의 왕인데? 어디, 왕의 권위가 담기기를 바라며 근엄하게 말했다.
“아니, 저 진짜 인간의 왕이라니까요. 못 믿는 거 아니죠?”
“임께서는 오롯하시거늘, 소신이 어찌 감히 의심하겠나이까?”
“인간의 왕이 명령하잖아요. 비켜달라니까?”
“송구하옵니다.”
네비다는 송구한다고만 말하며 다시 머리를 찧었다. 그냥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뭐야. 이래 놓고 나보고 임이니 인간의 왕이니 치켜세운 거야? 말 안 들을 거면 왜 예의를 차리고 왕 취급을 하는 건데.
어쩔 수 없다. 네비다가 머리를 박고 있는 동안 나는 몰래 꼬챙이를 다시 잡았다. 막시밀리앵은 생각톱니가 멈추고 죽어가고 있지만, 상대는 의술과 약술에 능한 태곳적 드루이드. 이대로 데려갔다간 어떻게 살려낼지도 모른다.
딱 한 방. 어차피 죽기 직전이다. 마지막 일격만 가하면 된다.
“긴말 안 할게요. 마지막이에요. 비켜요.”
“송구하옵니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고, 네비다가 머리를 찧는 타이밍에 땅을 박찼다. 탁, 콩. 소리가 겹치고 내 몸이 네비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꼬챙이를 겨누며 막시밀리앵을 향해 뛰었다. 죽은 듯 쓰러진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뛰었는데, 떨어지지 않는다.
나뭇가지와 나무덩굴이 나를 붙잡고 있다. 어느새 솟아난 나무. 너무 정적이라, 생겨나기 전까지는 자라나는지도 몰랐다. 눈치챘을 때는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몸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생각’은 읽었는데. 피할 수가 없어.
나무를 조종한 게 아니야. 막시밀리앵을 ‘보호’한 거다. 그런데, 나무는 제멋대로 그 의지를 받들고는, 막시밀리앵과 나를 격리하기 위해 나를 매달았다.
막시밀리앵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톱니바퀴로 기계장치를 설계하고, 하나하나 조종해서 움직였다. 모든 행동이 의식적이었다.
그에 비해 네비다는 의지만 있다. 그러데 나무들이 알아서 그녀의 의지를 따른다. 그래서 생각을 읽어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나무가 알아서 이루어진다고? 이게 뭔…!
그때, 네비다가 머리를 조아린 채 말했다.
“임께서 온전하였다면, 소신의 소소한 반역조차도 허락하지 아니하셨을 터. 하나. 그 간악한 여자가 묶어둔 주박이 여전히 건재하니. 아직 갈 길의 아득함이 한탄스럽나이다.”
네비다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러다 호흡부족으로 죽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오래 숨을 내뱉은 네비다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와중에 그녀가 머리를 찧은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피 대신, 부드러운 초록색 새싹이 베개처럼 풍성하게 솟아나 있었다.
…편법 봐. 저럴 거면 머리 왜 찧었냐?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야?
“신(臣)은 임을 찾지 아니하였나이다. 인간의 왕은 찾아선 아니 되며, 오직 민의로 바라야만 진정으로 오실 것이기에. 다만, 막시밀리앵. 그는 도전했나이다. 해냈나이다. 이루었나이다. 소신은 그 뜻을 기리매, 그를 돕겠나이다.”
네비다와 함께 내 몸이 움직였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매달고 있는 나무가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했다. 나무는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옹이구멍을 벌리며 덩굴을 잡아당겼다.
어라. 이대로 있다간 저 안으로 들어가겠는데. 바둥거려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몸은 점차 나무덩굴에 파묻히다시피 했다.
이대로면 위험해. 네비다는 원래 나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막시밀리앵은 나를 갖고 이것저것을 시도할 거고, 이제 네비다는 막시밀리앵을 도울 거야!
죄악의 왕이고 뭐고 그 전에 죽을지도!
“잠깐만요. 막시밀리앵 안 죽일 테니까 이거 놔 주시면 안 될까요?”
“신이 모시겠나이다. 임이여, 이리로.”
“좀 말을 들어!”
“송구하옵니다.”
젠장. 뭐 이딴 정신병자가 다 있어!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누가 나 좀 살려줘!”
그때였다. 네비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에 유성이 비친다. 저 멀리서부터 바람을 두르고, 채 연소하지 못한 마력광을 내며 무언가가 떨어졌다.
떨어지기까지 1초. 네비다가 그에 맞서 나뭇가지를 쥐었다. 네비다를 노리는 날카로운 칼날이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천애애애애애애앵!”
하늘이 쪼개졌다.
앞에 옷자락이 펄럭거리고, 반가운 뒷모습이 내 앞으로 벼락처럼 떨어졌다. 조각 난 배경 속에서 갈라진 가지와 잎사귀가 반 박자 늦게 떨어진다. 가지고 덩굴이고 다 잘린 덕분에 내 몸도 자유를 되찾았다.
떨어지는 와중, 나는 확실히 보았다.
바람을 두른 채 떨어지는 천앵을 상대로, 맞서 솟아나는 작은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광경을.
하늘의 검, 천앵이다. 압축 공간으로 벼린 칼날은 바위마저도 쪼갠다. 저딴 평범한 나뭇가지 따위 쥔 팔까지 갈라버려야 정상이다. 겸사겸사 네비다의 몸까지 장작처럼 쪼갤 만하다.
그렇지만 나뭇가지는 베이지 않는다.
갈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천앵에 닿은 부분에 새로이 가지와 잎사귀가 자라나고 있다. 마치 천앵을 잡아먹고 자라는 듯한 모습이다.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회귀자는 태연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용케 막았네! 그러면, 이건 어떨까!”
당당한 표정. 자기 힘에 대한 압도적인 믿음.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힘.
회귀자는 도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천앵을 휘둘렀다. 빠르고 가벼운 검격이 네비다를 노린다. 그렇지만 네비다는 피하지도 않았다. 나뭇가지에서 뻗은 잔가지와 잎사귀가 알아서 검격을 막는다.
“제법인데!”
회귀자는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네비다도 그에 맞춰 한 걸음 물러나며 발로 땅바닥을 쓸었다. 바닥에 깔려있던 나뭇잎이 돌개바람을 타고 서서히 올라온다. 나뭇잎이 신비한 힘으로 그녀를 수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네비다가 말했다.
“…마신의 유품으로 ‘뿌리’를 망가뜨리고 다니는 아이가 있다고 하였지. 막시밀리앵이 말한 그게 너로구나.”
“하! 그게 나야. 그래서 어쩔 건데?”
오, 역시 회귀자. 태고의 드루이드를 상대로도 주눅들지 않는 모습이 대단하다. 이게 목숨을 아끼지 않는 회귀자의 진면모인가….
‘아아, 아아아아아! 큰일이야, 큰일이야! 왜, 왜 하필 저게 벌써 여기 있는 거야? 아직 네 등장까진 한참 남았잖아! 안 돼. 못 이긴다고!’
아니네. 이게 진면모구나.
나는 생각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