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4)
EP.34 레지스탕스 – 마무리
“후우.”
몸에서 힘을 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독심술은 참 유용하면서도 불편하다. 한 명 죽일 때마다 죽는 사람 입장에 과몰입하게 된다니까. 생명은 죽을 때 격렬한 감정을 토해내기 때문에 최후의 일격을 날릴 때마다 파도에 휩쓸리는 기분이다.
이러니까 내가 꼭 뭐라도 된 것 같잖아. 나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아득바득 뻘짓거리 해가면서 간신히 한 명씩 죽였을 뿐인데.
그래도 독심술 덕분에 목숨을 구한 거니 불평할 수는 없겠지.
후우. 온몸이 아프다. 아까 마구잡이로 뛰어다닌 것하며, 멱살 잡혀서 벽에 처박힌 것 때문에 온몸이 안 쑤시는 곳이 없다. 잠깐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뒤쪽에서 웬 목소리가 들렸다.
“손에 피를 묻혔구나.”
흡혈귀? 피 냄새를 맡고 왔나? 나 참, 귀신 같네.
아니, 귀신 맞구나. 흡혈귀, 피 마시는 귀신.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빨리 피 가져가세요. 갓 죽여서 따끈따끈합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취하고 있다.”
하긴 아까부터 피가 내 몸에 묻지도 않고 뒤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괜한 말을 했네. 이 탄탈로스에서 피를 흘리는 게 바로 흡혈귀의 식사인데.
아, 맞다. 흡혈귀가 온 김에 다른 것도 부탁해볼까.
“거, 드시는 김에 시체 좀 치워주실 수 있나요?”
“시체를? 내 일부가 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만. 차라리 묻는 게 어떠냐?”
“아니요. 이곳이 무저갱이다 보니 묻을 곳이 마땅치 않네요. 땅이 콘크리트다 보니 아무리 잘 매장해봤자 공구리밖에 안 되어요. 썩지도 않을 거고, 지모신의 품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겠죠. 저 모습 그대로 영원히 박제될 거예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흡혈귀의 관 속이라도 잠드는 게 낫죠.”
“장례도 안 치르고?”
“괜찮아요. 제가 손수 눈을 감겨 주었으니.”
“네가 장의사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만.”
“장례란 지나간 삶의 흔적을 기억하는 행위 아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충분히 훌륭한 장례식을 치렀어요.”
흡혈귀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손을 휘젓자, 핏물이 모여들어 시체를 삼켰다. 녹이는 건지 으깨는 건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수천수만 번 몰아치며 바위를 깎아내는 소리를 몇 초로 압축한 것 같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피의 파도와 함께 시체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벗겨진 구속복만 남았을 뿐.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가만히 서 있던 흡혈귀는 이내 지루해져서는 사뿐사뿐 암흑 속을 걸어왔다.
‘보지도 않고 나인 것을 알아차렸구나. 내가 예상한 상황은 아니긴 하다만… 하긴, 기감이 뛰어난 자라면 기척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야지.’
기척? 뭐, 독심술도 기감이라 치면 기척 구분도 맞지.
‘그나저나, 통 움직이지를 않는구나. 사람을 죽인 일에 감상이라도 젖은 것이냐? 어린 것은 어쩔 수 없구나. 어디, 조금 다독여줄까.’
다독여? 뭘?
내가 생각을 읽고는 멍하니 있는데, 흡혈귀가 내 눈앞까지 다가와서는 말했다.
“피 역시 흘러가, 언젠가는 바다에 닿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이들은 너의 적이 아니었더냐. 비록 그 강함이 너에게 닿지는 못했겠으나, 그들도 너와 마찬가지의 전사. 공평하게 목숨을 걸었으니 네가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별로 우울하지는 않은데요.”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으냐.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라. 그게 네가 얻은 힘에 대한 자긍심이며, 너에게 패배한 전사에 대한 예의다.”
“아니. 괜찮다니까 그러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건 아까 붙잡힌 목이 아파서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건물을 다 뒤엎고 뛰어다니느라 지친 것도 있고. 나는 평범한 피지컬을 지니고 있으니 격렬하게 날뛰고 난 다음에는 좀 쉬어야 한다고.
그동안 흡혈귀는 손목을 감싸고 한바퀴 맴돈 피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피에 따르면, 내가 취한 그 시체의 주인은 분명 생전 고명한 기사였을 터. 그런 이를 상처조차 없이 제압해서 묶어두다니. 확실히, 무저갱의 관리자를 자처할 정도는 되는구나.”
