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44)
“…다녀올게.”
힐데로부터 제보를 받은 페루는 냉큼 문을 열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힐데는 그녀를 향해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발소리를 죽이고 은밀히 뒤를 따랐다.
잠시 뒤.
‘페루’가 터덜터덜 돌아왔다. 곤혹스러운 얼굴을 한 ‘페루’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거짓말쟁이. 어디 있어?”
난데없는 말에 티르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거짓말쟁이라니,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아우레아. 풀 뜯고 있어.”
“힐데라면, 조금 전 네 뒤를 따라 올라갔지 않느냐. 보지 못하였느냐?”
“…응.”
“무언가 장난을 꾸미고 있나보구나. 짓궂기로는 휴즈 저리가라니 말이다.”
“왜 여기서 저를 보시는 건가요? 저는 힐데의 자아형성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어요. 쾌락 없는 책임에도 정도가 있지.”
진짜 딸이 아니라고. 내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을 때, 갑판으로 이어지는 문이 다시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그곳에서는 페루가 뚱한 얼굴로 걸어들어왔다.
“…거짓말쟁이. 어디 있.”
페루와 ‘페루’가 마주쳤다.
페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비슷하게 ‘페루’도 당황하다가 겁을 먹은 듯이 몸을 떨었다. 둘은 날을 세운 고양이처럼 서로를 노려보며 경계했다.
“…이게, 무슨.”
“…누구?”
같은 인물이 두 명이 된 초유의 사태. 그러나 이미 힐데의 변신술을 겪어보았던 티르는 금방 어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역시 장난질이로구나. 또 그것이냐? 변신술?”
“…변신, 술?”
“…나로 변신했어?”
그제야 이해가 갔는지 페루는 조금 긴장을 풀고 상대방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얼굴, 옷차림, 심지어 신장과 체형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겉으로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그대로 복사한 듯이.
이치에 닿진 않았지만, 그와 거의 근접한 경지에 이른 기술. 감탄이 나와도 이상하진 않으나… 페루는 그보다 큰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럴 리 없지. 회주의 호문쿨루스는 만들 수 없어. 알아. 아는데….’
호문쿨루스?
하하. 무슨 소리를. 호문쿨루스는 치환 이동 이상으로 불가능한 개념이잖아. 경지에 이른 힐데가 결코 리(離)를 구현할 수 없는 것도, 변신이 그 인간의 마음까지 읽어낼 수 없으니까다.
그런데 인간을 그대로 복제해낸다니, 가능할 리 없잖아. 옛이야기 속에서나 나타나는 걸 왜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는….
어라, 설마? 그 또한 황금경의 위엄?
흠흠. 이럴 때가 아니다. 힐데의 장난이 페루의 기분을 너무 크게 해치고 있다. 나였다면 독심술로 마음을 읽고 아슬아슬 줄타기했겠지만, 힐데에게는 불가능하지.
“에휴, 힐데. 그만하고 정체 밝혀요. 아직 안 친한 사람에게 그런 장난 치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페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누군지 알아?”
“아닌 척하지 말고요. 방금 말한 쪽이 힐데잖아요.”
“…어떻게?”
납득하기 전까지는 시치미를 뗄 작정인가. 독심술로 알아차렸지만, 원한다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더 해주지.
“이유를 말해주죠. 첫 번째. 힐데는 페루보다 나중에 나갔어요. 그리고 변장한 뒤 둘은 서로 마주치지 않았죠. 아주 간단한 논리에 의해, 힐데는 진짜 페루와 이 방의 사이에 있다는 뜻이 되죠.”
“…하지만, 중간에 숨었을 수도.”
“두 번째. 힐데의 의도는 페루를 놀라게 하는 거였죠? 평범하게 생각하면 문밖에서 또 다른 내가 ‘들어오는’ 경우보다, 들어왔는데 이미 또 다른 내가 ‘있는’ 경우가 더 충격적이겠죠.”
“심증에 불과하잖아.”
“증명 못해도 상관없어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설명만 있으면 충분해요. 애초에, 이제 말도 안 늘어뜨리네요.”
‘페루’의 얼굴이 점차 다양해졌다. 원래의 무표정에서 불만스레 볼을 부풀리더니, 이윽고 퉁명스럽게 발을 툭툭 차며 투덜거렸다. 어느새 외모는 힐데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말! 이래서 아버님은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던 건데!”
“들었어요. 들어주지는 않았을 뿐.”
