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32)
회귀자는 이전 회차를 떠올리며 말을 골랐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먼발치에서 보았던 황금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죄악의 왕이 등장하기 전. 세계의 위기를 앞두고 황금궁의 수호자들은 회귀자에게 황금경과 독대할 기회를 주었다. 궁궐 위에 올라타, 공허한 대전에 오른 회귀자는 황금경을 향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도와달라고 외쳤다.
그렇지만 황금경은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목소리를 듣지도 않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연금술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만 했다. 그의 뒤로 어디에 쓰이지도 못할 장난감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회귀자는 황금경을 때려서라도 주의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무형의 기운이 그녀를 밀어냈다. 황금경의 역장은 세기말 온갖 보물로 힘을 키운 회귀자마저도 밀어낼 정도로 강력했다.
단절의 벽. 황금경은 역장 너머에서 연금술을 계속했다.
마치, 앞으로 다가올 멸망은 자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이.
결국 참다 못한 회귀자는 그를 향해 지잔을 휘둘렀으나… 역장을 깨뜨리고 황금경의 영역에 닿는 순간, 세계가 그녀를 배제하기 위해 움직였다.
황금경의 권능은 연금술. 극의에 달한 연금술은 만물을 창조한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 창조된 만물이 회귀자를 습격했다. 그때는 경지에 이른 회귀자조차도 죽을 뻔했다.
그 뒤, 따라 들어온 수호자들에게 공격받았기에 회귀자는 더 무언가를 시도하지도 못하고 쫓겨나 버렸지만….
어쨌든 죽어도 다시 돌아오는 회귀자에게는 귀중한 정보였다.
“황금경은 미쳤어.”
아아. 그러니까…. 말을 잘못 걸면 나를 세상에서 지워버린다는 거지? 음음, 알겠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역시 돌아갈래요.”
“기다려 봐! 내 말은, 그가 미치광이 폭군이라는 뜻이 아니야. 단지, 그는 지금 넋이 나간 것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데만 집중하는 중이야. 잡동사니로 열국을 다 채워 넣을 것처럼!”
“그런 미친 사람한테 휴전협정서를 왜 들이밀어요. 현실성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니라니깐! 휴전협정서는 황금경에게 보여주려고 챙긴 게 아니야. 황금궁의 수호자들만 설득할 수 있어도 전쟁을 막을 수 있어! 황금경은 나라가 어찌 되든 무관심하고 결국 열국을 움직이는 건 수호자들이니까!”
이제야 알았다. 황금경은 강력하지만 그저 배회하는 치매노인일 뿐이라고? 수호자들이 진짜 실세고? 그러면 처음부터 이야기했어야지.
회귀자는 참 생각 읽기 빡세단 말이야. 시간 너머에 있는 과거 회차에서 얻은 정보는 읽을 수 없으니까, 회귀자가 그때그때 그 기억을 떠올리도록 해야 하는데 상당히 피곤하네.
“뭡니까, 셰이 씨.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괜찮을 것을 왜 숨겨요?”
“…표면적으로는 황금경이 열국을 지배한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수호자들도 황금경에게 충성하고. 비슷하니까 굳이 정정하려고 하진 않았지.”
회귀자는 어물거리면서 변명했지만, 나는 그 뒤에 가려진 생각을 낱낱이 읽어 들였다.
‘이건 황금궁의 기밀. 황금경과 직접 만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정보니까. 이 정보를 알려줬다간 성녀라는 의심을 피할 수가 없어. 너무 많이 대답했다간 회귀까지 설명해야 하니까….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의심을 받는 것 같지는 않지만.’
글쎄. 어떨까? 이제 슬슬 위험하지 않아?
어쨌든 좋다. 황금궁의 수호자라면 황금궁에 있을 거고, 거기에는 황금경도 있겠지. 타국민인 내가 당당하게 걸어가서 황금경의 생각을 읽을 기회는 좀처럼 없을 테니 가야 한다.
그래야 내가 황금경의 생각을 읽어, 다섯 군주의 후손 중 하나인 금국의 왕 엘릭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알아낼 테니까.
아니, 설명을 잘못했나. 조금 더 확실하게 말하면.
인간의 왕이 가진 힘을 빼앗은 다섯 군주가 왜 인간에게 버림받았는지, 내 힘으로 직접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대표성을 되찾을 테니까.
왕국의 왕 그란디모오르.
같은 인간으로부터 적의를 받지 않는 권능을 지닌 군주는 거대한 민의에 휩쓸려 죽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죽음이다. 비록 군국이 성녀에 의해서 명맥을 유지했다고 해도 왕이 죽는 계기는 순전히 인간의 손에 의해 일어났다. 적의를 받지 않는 권능도 이전보다 훨씬 커진 사회의 부패와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다.