상처조차 없다고? 지금 피가 안 났다고 모르는 모양인데, 방금 한 손에 제압당해서 벽에 꽂힌 참이다. 셔츠 안쪽에는 잔뜩 멍이 들었을 거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어? 굳이 풀어야 하나?
나는 헛기침하며 말했다.
“딱히, 감상에 젖은 건 아니에요. 잠시 눈을 감고 그의 무훈을 기렸을 뿐이죠.”
“그게 바로 감상에 젖었다고 부르는 것이다.”
“별걸 다.”
“그나저나 이 나를 맞이하면서도 얼굴 마주칠 생각조차 않는구나. 언제까지 앉아만 있을 셈이냐?”
“막 일어나려고 했어요.”
말을 하다 보니 이제 좀 살 것 같네. 나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마침 눈앞에는 흡혈귀가 붉은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뭐야, 부담스럽게.
나와 눈이 마주친 흡혈귀는 고개를 까닥이며 우월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어때. 나를 알아보겠느냐?”
응?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알아보지….
‘나의 본신을 마주하는 건 이게 처음일 터.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은 아니나, 외유를 나온 김에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건 또 무슨 생각이야? 휠체어에서 내려왔다고 웬 유세를 떨고 있어? 자기가 뭐 재활치료라도 성공했대?
‘어디, 본모습을 보고도 노친네 취급을 할 수 있을까 보자꾸나.’
에엥?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흡혈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작은 얼굴, 새하얀 외모, 그리고 붉은 눈. 몸에 걸친 검은 드레스는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옛날 의복이었고, 그녀의 등 뒤에는 커다란 관이 시종이라도 된 것처럼 반 발짝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어깨에는 어둠을 그러모은 듯한 검은 양산을 걸치고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아래 있으니 이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흡혈귀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꼭 검은 양산이 근처 어둠을 빨아들인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인상적인 외모이긴 한데. 본모습은 또 왜? 설마 내가 자기 얼굴을 보면 뭐 놀라서 자빠질 줄 알았어?
아, 잠깐. 설마.
어이가 없네. 어디 장단이나 맞춰줄까.
나는 흡혈귀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 놀란 시늉했다.
“엇? 여자? 누, 누구? 설마… 티르칸쟈카 교육생입니까?”
“그래. 나 말고 또 있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흡혈귀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흡혈귀는 걸친 양산을 반 바퀴 돌리며 말했다.
“이상한 녀석이로구나. 조금 전까지 나의 이름을 불러놓고는. 지금 보니 또 모른 체더냐.”
“아니, 갑자기 모습이 바뀌어서 잠깐…. 당황했달까…. 휠체어, 아니, 관에서는 언제 내려오신 겁니까?”
“방금 전이다. 못마땅한 불청객을 맞이하느라 오랜만에 본신을 드러냈지. 본디 일을 끝마치고는 바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밖에서 짙은 혈향이 나기에 한 번 나와보았다.”
몇 마디 나눌 동안, 나는 일부러 흡혈귀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슬쩍 올려보다 눈이 맞으면 고개를 푹 숙이길 잠시.
긴장한 티가 역력한 나를 보던 흡혈귀는 눈가를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보이는 태도는 꼭 여자 손 붙잡아본 적도 없는 숫총각 같구나. 쯧. 수련했다고 하는 사내놈의 태도가, 얼굴 좀 보여주었다고 어찌 저리 가볍게 바뀐다는 말이냐.’
생각으로는 나를 탓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내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흡혈귀는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내며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헌데, 너는 일어났으면서도 어찌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느냐?”
“그, 그게.”
“왜 그러느냐? 평소에는 입만 살아서 잘도 떠벌리던 녀석이. 답지 않구나.”
‘아무래도 어린 나이부터 수련을 하느라 여자 경험이 없는 모양이구나. 내 장난이 순진한 아이를 너무 괴롭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잔뜩 신이 난 흡혈귀는 나의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상체를 숙이고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반짝이며 흘러내리는 은발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내 시야에 들어온다.
“그래도 이리 얼굴을 마주하게 된 건 처음인데, 계속 시선을 피하는 건 서운하구나. 어디, 한마디라도 해 보거라.”
‘이건 온전히 네 탓이다. 네가 나를 놀려대지만 않았어도 이리 유치한 방식으로 복수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마음속으로 한참 우월감에 젖은 흡혈귀를 향해,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죄송… 합니다.”
“죄송? 무엇이?”
