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3)
EP.33 레지스탕스 – 8
의복 패킷은 생체 단말에 있는 아바타 정보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의복 패킷을 생체 단말에 끼워넣으면 체형이나 키, 사이즈에 딱 맞는 형태가 되어 몸을 감싼다.
편리하다. 귀찮게 입고 벗을 필요도 없고, 빨래도 손쉽다. 몸이 자라거나 살이 찔 때마다 새로 살 필요도 없다. 너무 오래 써서 닳거나 손상을 입어서 못 쓰게 될 경우도 있지만 그건 세상 모든 게 마찬가지.
군국민들은 그 편리함에 중독되었다. 모든 국민에게 생체 단말을 새기겠다는 군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건 군국의 권력보다도 그 편리함이 더 큰 이유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나라가 오랜만에 도움 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시술을 받았다.
다수의 암묵적인 동의는 자연스럽게 소수를 향한 핍박으로 이어졌다. 어느 순간 군국에서 생체 단말을 새기지 않은 건 중범죄가 되었다.
덕분에, 군국은 패킷 하나로 대부분의 군국민을 구속할 능력을 갖게 되었다.
“안돼!”
섬유가 카니센의 몸을 휘감는다. 떼어낼 수도, 잘라낼 수도 없다. 섬유는 그의 피부 바로 위쪽에서부터 이루어져 그를 구속하고 있으니까.
갑옷도 옷이라고, 군국은 군장을 만들어 의복 패킷을 무기화했다. 당연히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내가 무저갱에 떨어질 때, 나는 구속복을 입고 있었다.
구속복 역시 옷이다.
그러면 나는 구속복을 어떻게 입었을까?
그렇다.
군국은 의복 패킷을 다른 방향으로도 악용했다.
끼우는 순간 자의적으로는 벗을 수 없는 의복 패킷, 살아 움직이는 수갑. 구속복으로.
회귀자가 생체 단말을 보고 이를 가는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천앵처럼 둥둥 떠다니는 검이 있다면 모를까, 아니면 기공으로 신체를 강화시키는 경지 정도는 되면 또 모를까.
돌을 깨부수고 사람을 뼈째로 씹어먹는 짐승도 덫에 걸리면 꼼짝을 못한다. 인간이라면 뭐, 말할 것도 없지.
뭐, 어쨌건.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내 최고의 일일조수였어요.”
꽤 괜찮은 마술쇼였다.
말이 약점이지, 사실 싸우는 도중 생체 단말에 패킷을 꽂아 넣는다는 게 뭐 쉬운가. 그냥 칼날로 손목을 긋는 편이 편하지. 상대방이 빤히 보고 있는데 어떻게 옷 소매를 찢고 그 안에다가 패킷을 때려 박냐고.
나 정도 되는 마술사이자, 전직 전설의 소매치기범이 아니라면 불가능했겠지.
“익! 익! 우웁!”
양팔이 뒤로 묶인 채 고정된다. 양다리 역시 구속당하여 꼼짝할 수 없다. 단단한 벨트가 다섯 개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꽉 묶어 조이고, 철로 된 수갑이 손목을 감싼 채 쇳고리로 이어졌다.
입조차도 뻥긋할 수 없다. 자동으로 완성되는 맞춤형 재갈은 조금의 자비도 없이 아래턱과 윗잇몸 사이를 파고들었다. 시야를 차단하는 안대도 생겨났다.
저항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조차 못하게 만드는 완벽한 구속이다. 역시 군국이라고 해야할까, 인체공학적인 구조로 만들어 저항을 원천 차단하고 있다.
조금 부끄럽지만, 나 정도 되는 마술사도 탈출하지 못했다.
흥분한 짐승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가린다고 하던가. 그건 인간에게도 통용되는 개념이었다.
안대에 눈이 가려져 자신을 관조하게 된 카니센은 1분 정도 몸부림을 친 끝에 깨달았다. 그의 능력으로는 구속복을 벗을 수 없다는 것을.