군주의 핏줄인 공주가 살아있긴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남에게 적의를 받지 않는 것만으로는, 단순히 ‘사람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왕이 되기 부족하다는 게 증명되었으니까.
칫, 성녀만 아니었으면 더 쉽게 가는 건데. 아득바득 군국이 유지되는 미래를 견지하는 바람에…. 모든 게 비밀에 싸인 채로 있어서 귀찮게 돌아다녔잖아.
어쨌든, 남은 건 이제 넷.
다음 순서는 금국의 왕 엘릭이다. 모든 구조를 단번에 파악하고 이해하는 기술과 야금의 왕은 황금경에게 잡아먹혔다. 어떻게 된 일일까…는 이제부터 알아가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건은 성녀가 손을 쓰지는 못한 것 같으니, 가서 생각만 살짝 읽으면 어떻게 몰락했는지 드러날 거다.
아, 생각해보니까 또 열이 뻗치네. 무저갱에서 운 좋게 패왕과 대종사에 대한 흔적을 찾았나 했더니. 성녀가 거기서도 패왕이 살아남는 미래를 견지하는 바람에….
인간의 왕이 인간에 대해 좀 알아가겠다는데 일일이 태클을 걸다니. 역시 천신이 문제야. 모든 걸 굽어살핀다니, 말만 번지르르하지, 사실 만인에 대한 스토커 아니야? 누가 좀 잡아가라고.
이쯤 되면 회귀자가 나타난 게 다행이다. 나 혼자서는 성황청의 방해를 뚫고 다섯 군주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실제로 회귀자가 있던 과거에서는 무저갱부터 실패한 것 같고.
휴. 회귀자 없었으면 큰일 날 뻔….
아, 아닌가.
어차피 찾아봤자, 회귀라도 한다면 다 없었던 일이 되잖아. 오히려 적에게 정보만 넘기는 꼴이 되는 게 아닌지 몰라.
어쩌면 회귀자도 성녀일지 모르니까 말이야.
“흐흠. 다 온 것 같네요~.”
힐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캐터프랙트가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순전히 사람이 많이 오가서 생긴 길 끝에는 인상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도착했네요.”
넓게 펼쳐진 목초지가 보인다. 자연이 얼기설기 직조한 융단 위에 말과 양이 보풀을 입으로 잡아 뜯고 있다. 탈것에 탄 인간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말과 양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중이다. 시선이 주로 밖을 향하는 게, 짐승의 실종에는 자의적인 이유보다는 타의적인 이유가 더 크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너머.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수백 개의 천막이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천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요란하다. 인파가 만들어내는 열띤 활기가 여기서도 느껴진다.
회귀자가 중얼거렸다.
“캠프네.”
전에 보았던 유령도시와는 명백히 다르다. 그보다 훨씬 지저분하고 더러웠지만, 원래 더러움이란 살고 나서 남긴 찌꺼기인 법. 천막으로 이루어진 도시는 생각 이상으로 생기가 넘쳤다.
“진입할게요!”
힐데는 철조망 사이에 난 출입구로 향했다.
캠프에는 문지기도 있었다. 그다지 성실해 보이지 않는 문지기가 우리를 멈춰 세우고는 의중을 물었다.
“거기, 정지. 무슨 의도로 왔수? 오래 머물 건가, 금방 떠날 건가?”
“하루만 있다가 갈 거예요!”
“떠날 거로군? 그렇다면 요금은 없수. 대신 탈것을 울타리에 세우고,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쇼.”
문지기는 거기까지만 이야기하고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랜 근무에 지쳤는지 약간 시비조가 섞였다. 하지만 그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었던 힐데는 눈짓으로 의견을 구했다.
‘일개 캠프의 문지기 주제에 외교사절에게 건방진데요~. 아버님. 어찌할까요? 목 따고 강행돌파?’
뭔 강행돌파야. 이 사람, 사절 맞아? 휴전과 확전의 차이를 모르는 거 아니야? 괴롭힐 거면 아무도 안 볼 때 하자고.
“일단 말을 따르죠.”
“아쉽네요~. 네에~.”
힐데는 캐터프랙트를 몰고 울타리 외곽으로 향했다.
울타리 외곽에는 방랑자들의 탈것이 줄지어 서 있었다. 혹여나 탈것이 도둑맞을까 봐, 탈것의 주인들은 무기 하나씩 품에 안은 채로 울타리에 기대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철조망 하나만 넘어가면 캠프인데도.
“다들 도둑맞을까 봐 자기 탈것을 떠나지 못하고 있네요. 캠프에서도 제법 머리를 굴렸군요. 곧 떠날 사람은 전력을 나누라는 거겠죠.”
“그러게. 우리도 한 명을 여기 남겨두지 않으면 도둑맞겠네.”
