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15)
‘역시 유능해. 그슬린 피로 쓴 글자라면 시조께서도 인지하실 수는 있을 터. 이 녀석, 인간이지만 훌륭하구나. 한데… 그렇다면 저 계집년은 왜 데려온 거지?’
시험이야.
내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시조를 깨운다고 한들, 베타가 자살 행동을 하면 우리 전부가 위험해지니까.
핀레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그을린 피로 점을 찍었다. 일단은 좀 상투적인 대사부터 시작하고, 이래도 안 일어나면 사랑고백이나 해보자. 이래도 안 일어나? 흡혈귀 나이나 언급하면서 살살 긁는 거다.
원래 상쾌한 기상 따위는 없다. 인간이든, 흡혈귀든 잠에서 깨려면 조금 불쾌할 정도로 강렬한 자극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조금 상투적인 혈서를 쓰는 동안.
두 연놈들은 손을 꼭 잡은 채로 그저 지켜만 보았다.
“휴즈, 아파 보여….”
“휴즈 혼자선 한계가 있어. 피로 글자를 써도 많이 쓰진 못할 거야. 여차하면 내 피를 써야겠어.”
“그렇지만, 굳이 그래야 해? 저렇게까지 했는데도 시조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더 쓸 이유가 없잖아.”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시조가 없다면 에본을 이길 수 없어.”
“애초에, 시조가 우리를 도우리라는 보장이 있어? 시조는 지금껏 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악당이야. 배가 고프다고 우리 모두의 피를 빨아갈지도 몰라.”
베타는 그리 말하며, 저도 모르게 자기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거기에는 그녀의 버팀목이자 우상인, 천신의 십자가가 목걸이에 매달려 있었다….
아, 결국. 그 선을 넘어버렸구나.
“엘시. 차라리 폭약을 터뜨리는 건 어떨까?”
“신디! 진심이야? 그랬다간 모두가 죽어!”
“우리 레지스탕스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들어왔잖아. 미뤄둔 계획을 다시 하는 것뿐이야.”
긍정적인 감각은 인간을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 멈춘 인간을 움직이는 건 언제나 부정적인 감각이다. 역사가 피에 젖은 이유는, 흐름을 싣고 움직이는 인간들이 전부 악에 받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다. 레지스탕스는 현생에 불만을 느껴서 군국과 맞서 싸우기로 했고, 베타는 흡혈귀가 싫어서 강짜를 놓는 중이다.
그리고 시조 티르칸쟈카는….
“다 같이… 죽자는 뜻이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흡혈귀의 양식이 되는 것보다, 이 모든 걸 안고 순교하는 게 나아….”
에라. 너는 그냥 죽어라.
나는 혈서를 쓰다 말고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 직후, 문이 폭발하듯 열렸다. 아지가 두들겨도 꼼짝하지 않던 강철 문이 탐욕스럽게 입을 벌리고, 그 안에서 검붉은 혈기가 길게 혀를 내밀었다. 베타를 향해.
“아…?”
시야가 검붉게 물들자 베타는 반사적으로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뻗어 나온 혈기도 그대로 베타를 움켜쥐었다.
와드득, 빠드득.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튄다. 나는 인간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저게 인간을 짓씹는 소리라는 건 학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베타의 생각이 끊기기까지는 찰나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혈기의 파도에도 간조는 있는 모양이다. 거칠게 지상을 탐하던 혈기는 때가 된 썰물처럼 물러갔다. 간조가 찾아온 뒤 모래사장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델타가 눈을 끔뻑거렸다.
“…신디?”
‘뭐, 뭐야. 조금 전만 해도 근처에 있었는데. 손을 잡고 있었는데. 무언가, 뜨끈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연인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그는 허공을 더듬으며 연인의 모습을 찾았다.
“신디? 베타? 왜, 왜 그래. 장난하는 거지? 어, 어디 갔….”
불행하게도 델타는 적당히 똑똑했다.
끝까지 십자가를 저버리지 못한 여자친구가 결국 시조의 심판을 받게 되었노라고.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이 논리라는 길을 거쳐 답에 도달한다. 누가 봐도 명확하다.
그러나 델타 자신이 애써 부정한다. 현실을 거부하고 세상에서 사라진 연인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린다. 어디에도 없지만, 어딘가 있으리라 믿으며.