“진짜 나빠! ‘제’ 몇 안 되는 즐거움을 빼앗다니!”
거짓말이네. 변신이 힐데의 몇 안 되는 즐거움은 맞지만, 그 목적이 반대잖아.
힐데는 들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어서 변신하는 거다. 변신하더라도 누군가 자신을 곧바로 깨달아주기를 바라며.
바라는 대로 해주는데 왜 툴툴거리는 건지. 솔직하게 좋아하라고…. 아니, 지금도 좋아하고 있는 건가.
“이제 슬슬 인정하시죠? 저는 힐데의 변장 정도는 쉽게 간파할 수 있다고요. 심리를 다루는 마술사에게 겉모습만 흉내 내는 변신 따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죠.”
내가 한껏 으스대자 티르가 작게 박수치며 호응해주었다.
“역시 휴. 나는 페루와 알고 지낸 시간이 짧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는데, 너는 단번에 간파해내는구나.”
“어라라? 티르칸쟈카? 마치 알고 지낸 시간이 길면 맞출 수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이건 그냥 못 넘어가겠는지 힐데가 따지고 들었다. 티르는 여유롭게 그 미소를 받아넘기며 대꾸했다.
“물론이다. 얼마나 보았는데 그걸 모를까.”
“저번에 ‘제’가 아버님으로 변했을 때는 몰랐으면서, 지금은 자신 있어 하시네요?”
“그때도 미심쩍었다. 다만, 네 능력을 몰랐기에 섣불리 넘겨짚지 않았을 뿐. 네 힘을 아는 지금이야 명약관화하지.”
“헤에. 그러시구나. 그런데 어쩌죠? 상대방을 더 잘 알게 된 건 ‘저’도 마찬가지인데?”
찌릿. 두 여자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힐데는 턱을 꼿꼿이 들며 외쳤다.
“대결하죠! 어디, ‘제’ 변신을 맞춰보세요!”
“재롱이라면 얼마든지 부려보아라. 여행길에 적적하지 않겠구나.”
둘이 서로 노려보는 와중, 페루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둘의 다툼을 지켜보았다.
‘…남의 집에서 무슨 짓이야.’
회귀자의 천앵은 놀랍게도 충전식이다. 한 번 전투를 벌이면 소모한 바람과 공간을 다시 모아야 한다. 그게 어떤 원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회귀자는 전투를 벌인 이후에는 약간의 휴식기를 가지곤 했다.
충전도 할 겸, 황금함 꼭대기에서 정찰하고 있던 회귀자가 선실 안으로 돌아왔다. 회귀자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페루에게 말했다.
“이거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누가 조종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작정 직진하는 것도 아니야. 가다가 미묘하게 방향이 틀어지던데?”
“…황금함은 나침반, 언제나 황금궁으로 향해.”
“그게 어떻게 가능해?”
“…어떻게?”
회귀자의 호기심에 페루는 당혹스러워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황금함의 무한궤도는 치환 이동 방식. 황금경께서 최근에 머물렀던 땅일수록 치환 속도가 느려져서, 그쪽 무한궤도가 더 느리게 움직이게 돼. 따라서 황금함의 선미는 나아갈 때마다 미세하게 황금경을 향해 기울어. 열국의 좌표에 황금경의 시계열을 옮겼을 때 황금경의 현재 위치가 극점이 되는데, 그 기울기 방향으로 보정이 이루어져서 최종적으로는 황금경께 도달하게 돼….’
머릿속으로는 내용을 다 떠올렸다. 어디까지나 머릿속으로는.
‘…하지만, 내 말재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어. 설명한다고 한들 이해할지도 모르고. 포기.’
너희가 모를 것 같으니까 설명하지 않겠다고? 이걸 겸손하다고 해야 할지 오만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건 생각을 정리한 페루는 설명을 짧게 줄였다.
“…그 또한, 황금경의 위엄.”
“아, 모든 저거너트는 황금경이 만든 것이라고 했지? 그러면 가능은 하겠네.”
‘…이게 설명이 되다니.’
겸손도 오만도 아니었다니. 그냥 정확한 판단이었다. 하긴 회귀자는 세상 모든 신비를 이해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쪽이니까.
금방 납득한 회귀자는 외투를 벗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머물게 해주는 건 고마운데, 그럴 공간이나 시설은 괜찮겠어?”
“…문제없어. 조금 전 만들었으니.”