눈 감고 불편한 자세를 취하는 행위는 예로부터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널리 알려져왔다. 명상, 이라고 하던가? 현 시점에서 가장 훌륭한 명상을-스스로 그만 둘 수 없다는 점에서- 하고 있는 카니센은 금방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렸다.
‘어느, 새? 언제부터? 이 패킷을 어디에 숨기고 있었지? 아니, 나는. 왜.’
좋아. 이제 마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구나. 싱긋 웃은 나는 그의 뒤로 돌아가 안대를 벗겼다. 카니센은 내 웃는 얼굴을 본 순간 발끈했지만 이내 힘을 풀었다. 패배를 수용한 것이다.
역시, 늘 느끼는 거지만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이다. 봐봐. 구속복을 선물하니 한결 친절해졌잖아.
“자아. 보세요. 제가 트릭을 공개하는 건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니까요.”
싱긋 웃으며 뾰족한 꼬챙이를 들었다. 그것을 휙 뒤집어서 카드로 바꾼 뒤, 손바닥에 숨긴 채로 양손을 펼쳤다. 기다란 꼬챙이는 한순간에 내 손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카니센의 눈이 커졌다.
‘내가 떨어뜨렸다고 생각했던 게…!’
“정답! 사실 떨어뜨린 척, 카드로 바꿔서 숨기고 있었죠! 이걸로 스윽, 옷을 찢고 소매 넣기 해버린 거예요! 이해가 빨라서 좋네요!”
날 선 꼬챙이. 소매치기들은 하나 정도 들고 다니는 도둑 도구다.
끄트머리가 날카롭게 갈려 있어서, 손 안에 감춘 채 가방을 스윽 쓰다듬으면 안쪽에 숨겨둔 것을 다 내보이고는 했다.
‘눈치채지 못했다, 빌어먹을…!’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한때 저는 전도유망한 소매치기였어요. 제가 배를 가른 가죽이 너무 많아서, 한때 저 때문에 가죽으로 된 가방이 팔리지 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니까요. 그때 이후 손을 씻었는데 다행히 아직 실력은 녹슬지 않았나 보네요.”
‘빌어… 먹을….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아, 그건.”
내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 저 멀리에서 감마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대장님? 대장님? 괜찮으시죠?”
카니센이 눈을 부릅떴다.
‘안 돼. 감마! 입 다물어! 폭탄을 설치하고 어떻게든 타격을 줘!’
그러나 카니센의 생각은 재갈에 막혀서 나오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감마는 독심술사가 아니었기에, 카니센의 바람을 읽을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생각은 애꿎게도 나에게만 들리고 있다. 속내를 가장 전하고 싶지 않을 나에게만.
“아. 맞다. 저게 있었지.”
‘안돼! 감마, 빨리 폭탄을 터뜨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감마!’
“일단 저기부터 처리해야겠네.”
‘제발! 감마!’
구속복의 벨트를 잡아당기며 카니센을 끌고 갔다. 땅에 떨어진 잔해에 부딪힐 때마다 툭툭 걸렸다. 힘이 들어서 짜증이 났지만, 거기에 부딪히는 카니센은 더 괴로울 거라고 믿고 힘차게 잡아당겼다. 솔직히 이건 카니센 탓이다. 누가 잔해를 다 뒤집어엎으래?
지하로 향하는 통로로 돌아왔다. 기둥에 묶인 로프가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다. 꼭 주인을 잃은 낚싯대처럼.
부서진 균열 속, 지하 깊숙이 드리워진 로프. 거기 묶여서 아래쪽을 조사하던 감마는 지금 로프를 잡아당기며 카니센을 찾고 있었다.
‘왜, 대장님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지? 기껏 탄탈로스의 구조를 알아냈는데…. 빨리 폭탄을 설치하지 않으면.’
탄탈로스의 구조?
로프를 자르려던 나는 멈칫하고는 감마의 생각을 읽었다. 자, 어디. 구조가 어떻게 되나.