그때, 핀레이가 상처 벌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그래. 걸맞은 결말이야! 천신도 닿지 않는 이 무저갱에서, 하필 시조를 곁에 두고 천신을 찾다니! 죽여달라고 울부짖는 것과 똑같지! 하하하하! 죽는 게 소원이라면 죽어야지! 암! 이게 맞지!”
쐐기를 박는 듯한 말에 델타는 커다란 분노를 느끼며 고개를 홱 돌렸다.
“너…! 핀레이…!”
“맞아요. 자살했으면 죽어야죠. 아무리 생각해도 죽는 게 맞아요.”
내가 차갑게 단언하자, 델타는 머리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델타의 시선을 무시하며 핀레이에 박힌 말뚝을 뽑아주었다. 자유를 되찾은 핀레이는 상처를 재생시키며 말했다.
“이리되리라 예상했나?”
“어느 정도는. 제 혈서로 끝나기를 바랐지만요.”
“크하하하! 역시, 마음에 들어! 마음이 바뀌었다, 휴즈! 시조께 모두 죽여버리라 간청할 생각이었는데! 너만은 살려주도록 하지!”
웃기네. 내가 살고 죽는 문제가 왜 너한테 달렸냐? 나한테 달렸지.
“필요 없어요. 당신이 죽으라고 간청한다고 시조가 그걸 들어줄 것 같아요? 시조가 당신 시다바리인가요?”
“뭐, 뭐?”
“종알종알 시끄럽게 굴지 말고 문도 열렸으니 일단 들어가죠.”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잠깐 멍청한 표정으로 있던 핀레이는 다급히 내 뒤를 따랐다.
우리가 들어가고 조금 뒤. 델타도 힘없는 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무슨 생각으로 들어온 건지는… 아직 불분명했다.
시조의 거처는 그 자체로 천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아름다운 벽화는 피로 물들어 섬뜩하게 빛나고 있고, 잔잔한 촛불은 불길한 핏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발 밑만 간신히 확인할 어둠을 더듬어 걸어간 우리는 그 길 끝에 있는 시조의 방에 도착했다.
[…너희를 여기 부른 건, 순전히 궁금했기 때문이다.]잠에서 깼음에도 시조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관에 본신을 뉜 채 누운 채 목소리만 전하는 방식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조는 순전한 호기심을 담아 나에게 물었다.
[같잖은 신자를 제물로 나를 자극한 것인지, 그 가당찮은 연서로 나를 깨우려고 한 것인지. 궁금해서 다시 잠을 청하지 못할 것 같더구나. 대관절 네 의도가 무엇이었느냐?]“연서? 네놈, 피로 뭐라고 썼느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래 전부터 당신을 사모해왔습니다. 부디 그 아리따운 얼굴만이라도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썼어요.”
“네노오오오옴! 감히이이이이이!”
[시끄럽다.]시조의 한마디에 핀레이는 입을 닫았다. 자의적인 침묵이 아니다. 흡혈귀의 피 한 방울까지 모조리 지배하는 시조의 명령은 절대적. 시조가 허락하기 전까지 핀레이는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유쾌한 아이로구나. 나를 앞에 두고도 두려움에 떨지 않고 따박따박 대꾸하는 이를 얼마만에 본 것일까.’
시조는 관 속에서 쿡쿡거리며 웃었다.
[후후. 가당찮구나. 진심일 리는 없을 거고.]“진심이라면 받아주시나요? 그렇다면 전 언제나 진심입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내가 네 마음을 받을 리도 없지 않느냐. 어디 보자. 위에서 벌어지는 혈전이 네 관심사렷다. 맞느냐?]“만일 제 마음을 받아주신다면 그 부탁을 가장 먼저 하려고 했어요.”
[후후후. 혓바닥에 기름을 바른 듯 번지르르하구나.]‘나는 무관한 인간의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 싸움에 짐승의 왕까지 더해졌다면 더더욱. 그러나… 싸움을 멈추는 것뿐이라면. 이야기에 따라 들어줄 수도 있다.’
시조 티르칸쟈카는 심장이 뛰지 않는다. 쉬이 불쾌해지지도 않고, 비슷하게 유쾌해지지도 않는다. 감정이 없진 않으나, 감정과 행동에는 크나큰 간극이 존재한다.