“아, 맞다. 여긴 열국이었지. 알겠어. 당분간 신세를 좀 질….”
소파에 몸을 기댄 회귀자는 자기 앞쪽에 있는 테이블에 시선을 주었다. 사이에 거울을 놓은 듯, 똑 닮은 소녀가 마주 앉아있는 티테이블. 거기에는 은발을 등까지 늘어뜨린 티르와 ‘티르’가 빤히 회귀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티르칸쟈카가 둘. 회귀자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꺄아아! 까, 까, 까, 깜짝이야!! 뭐, 뭐야?! 티르칸쟈카가 둘?!’
회귀자는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그걸 눈치챈 건 오직 나뿐이었다. 회귀자의 기공인 천반경은 갑작스러운 감정의 동요를 강제적으로 억누르고 평온함을 가장했다.
아무리 당황했다고 하더라도 누가 옆에서 찬물을 뿌리며 제대로 생각하라고 윽박지른다면 충분히 침착해질 수 있다. 우리가 당황하는 건 그걸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단, 천반경을 가진 회귀자는 냉정해진 머리로 이 상황을 설명할 가설을 떠올렸다.
‘맞아! 영궤는 변신술을 썼지? 둘 중 하나는 영궤겠지. 쳇, 놀랄 뻔했잖아!’
회귀자가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영궤의 변신술이야?”
겉으로 보기에 회귀자는 전혀 놀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티르’가 붉은 입술 사이로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이제야 눈치챘느냐? 둔하기 그지없구나.”
“늦게 알아차린 주제에 반응도 심심하니. 보람이 없어 서운할 정도다.”
둘은 의 좋은 자매라도 된 듯이 똑같은 목소리로 나란히 회귀자를 나무랐다. 분명 한 명은 힐데일 텐데, 손발이 척척 맞는 모습에 회귀자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내가 할 말이야! 갑자기 왜 장난질이야? 영궤는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데?”
“힐데의 변신술이 얼마나 뛰어난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같이 다니게 되었으니 능력을 시험해보는 편도 좋겠지.”
“겸사겸사 여행길에 적적함도 풀고. 괜찮은 유희거리 아니더냐.”
“당하는 쪽에서는 질 나쁜 장난으로밖에 안 보이거든?”
어쨌건 상황을 이해한 회귀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티르와 ‘티르’를 비교했다.
흐릿하게 빛나는 백은발. 전신에서 색이라는 것을 앗아간 듯한 투명한 얼굴. 그러나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요사스럽게 빛났다. 이목구비에 가느다란 목선까지, 겉으로 보기에 둘은 완전히 똑같았다.
회귀자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기공의 달인은 자기 육신의 전부를 기공으로 다룰 수 있다지만, 저건 너무한 거 아니야? 뼈를 줄이고 몸을 압축한다고 해도 되는 게 있고 아닌 게 있지! 피부색에 머리카락에, 목소리까지 바꾼다고? 기공을 왜 저리 쓸데없는 방식으로 낭비하는 거야?! 제대로 썼다면 몇 배는 강해졌을 거야!’
뭐 어쩌겠냐. 저게 힐데가 기공을 갖게 된 원동력인데. 저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감기공까지 잡지도 못했을 거다.
티르가 회귀자의 반응을 즐기며 말했다.
“어찌, 맞출 수 있겠느냐?”
“더 고민해도 좋다. 넘치는 게 시간이니 말이다.”
티르와 ‘티르’는 끙끙거리는 회귀자를 보고 키득거렸다. 회귀자는 약이 바짝 올랐지만 겉모습만으로는 구분하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누가 진짜인지 알아차리는 건 쉽잖아. 티르칸쟈카는 혈조술을 쓰고 어둠을 다루니까.”
“당연히 그러한 권능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문제가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지.”
“거기다 힐데는 혈조술도 수준급으로 다루더구나. 이 피부를 보아라. 혈조술을 다루지 못한다면, 이 핏기 없는 피부를 어떻게 흉내를 내었겠느냐.”
‘티르’가 티르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티르는 당돌한 행동에 웃음을 터뜨렸고, ‘티르’는 느긋하게 턱을 괴고 미소 지었다. 둘은 도플갱어라고 치기에도 사이가 상당히 좋아 보였다.
‘모르겠어…! 겉모습은 그렇다고 쳐도, 하는 말이나 행동도 서로 닮았잖아! 순수하게 연기라고?’
와중에 회귀자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난제는 천반경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혼란은 더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