어.
으음.
어어? 진짜?
잠시 고민한 나는, 로프 대신 일단 카니센의 재갈을 벗겼다. 툭 하고 단추가 풀리자 침으로 범벅이 된 재갈이 땅으로 떨어졌다. 카니센은 잠깐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즉시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그동안 나는 근처에 걸터앉고는 차분히 감마의 생각을 읽었다.
“명령이다! 감마, 폭탄을 터뜨려!”
“네, 네?”
감마는 영문을 몰라하며 소리쳤다.
“대장님! 저를 올려주세요! 아래쪽에 디딜 곳이 없어서, 로프를 잡아 당겨주지 않으면 올라갈 수가 없어요!”
“나는 패배했다! 이제 남은 기회가 없어. 로프가 끊기기 전에 바로 폭탄을 터뜨려!”
“하, 하지만. 여기서 터뜨렸다간.”
“이제 기회가 없어! 지금 당장 터뜨려!”
“포, 폭탄은 제 품에 있는데.”
“그래! 네 품에 있는 폭탄을! 지금 당장 터뜨리라는 말이다!”
감마는 위크롤이라는 이름의 기술자였다. 그는 군국의 어둠에 손을 담갔고, 자신의 손으로 만든 도구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 쓰이는 것을 보았다. 크나큰 죄책감을 느낀 그는 참지 못하고 레지스탕스에 투신했다. 그렇게 촉망받는 엔지니어 위크롤은 레지스탕스 감마가 되었다.
하지만 레지스탕스에 들어갔음에도 감마는 기술자였다. 아무리 존경하는 대장의 명령이라도, 비합리적이라면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았다.
“여기서 터뜨려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폭발이 아래쪽으로 빠져나갈 뿐이에요!”
감마는 아래쪽에서 본 광경을 떠올렸다.
부서진 잡동사니가 널브러진 관리실. 다리가 부서진 넓은 책상을 치우면 그 아래 지하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공격을 받을 때 계단도 같이 무너져, 아래로 가려면 로프에 의지해서 내려가야 했다. 감마는 로프 하나에 매달린 채 잔해를 비집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고.
물구나무를 서서 평원을 바라보는 듯한, 탁 트인 공간에 도착했다.
그 순간, 감마는 이 탄탈로스의 구조를 깨달았다.
처음 그가 느낀 건 엔지니어다운 쾌감이었다. 잘 모르는 구조의 장치가 하나의 원리에 의해 정렬되어가는, 모든 게 착착 맞아떨어지며 생기는 짜릿한 감각. 그 뒤 군국이 고심해서 만들었을 이 감옥을 깨부순다는 희열이 찾아왔다.
고작 케이스 하나 분량의 폭탄. 이것만으로도 군국이 탄탈로스를 만들 때 든 천문학적인 비용이, 말 그대로 무저갱 아래로 사라질 터였다. 얼마나 효율적인가. 말도 안 되는 교환비다. 감마가 상인이었다면 희대의 사기꾼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술에 대해 무지한 대장은 감마에게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을 강요하고 있었다. 감마는 격분해서 소리쳤다.
“이 탄탈로스는 양끝을 받친 쟁반과 비슷한 구조에요. 무저갱의 밑바닥이 아니라, 무저갱 한가운데 걸쳐 있다고요!”
걸친 접시를 깨뜨리는 법은 간단하다. 걸친 부분을 없애면, 딱히 손댈 곳도 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나머지는 대지모신께서 알아 하시리.
“폭약을 세 개로 나누어 이곳에 하나, 양쪽 끝에 하나씩 터뜨려야 해요! 그러면 탄탈로스는 균형을 잃고 아래쪽으로 떨어져요! 그것만이 이 거대한 탄탈로스를 무너뜨릴 유일한 방법이에요!”
정답은 하나다. 나머지는 의미가 없다. 감마는 필사적으로 대장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으나.
“그럴 수가 없다고 몇 번을 말하나! 당장 터뜨리라는 말이 안 들리나, 감마! 당장 폭발시켜!”
