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06)
차마 하지 못한 말은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짧은 마력초는 그 길이만큼이나 금방 꺼졌다. 나는 거의 한 마디밖에 남지 않은 마력초를 빼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리아.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죽는대.”
“…그래?”
“그리고 인간의 왕이 다시 태어난대. 그게 죄악의 왕이래.”
“누가? 어떻게?”
“누가 저지를지는 몰라. 어떻게 할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 하지만 왜 그런 건지, 대충은 알아. 아마… 죄악을 무찌르고 싶나 보지.”
조금 놀랐는지, 히스토리아는 숨을 급하게 들이쉬며 마력초를 다 태워버렸다.
“죄악…을 무찌를 수 있어?”
“나는 몰라.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은 거 아닐까? 너도 하멜른 같은 일이 없어졌으면 해서, 이를 악물고 장성이 되었던 것처럼.”
히스토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마력초가 다 탔다는 것도 까먹은 채 떨리는 손으로 입에 넣으려고 했다.
재를 먹게 할 수는 없어서 나는 히스토리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휴이, 너는… 하멜른에서 있었던 일을, 막을 수 있었어?”
“아마도.”
“어째서 막지 않았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일어난 뒤에는 못 막잖아.”
“그래서 못 막았어.”
너무 가볍게 대답한 탓일까. 히스토리아는 내 손을 툭 놓았다. 히스토리아는 자기 이마를 짚으며 호소하듯이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어. 왜 그렇게 해야만 해? 휴이. 조금 더 평범해지면 안 돼? 인간의 왕이 아니어도… 어디로 가지 않아도 되잖아.”
평범해진다, 라.
나는 이미 평범하다. 인간의 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술이라면 대강 할 수 있고, 충분히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대강 친절하지만. 그뿐이다.
그렇지만 히스토리아나… ‘그녀’가 원하는 평범은 그게 아니겠지. 지금의 인간과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바라고 있다. 훨씬 선량하며, 훨씬 다정한 무언가를.
인간이 그러지 않은데, 내가 그럴 수는 없어.
“리아. 고마워. 이유도 무엇도 따지지 않고 나를 도와줘서.”
“거짓말.”
“나라도 감사하는 마음 정도는 있다고. 인간이 그렇게 염치가 없는 생물은 아니거든.”
“…맨입으로?”
“뭘 원하는데?”
순간적으로 히스토리아의 뇌리에 무언가 스쳤다. 조금 일차원적이고 본능적인 바람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말하지 않았겠지만, 약 기운이 남았는지 말이 멈추지 않고 그대로 입 밖으로 나오려는 그때였다.
“냐아. 멍청한 멍멍이. 이것도 못 푸는 거다냐?”
어느새 나비가 강철 딱정벌레 위로 올려와 있었다. 히스토리아는 이성을 되찾고 말을 들이삼켰다. 아마 말해도 상관없었을 텐데. 고양이 눈조차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대충 주변을 두리번거린 나비는 발톱을 세웠다. 어긋난 톱니바퀴의 틈에다가 발톱을 박고, 건져내듯 당겨서 옆으로 치운다. 커다란 톱니바퀴가 옆으로 날아서 저 아래로 떨어진다. 나비는 그 앞에서 엎드려 무언가를 기다렸다.
“멍! 나, 해방!”
그 빠진 톱니바퀴 틈으로 아지가 뛰어올랐다. 지금껏 강철 딱정벌레 안에서 헛되이 톱니바퀴만 물어뜯고 있던 아지는 자유를 되찾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 싫어! 속박, 싫어! 멍멍! 어둡고 외로워!”
앞발을 사용하는 건 나비가 아지보다는 능숙하다. 그리고 앞발을 사용하는 짐승은 도구와 비교적 친하다. 그 때문일 것이다. 나비가 아지보다 똑똑해 보이는 건.
나비는 아지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냐. 멍청한 멍멍이다냐. 멍청이들끼리 막 싸우는데 이빨부터 들이민다냐.”
“멍! 나, 물렸어! 도와야 해! 또 그거, 싫은 냄새 났는걸! 쇠 냄새 났는걸!”
“그게 멍청하다는 거다냐. 싫든 좋든, 다른 짐승끼리 투닥거리는데 낄 이유가 없다냐. 가만히 지켜보다 먹이만 슬쩍하는 게 최고다냐.”
나비가 손을 살짝 들었다. 와중에 손톱에는 마력초가 꽂혀있다. 저 고양이 녀석, 우리 없는 사이에 아주 즐길 거 다 즐겼구만.
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가리켰다.
“나, 안 해! 약속 지켜! 그러면, 인간도 약속 지켜!”
“냐-냐. 멍청한 멍멍이. 언젯적 약속, 다 까먹었을 거다냐.”
나비는 마력초 꽂아 넣은 손톱을 까딱거리며 비웃었다. 아지는 격하게 도리질했다.
“멍! 아냐! 나, 기억하는걸!”
“냐-냐냥. 그래봤자다냐. 약속은 냐의 이득이 될 때만 지키는 거다냐. 약속 지킬 왕도 없겠다, 인간은 약속 다 까먹었을 거다냐.”
“아냐! 아냐! 인간, 기억해! 봐봐!”
아지는 나비의 말을 크게 짖어 부정했다. 나비는 코웃음을 쳤지만, 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지금껏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따라왔던 개의 왕 아지. 그 착하고 호의적인 짐승은 내가 약속을 기억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으로. 만면에 미소를 가득 담고는 먼 옛적 했던 약속을 꺼냈다.
“내가 너를 지켜줄게. 너도 나를 지켜줘. 나는 너를 믿을게, 너도 나를 도와줘.”