그만큼 티르칸쟈카를 상대할 때는 살짝 자극적인 편이 좋다. 내 행동이 튈수록, 평범한 모습과 다를수록 살려둘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동료를 그리 중히 여긴다기엔, 조금 전 천신의 신자를 죽게 두지 않았으냐.]그렇다고 십자가를 손에 쥐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 장난에도 선이 있는 법이다.
“저는 임자 있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거든요. 얼마나 관심이 없냐면 생사도 알 바 아니에요. 어차피 저랑 이어지지 않을 건데 무슨 상관일까요?”
“죄송하지만 어떤 선택지든 의미없어요. 제겐 당신밖에 없는걸요.”
[능청은 세계 제일이로구나!]‘제법 유쾌한 아이로구나. 곁에 두면 적적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시조에게 좋은 인상을 심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수확만 하면 돼. 나는 차분히 시조의 말을 기다렸다.
[만일 네가 홀로 살고자 한다면 너의 목숨만은 지켜줄 것이다. 만일 네가 동료를 구하고자 한다면 중재자로 나서 휴전을 제안하마. 단, 싸움을 말리는 과정에서 네가 위험해 처하더라도 구하진 아니할 것이니. 자. 무엇을 고르겠느냐?]나 하나만의 확실한 안전인지, 아니면 모두의 안전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지. 당연히….
내가 정해진 대답을 그대로 읊으려는 때였다.
“으아아아아아아!”
델타가 총을 든 채 시조의 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인간의 생각을 읽을 뿐,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로 몰랐을까.
“세트, 리!”
무저갱에 빠진 지 몇 개월.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서로를 의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고립된 공간에서 자주 접촉하기도 하니 없는 정까지 드는 것도 당연지사.
또한 사랑은 종족 보존에 한 발 보태는 감정이라, 남녀 서로에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을 때 더욱 커진다. 베타와 델타가 딱 그 경우였다.
뭐, 거창하게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파렌하이트으으으으!”
결론만 말하자면, 델타는 베타를 사랑했다.
“어째서어어어!”
타아앙. 마력으로 점화한 총구에서 불꽃이 나선을 그린다. 마탄…이라기보다는 그냥 마력의 불이 붙은 탄환이지만. 공격의 의사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분명하게 전해졌다.
총성 속에서 델타가 외쳤다.
“이 저주받을 흡혈귀! 굳이, 굳이 그렇게 끔찍한 방식으로 죽여야 했어? 신디는 네 입장에서 벌레만도 못한 존재잖아! 벌레가 울부짖든 말든, 그냥 무시했어도 되잖아아아아!”
물론, 닿은 것은 공격의 의사와 외침뿐이다. 장교도 되지 못한 델타의 공격으로 시조가 타격을 입었다면 천 년 넘게 공포의 상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총탄이 의미 없이 어둠에 삼켜지는 가운데, 시조가 델타를 알아보고는 대꾸했다.
[신디? 아아.]관이 살짝 열리고, 그 틈으로 새하얀 손이 뻗어나왔다. 색을 잃은 나긋한 손끝에는… 피 묻은 십자가가 거꾸로 서 있었다.
신디의 것이다. 십자가를 거꾸로 쥔 시조가 차갑게 말했다.
[감히 천신의 장난감을 내 앞에서 만지작거린 핏덩이 말이더냐?]“신디이이이이!”
탕, 탕, 탕. 총탄을 장전하자마자 조준도 안 하고 쏴 재낀다. 유의미한 피해냐 논하기 전에 애초에 관에 맞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델타는 상관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도 이 행위가 자살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을 뿐이다.
[네 말대로다. 너희들이 무어라 지껄여보았자 의미 없는 울음소리이며, 무엇을 해보았자 의미 없는 몸짓이다. 나는 그것을 평가하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그래! 그토록 강하다면! 자비를 보여도 되잖아아아!”
[하나, 천신을 향한 믿음은 다르다. 그것은 나를 향한 모욕이자 모독이니. 나는 지금껏 그 믿음에 대가를 치르게 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믿음이 그리 두텁다면, 그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내게 죽어도 후회가 없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