“그랬다간 저만 죽는다니까요!”
“죽으라고 명령하는 거다!”
“…네?”
감마의 생각이 잠깐 멎었다.
“그가 근처에 있다! 지금이라도 터뜨려라! 간악한 군국에, 그리고 동지를 죽인 그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려면 그 수밖에 없다!”
“하, 하지만. 이걸.”
“터-뜨-리-라-고!”
감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지금 탄탈로스의 아래쪽 바닥에 매달려있다. 폭발은 발산. 사방이 훤히 드러난 곳에서 터뜨려보았자, 그 힘은 저 아래쪽으로 허무하게 퍼져나갈 것이다.
로프를 기어 올라가, 균열 사이에 폭탄을 넣고 터뜨려야 그나마 피해다운 피해를 입히겠지. 그마저도 탄탈로스를 무너뜨리기에 한참 부족하겠지만.
하지만 그보다.
감마는 그를 감싼 두려움과 마주했다.
만일 탄탈로스를 떨어뜨린다면? 감마도 언젠가 죽겠지만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무저갱이니 낙하는 영원할 거고, 죽음을 차분히 받아들일 시간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떨어지면서 친구들과 만날 수도 있다. 감마는 친구들과 함께 성공을 축하하며 해후를 나누다가 어딘가에 부딪혀 순식간에 죽겠지. 고통은 느낄 새도 없을 것이다. 대지모신은 아주 빠르고 포근하게 그의 몸을 품어주시리라.
어쩌면 무저갱이라 낙하가 영원토록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 질릴 때까지 웃다가, 결국 지쳐 잠들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겠지. 암흑 속에서 잠들 듯이 찾아오는 죽음을 맞이하리라.
그러나 만일 폭탄을 터뜨린다면? 몸이 조각조각 나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뿜어져나오는 빛에 눈이 멀고, 열기에 폐부가 타오르며, 폭발에 감마의 몸은 갈기갈기 찢긴 채 무저갱에 흩뿌려질 것이다.
감마가 손을 덜덜 떨었다.
그는, 이곳에 내려온 순간 죽음을 각오했지만.
그는 아직, 준비가 부족했다.
마침 생각을 다 읽었다. 나는 꼬챙이를 꼭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가 부족해요? 그렇다면 제가 도와줄게요.”
“안 돼!”
카니센의 고함소리와 감마의 울먹거림이 점점 커져 갔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죗값은 지옥에서 치를게요.”
나는 내 좆대로 행동하겠다는 말을 가장 종교적으로 말하며 꼬챙이를 그었다. 로프가 끊어졌다. 대장의 입에서 비통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탄탈로스 바깥에서도, 저 멀리 멀어지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감마는 이것으로 무저갱의 미아가 되었다. 대지모신이 버린 곳에서, 그는 죽기 전까지 영원을 떠돌 것이다.
그가 충분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결하기 전까지.
카니센은 흐느꼈다. 이제 아무도 그를 성공시킬 수 없다. 내가 그의 추악한 일면을 도려내어 눈앞에 들이미는 걸 막을 수 없다.
“추악하죠? 당신이 끝까지 말한 건, 더욱 빨리 목숨을 버리라는 명령이었어요. 당신은 구속되어 제 아래 깔려 있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에게 죽으라고 다그쳤을 뿐이에요.”
“죽여! 나를 모욕하지 말고 빨리 죽여라!”
진짜로 위대한 사람은 한 줌이다. 나머지는 내몰리다가 닿은 절벽에 끝에서, 마치 자기 의지로 선택한 척 뛰어내린 이들. 영웅도 소시민도 되지 못한 시대의 미아.
안타깝게도 카니센 리버우드는 그 한 줌 안에 들지 못했다. 결국 그도 내몰려서 무저갱으로 떨어졌을 뿐이다.