인간이라면 무조건 꼬리를 흔들고 보고, 그게 악인이든 선인이든 결코 공격하거나 죽이지 않는다. 단점이라 볼 수도 있지만 장점이 훨씬 크다.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란 너무나도 써먹기 좋으니까.
아지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며, 가장 강력한 호구다. 아무리 속아도 나를 비롯한 인간을 향해 믿음을 버리지 않으리라.
“내가 너를 사랑할게. 너도 나를 사랑해줘.”
그에 비해 나는 인간의 왕이지만, 대부분의 힘을 잃은 지금은 꼭 답해야 할 의무는 없다. 언제나 삶이 약속보다 우선이거든.
그렇지만 저 순수하면서도 ‘인공적인’ 믿음을 앞에 두고 마냥 비웃을 수도 없다.
어쩌면.
“-그러면, 나쁜 늑대는 너를 해치지 못할 거야.”
아지는 내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아지의 큼직한 눈망울이 나를 향한다. 나는 손을 뻗어 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기억해.”
“멍? 기억해? 그럼, 나랑 늑대 잡으러 가?”
“응. 언젠간.”
믿음 가는 표정으로 그리 장담했건만, 아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캐물었다.
“멍? 언젠간? 언제?”
“언젠간 꼭 해준다니까.”
“언젠간이 언제야?”
“좀 여유로워지면. 지금 바쁘잖아. 봐봐. 저기, 사람들이 또 찾아왔어.”
나는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인파를 가리켰다. 군국의 병사들이다.
막시밀리앵이 이곳에 다가오면서 끼어들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 같지만, 싸움이 다 끝난 게 분명한데도 막시밀리앵이 보이지 않으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다가온 것이다.
아지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말해도 그저 믿는 수밖에 없다. 개는 그런 짐승이 되었으니까.
“멍! 언젠간, 꼭이야!”
“그래. 꼭이야.”
내가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아지를 다독인 나는 톱니바퀴 너머로 군인 무리를 응시했다. 이곳저곳 얼룩진 장교복을 입은 장성이 그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태평하군. 사령부 한복판에서 마력초나 피우고 있다니!”
아, 눈 마주쳤다. 내가 마력초를 뒤로 숨기는 동안, 장성이 위엄 넘치는 얼굴로 외쳤다.
“통신병!”
그러자 옆에서 제복 차림의 통신병이 나타났다. 꽤 낯이 익었는데, 통신본부 모듈 아이에서 마주했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통신병은 장성이 내뿜는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쭈뼛쭈뼛 눈치를 보았다.
“군국 통신병 아이피 대위입니다.”
“접근 금지 명령은 아직 유효한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통신병 아이피는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통신을 끝마친 아이피는 받아들인 그대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사령부에서는 현 주소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유지하는 상태입니다.”
“지금! 습격당했는데도 손 놓고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히끅!”
장성의 기백을 정면으로 받은 통신병이 겁을 집어먹었다. 나는 히스토리아를 슬쩍 보며 말했다.
“야. 리아. 너 육장성이잖아. 저 사람 어떻게 해 봐.”
히스토리아는 통신병 쪽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멕시오 중장이야. 나보다 한 계급 높아.”
“젠장. 육장성이면서 계급은 왜 이렇게 낮은 거야?”
“육장성은 단독작전권이 있을 뿐, 계급은 별개로 책정돼. 지위로 육장성 주는 게 아니라고.”
“너 말고 다른 다섯 명은 다 대장이잖아.”
“…다 군국 초창기부터 활약한 사람들이니까.”
어, 방금 약간 긁혔다. 조금만 더 긁어볼까.
“그 사람들은 군국 초창기부터 대장이었다고 들었는데? 너는 임관한지 꽤 됐는데도 고작 소장밖에 안 돼?”
“고작 소장밖에 안 되니까 배신하고 너한테 붙었지, 대장이었으면 널 붙잡아서 사령부에 가뒀어.”
비겁하게 마음의 빚을 쓰다니. 여기서 썼으니까 나중에 안 갚도록 하지.
“단독작전권이 있다며. 그거라도 써 봐.”
“글쎄. 해주려나.”
안 해줄 것 같긴 해. 나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너무 존재를 무시한 탓일까.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멕시오 중장은 접근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더는 못 참아! 군량이 폭발하지 않나, 의문의 뱀이 내 부하를 깔아뭉개지 않나! 와중에 배신자는 태연히 마력초를 빨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그게 말이 되나!”
“메, 멕시오 중장님, 현재, 이곳은 접근 금지 명령이….”
“시끄럽다!! 통신병. 지금은 준전시 상황이다! 언제부터 대위 따위가 장성의 명령에 토를 달았지?!”
“히끅, 죄, 죄송합니다….”
직접 맨몸으로 세상과 마주한 통신병은 상당한 고초를 겪는 모양이었다. 멕시오 중장에게 적극적으로 경고해야 하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권한밖에 없는 연약한 소녀가 장성의 압박을 이겨내진 못했다.
통신병이 굳이 골렘을 통해서 통신한 이유가 있다는 거다.
“애초에, 이렇게 미덥잖은 게 통신병이라니….”
고개 숙인 아이피 대위의 귀로 장성의 비난이 내리꽂힌다. 통신본부가 완파되고, 무언가에 홀린 듯 도망쳤던 아이피 대위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전군. 집합. 목표를 억류한다. 저항할 경우 무력을 써도 좋다. 어이, 히스토리아! 듣고 있나? 군국 전체와 싸울 게 아니라면 얌전히 오라를 받아라! 저항한다면 네 남자친구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