말마따나, 열국에서 주인 없는 물건은 먼저 주운 사람의 것이니까. 길 가는 사람 모두가 잠재적 도둑인 셈이다. 주인 없이 두는 건 위험하겠지.
티르가 나섰다.
“문제없다. 내 흑기사를 남겨두마.”
“아니, 흑기사는 좀 믿음이 안 가서. 심지어 지금은 아직 해도 안 졌잖아요?”
“…그 정도로 못미더운 것이냐?”
‘심장을 되찾은 이후, 나의 권속을 제대로 부리지 못하니 온갖 구박을 다 당하는구나. 빨리 방도를 찾아야겠다. 아니면 구박이 끊이지 않을 터이니….’
아니, 이건 구박이 아니잖아. 진지한 상황판단이라고.
경비원의 역할은 도둑질을 막는 게 아니라 도둑질하려는 의도를 단념시키는 거다. 그런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흑기사는 자칫하면 흑요석 동상 비슷하게 여겨질 위험이 있다. 도둑질을 부추긴다고.
거기다 흑기사 말고 더 적합한 게 있잖아. 인간의 좋은 호구… 아니, 친구.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이럴 때 쓰려고 아지가 있는 거지.
“아지야.”
“멍? 왜?”
“너 우리가 갔다 올 동안 이 차를 지켜주겠니?”
“멍멍? 지켜?”
그래. 아지에게는 자기 영역을 지킨다는 본능이 있다. 괜히 인간들이 개를 경비견으로 키운 게 아니다.
아지가 과연 낯선 인간을 경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지가 있는 것만으로도 도둑질을 단념하진 않을까. 아지가 개의 왕이라도 겉모습만은 동물 귀 달린 인간이니까.
“공격할 필요는 없어. 누군가 이 캐터프랙트를 기웃거리거나 함부로 만지면 크게 짖는 거야. 다 들리도록. 그러면 충분해.”
“멍! 맡겨!”
“착하네! 그러면 부탁할게. 누가 먹을 거를 줘도 따라가지 말고. 옆에서 뭔가 지나가도 한눈팔지 말고.”
“먹을 거? 지나가? 어디? 어디?”
“아니, 먹을 거가 지나간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저기 말처럼….”
때마침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울타리를 따라 달리던 말 한 마리가 냅다 우리 옆을 지나쳤다. 바닥에 닿을 듯한 금빛 말총이 자기가 만든 바람에 흩날린다.
좋은 예시가 마침 지나가는군. 아지에게도 사냥본능은 있으니까. 혹시나 저런 거에 혹해서 뛰쳐나가면 안 되거든.
“저 말처럼, 무언가가 달려가도 기분 좋다고 냅다 뛰지 말….”
“멍.”
아차. 아지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다.
하필 좌우로 흔들리는 말 꼬리가 아지의 사냥본능을 자극했다. 아지의 고개가 말꼬리를 따라 시계추처럼 움직인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지는 땅에 뛰어내리며 크게 외쳤다.
“멍멍! 거기 서라!”
“야아아아아아! 그러지 말라고!”
그러나 아지는 개의 왕. 눈 깜짝할 사이 말의 뒤로 따라붙었다. 공격할 생각까진 없어서 멍멍 짖으면서 말꼬리만 톡톡 건들고 있지만, 겁을 잔뜩 먹은 말은 미친 듯이 고개를 휘저으며 질주했다.
쳇. 이러다 말 하나 잡겠다. 저게 얼마나 비싼 건데.
“안 되겠네요! 저는 아지를 잡아 올 테니까, 알아서 안에 들어갈 사람을 정해요!”
“따라잡을 수 있겠어?”
“따라잡을 수 있어서 따라갑니까? 따라가야 하니까 따라가는 거죠!”
“뭐, 알았어. 나는 캠프장을 만나고 있을 테니까 아지를 데리고 와.”
주섬주섬 필요한 물건을 챙긴 나는 냉큼 아지의 그림자를 뒤쫓아갔다. 회귀자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지를 데리러 가는데 왜 밧줄을 챙겨가는 거야?’
그야, 열국에서는 주운 사람이 임자이기 때문이지. 상당히 명마처럼 보이지만 아지가 있다면 몰아넣을 수 있다.
캐터프랙트를 탄 나에게 말이 필요할 일은 없겠지만, 인간에게는 물물교환이라는 개념이 있다. 필요 없다면 전당포에 바꿔 먹으면 그만. 상당히 짭짤하게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 건지는 몰라도 잘 먹겠습니다.
“멍멍! 멍멍! 꼼짝 마, 멍!”
-푸히히히힝.
그리 오래 찾을 필요는 없었다. 아지는 낮은 울타리 안에서 말을 노려보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으니까. 불운하게도 짐승의 왕에게 표적이 된 말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구슬프게 울었다.
나는 서둘러 현장으로 다가갔다.
“아지, 이 착한 강아지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