“자기합리화, 변명. 아무 의미 없는 참회와 고해. 자기모순. 그리고 위선. 최선을 다했다며 자위하기 위해 아무런 쓸모없는 작전에 인력과 자원을 쏟아 넣었죠. 대단히 호화로운 자살이네요. 네 명의 젊은이는 당신과 함께 순장당하고, 반군의 자산은 당신의 부장품이 되었어요.”
“차라리 죽이라고!”
카니센은 땅에 얼굴을 박았다. 몸을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자신의 머리를 몇 번이고 내리찍었다.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돌을 입안에 넣고 씹었다. 깨진 돌조각이 입속을 찢어발겼다. 그는 깨진 돌조각을 삼켰다. 날카로운 파편이 그의 몸속을 갈갈이 찢어버리도록.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혀를 끊었다. 이빨이 말랑한 살덩이를 자르고, 피가 콸콸 솟구쳤다.
그 정도로도 죽지 않는다.
차라리 죽었으면, 이대로 잊히고 싶은 마음에, 카니센은 계속 자해했다.
그러나.
역사서에 기록되지 못할지라도. 구전되어 세상에 새겨질 수 없더라도.
다 읽어낸 나는 그를 잊을 수 없다.
“저는 당신을 알아요. 당신이 살아온 삶, 보고 느낀 것.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부 읽어버렸죠. 그랬으니까, 그랬기에 저는 당신을 평가하지는 않을게요.”
읽는다.
생각을.
삶을.
꿈을.
죽음이 찾아오기 전, 인생을 되새기는 찰나의 영원.
주마등에 스치는 생각을 남김없이 읽어 하나의 책으로 엮는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납골당. 잊힐 이들을 추모하는 도서관. 납골당은 사자의 죄를 판단하지 않고, 도서관은 장서의 급을 나누지 않아요. 그저 추억하고 담아두기만 할 뿐.”
대장이 한순간 몸에 가득 힘을 줬다. 입안에 있었던 돌조각 중 하나를 나를 향해 쏘아냈다. 살점이 섞인 피로 물든 돌조각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내 발치에 떨어졌다.
이건 공격이 아니다. 시위다.
지금이라도 당장 나를 죽여달라는, 이 고통을 끝내달라는 처절한 시위.
원한다면야.
나는 꼬챙이를 쥐고 그의 뒤로 돌아갔다. 그의 등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꼬챙이를 꽉 쥔 채 들어올렸다. 뾰족한 끄트머리가 시리도록 날카롭다. 사람을 파고 들기 좋을 만큼.
“안녕히 가세요. 카니센 리버우드. 아름다운 강가에서 낭만을 마시고 자란 최후의 기사여. 세상 모두가 당신을 잊겠지만, 그 누구도 당신의 최후를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과 당신을 따라온 네 청년을 기억할게요.”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최소한 카니센 리버우드의 죽음은 지금 결정되었다.
그는 살아갈 의지를 잃었고.
나는 그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니까.
카니센 리버우드는 눈을 감고 고개를 쳐들었다. 차라리 빨리 죽여주기를 바라며 목을 길게 뺐다.
언제나 죽을 각오는 있었던 그였다. 남을 죽일 각오도 있었다. 그가 누군가를 죽여도, 그가 누군가에게 죽어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리라.
다만, 자신의 추악함과 마주할 각오만 부족했을 뿐이다.
이 세상에는 지옥이 없다. 천국도 없다.
있는 건 버려진 납골당 하나.
편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편히 쉬기를.
꼬챙이를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대로 당겼다. 날이 비스듬히 움직인다. 그 궤적에는 한 사람의 목이 걸려있다. 가죽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붉은 생명이 흘러나온다.
그가 죽으면서 괴로움을 느꼈을지, 안식을 얻었을지.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겠지.
나만 빼고.
짧은 고통과 영원과도 같은 주마등이 스친다. 머지않아 그의 생각이 끊겼다. 카니센의 몸이었던 건 한 구의 시체가 되었다. 사소하고, 의미 없는.
한 권의 책에 작은 마침표가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