‘죄송하다는 말로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받을 성싶으냐? 어딜. 지금껏 나를 놀린 만큼 애태워주마.’
어쭈.
입에 발린 말은 여기까지다, 노친네. 나는 표정을 싹 바꾸면서 차갑게 대꾸했다.
“뭐긴요. 아부를 더 못해드리는 거요.”
“음?”
“관짝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생각하는 게 그렇고 말하는 게 그런데 뭔 차이가 있어요? 언제나랑 똑같지.”
그나저나 왜 아직도 그런 자세로 얼굴을 내밀고 있담. 나도 얼굴을 찌푸리며 얼굴을 마주 내밀었다.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워지자 흡혈귀가 기함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조금 전에 전투가 일어났는데 도대체 무슨 짓거리예요? 자기 얼굴 처음 보인다는 자각이 있으면 신원 확인할 생각부터 해야지. 뒤에서 다가오면서 나를 알아보겠냐 이러면 어떻게 해요?”
“으, 응? 그게.”
“어떻게 해드려요? 제가 와, 하고 감탄한 다음 뭐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라도 읊을까요? 아니면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외모를 다시 보고 지금까지 편하게 대한 걸 사과하기라도 할까요? 그런 걸 기대했어요?”
‘따, 딱히 그럴 생각은…. 그냥, 나는 장난기가 동해서….’
그럴 생각 만만이었잖아.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이야기가 내려오지만, 흡혈귀가 아름답다는 말은 몇 번이고 회자된 전설이기도 하다. 괜히 흡혈귀에게 매료의 권능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다니는 게 아니다. 교회에서는 이 악물고 추악한 모습만 부각하지만 말이다.
다만 그러는 바람에 자기 평가가 너무 올라간 거 아닌가. 좀 나이에 맞는 처신을 요구하는 바다.
에휴. 참.
“주책 좀 그만 부리세요.”
“주, 주책?!”
“그야 젊어 보인다는 말 듣고 싶어 하는 거야 나이 드신 분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니 이해하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는 가리셔야죠. 불과 10분 전까지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었다고요. 처신 좀 똑바로 해주세요.”
그나마 나이가 부끄러움마저 집어삼키지 않은 모양이다. 흡혈귀는 극도의 수치심 속에서 양산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손잡이를 잡은 손에 얼마 없는 핏기마저 다 가셨다.
조금 더 놀려줄까 했지만, 흡혈귀에게서 느껴지는 부끄러움이 상상 이상이다. 이 이상 찔렀다간 폭발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만두었다.
철없는 어른을 타이를 때 가장 필요한 건 결국 수용한다는 태도다. 아이들과는 달리 상대는 나보다 어른. 처음부터 자기가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라 부끄러우면 도망치는 대신 곧장 화를 내는 곤란한 이들이다.
어쩌겠어. 어리고 약한 내가 참아야지.
“에효. 뭐. 그래도 교육생은 좀 낫죠. 아무것도 모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예쁘기는 하니까. 그래도 주책은 자제해주세요. 때와 장소를 가리셔야죠.”
‘뭐, 뭐지? 분명 불쾌하거늘…. 틀린 말은 없어, 화를 내고자 하니 옹졸한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무시당하는 것 같으니….’
“이제 여기는 볼일 없으니 보급 상자나 확인하러 갈게요. 마침 그쪽에도 피 보급 나왔으니 가시죠?”
“아, 아. 그래. 그러자꾸나.”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갔다. 흡혈귀는 부끄럽고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양손으로 양산을 꼭 쥐고는 내 뒤를 따랐다.
보급상자가 떨어진 곳에는 여전히 시체가 방치되어 있었다. 흡혈귀는 그 시체 역시도 집어삼켰다. 역시 인간 하수구… 앗, 이건 말하지 않도록 하자. 진짜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
휴,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는 이 사소한 배려. 나 좀 스윗하네.
자, 보급이나 살펴볼까. 나는 휘파람을 불며 보급상자를 열었다.
보급 상자 안에 있던 건, 수많은 압축 콩 통조림이었다.
“어라.”
이상하다. 아무리 군국이 통조림 성애자라고 한들 영양분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들이 아닌데. 빵이나 쌀이 아예 없다고?
의아해하던 나는, 이윽고 보급창고 안쪽에 남은 처참한 잔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쥐가 다 갉아먹고 도망간 듯한, 빵이었던 것의 흔적들을.
심지어 치즈 봉투는 찢어졌고 우유통도 텅텅 비어있었다.
아. 맞다.
레지스탕스 다섯 명이 보급 상자 속에 숨어들어왔었지.
그들이 뭘 먹고 지냈을까, 뻔한 일이다. 대량의 수분과 조리과정이 필요한 압축 통조림을 안에서 까먹을 수는 없었을 테니, 간편하게 빵과 우유만 먹었겠지.
하하. 그러니까. 보급품은 결국 통조림이라는 거지?
“끄아아아아! 이 개새끼들!”
분노한 나는 냅다 보급 상자를 걷어찼다. 새삼스레 군국 보급상자의 튼튼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젠장, 내 발이 다 아프네.
나는 괴성을 지르며 흡혈귀를 돌아보았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당장 시체 꺼내요! 오늘 부관참시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겠어!”
“또, 왜 그러느냐?”
흡혈귀는 여전히 뚱한 태도로 물었다. 분명 빵 조각들을 빤히 봤을 텐데 자기 음식 아니라고 별다른 반응이 없다. 나는 보급 상자 안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빵이! 없잖아요! 이 침입자들이 다 처먹어서! 우리는 뭐 먹고 살라고!”
“저 동그란 통 안에 든 것도 음식이 아니더냐? 꽤 많은 양 같은데, 빵이 없다면.”
“통조림 먹으라는 소리는 혁명 트리거입니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마세요! 댁처럼 나이랑 사람의 피만 먹는 흡혈귀와는 달리 사람들에게는 미식이 필요하다고요!”
“뭐, 뭐?! 나이만 먹어?!”
아차. 급한 마음에 그만 본심이. 흡혈귀 쪽에서 세월로 다져진 히스테리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감옥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회귀자였다. 그녀는 부상을 입었는지 입가에서 한 줄기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다친 것치고는 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하긴 회귀자의 상대에 비하면야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녀의 다른 쪽 손에는 목을 잃은 시체가 질질 끌려 나오고 있었으니까. 군장을 입고 있는 거구의 시체는 단면에서 피를 뿜어내며 힘없이 딸려오고 있었다.
‘기공을 봉인하고도 군장 정도는 베어낼 수 있다…. 조금이나마 성장했다는 뜻이겠지.’
왜 기공도 없이 강철을 벨 수 있는 건데.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회귀자를 본 흡혈귀는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셰이, 혹시 내가 누군지.”
“티르칸쟈카잖아? 관에서 나왔네. 여기, 피 있으니까 마셔.”
회귀자는 시체를 곧장 흡혈귀에게 건넸다. 단숨에 지목당한 흡혈귀는 살짝 서운해하며 피로 시체를 집어삼켰다.
‘요즘 아이들은 나의 초상화라도 갖고 있는 것이냐? 통 놀라지를 않는구나. 예전에 저택에 찾아온 이들을 희롱할 때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습만 드러내도 차마 얼굴을 마주치지 못했거늘…. 요새 사내놈들은 무슨 이리 돌부처 같은지.’
주름이라도 생겼나 자기 얼굴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거 봐. 꼴불견이다. 그때 죽어서 박제된 시체가 주름 같은 게 생길 리 없잖아.
그것보다, 피를 마시면서 아직도 남장인걸 눈치채지 못했어? 정말, 제대로 된 게 없는 흡혈귀네.
핏물의 파도로 시체를 삼키던 흡혈귀는 회귀자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진전이 있었나보구나. 네 몸 안에 있는 피가 온전히 너의 지배 아래라는 게 느껴진다.”
“기량을 늘리는 데에는 역시 실전이더라구.”
회귀자가 씩 웃으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흡혈귀가 코앞에 있음에도, 그녀의 피는 흡혈귀를 향해 날아가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의 피부를 적시며 아롱아롱 매달려있을 뿐.
몸 밖으로 나온 피를 빼앗기지 않다니. 회귀자에겐 최소한 자기 피 정도는 제어할 능력이 있다는 반증이었다.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은 회귀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놈들은?”
“이 아이가 다 처리한 모양이다. 내가 갔을 때는 시체만이 남았더구나.”
“흥.”
‘쳇. 콱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했는데, 역시 기량은 있는 모양이야. 저 남자의 인성은 못미덥지만, 실력은 믿을 수 있겠어.’
뭘 믿어, 이게. 제발 믿지 말고 네 힘으로 처리하라고.
이제는 말할 기운도 없다. 나는 멍하니 서서 산더미 같은 통조림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다.
아지야. 저거 다 네가 먹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