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51)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회귀자는 헥토의 제안을 받아들여 하루 유예를 주기로 했다. 탈탈 털린 호구라도 된 것처럼 떨떠름하게 앉아있던 헥토는 강철 덮개를 거두지 않고 따로 페루를 불렀다. 우리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나마 캐볼 생각이다.
선량한 주제에 성실하기까지 하다니, 열국답진 않지만 반대로 저런 사람도 있어야 열국도 나라꼴 하지.
강철 덮개를 가르고 나온 회귀자는 태연자약하게 걸어가다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살아있는 사람을 석상으로 쓴 게 아니었단 말이지? 그게 더 의외인데.”
“뭐야. 셰이 씨도 알고 있었네요.”
“뻔하지. 과하게 사실적인 조각상을 보면 사람인가 아닌가 먼저 의심하고 봐야 하니까.”
와, 잘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닌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신 겁니까.
“그나저나 너도 용케 알아챘네?”
“억압회주가 흘린 말을 주워담았을 뿐이에요. 사람이 공명이라니, 뭔가 꺼림칙하잖아요. 셰이 씨 말대로 열국 음식 안 먹길 잘했어요.”
“외지인은 크게 상관없다곤 하지만, 그렇지.”
‘만일 내가 열국에서 그냥 죽지 않고 황금경에게 공명당한다면 회귀할 수 있을까…. 끙. 딱히 확인해보고 싶진 않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회귀자는 채비를 갖추고는 말했다.
“나는 황금경이 어딨는지 한 번 찾아볼게. 억압회주의 말대로라면 머지 않은 장소에 있을 거야. 미리 장소를 알아두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겠지. 정 안 되면 억압회주를 따돌리고 만나러 갈 수도 있고.”
약속 따위 지킬 생각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역시 회귀자라고나 할까.
힐데 역시 감탄을 담아 칭찬 아닌 칭찬을 건넸다.
“와아~. 조금 전에 했던 약속조차 지킬 생각이 아예 없나 보네요! 대단해요! 감동적이야!”
“시끄러워. 그러면 너는 하루동안 뭐할건데?”
“‘저’요? ‘저’는 변장해서 정보 수집!”
“마찬가지잖아!”
“제안을 수락한 건 셰이지 ‘제’가 아니니까요! 거기다, ‘저’는 변신하면 다른 사람이 된다고요?”
“다른 사람은 무슨. 변신해봤자 너는 똑같이 너잖아.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회귀자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은 우연하게도 힐데의 역린을 건드렸다. 어쩌면 자신을 잃은 변신술사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시지는 때로 메신저를 타곤 한다. 힐데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당신은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요. 당신은 ‘저’를 찾아내지 못하니까요.”
“알아차릴 수 있거든? 몇 번 알아맞히기도 했잖아.”
“‘눈’을 써서요? 푸훗. 의심을 전제로 하고 알아차리는 건 세상 누구라도 해요. 하물며 확인하려는데 빛의 권능에 의존해야 하잖아요? 비겁해. 더욱 나쁜 건 자기가 비겁하다는 것도 몰라. ‘저’를 처음부터 알아차린 사람은 오직 아버님뿐이에요.”
어. 사실 나도 독심술이라는 권능 비슷한 걸 쓰긴 했는데. 너무 올려 치면 많이 미안해진다.
그래도 나는 내가 비겁하다는 사실을 아니까 괜찮지 않을까.
“갑자기 왜 그래?”
“당신이 ‘제’ 변신술에 대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그래요. 그러면 ‘저’는 이만, 잠입 준비를 해야 해서~.”
힐데는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골목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회귀자는 힐데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쟤?”
“뭔지는 모르지만 셰이 씨가 밉보인 모양이에요.”
“내 탓이라는 거야?”
탓은 아니고. 그냥 잘 안 맞은 사람인가 보지.
따로 떨어져서 정보를 수집하자고 말은 나왔지만, 나는 딱히 발로 뛰어다닐 생각은 없었다. 몸으로 하는 일에는 젬병이라서 말이지.
황금경. 그는 왕이 되려고 하는 걸까. 신이 되려고 하는 걸까.
도무지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의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어. 식량을 생산하고 도시를 만드는 걸 보면 인간을 살리려는 것 같지만, 결국 그렇게 인간을 많이 만들어서 하는 일이 수집이라니.
타인을 죽이고 그 피와 땀으로 연명하는 건 왕이다.
자기를 나누어 그 조각을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건 신이다.
그런데 황금경의 행동은 그 두 개 가운데 어디 걸쳐져 있었다. 자기 능력을 펼쳐 다른 사람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지만, 그렇게 살아간 백성이 도달하는 게 ‘수집’이다. 백성은 궁극적으로 황금경의 일부가 된다. 살면 ‘수집’당하고, 죽으면 ‘분해’당해서.
그렇지만… 인간 같은 걸 수집할 이유 따위 없잖아.
그래서 ‘황금경’이라는 호칭을 고수하는 건가? 왕도 신도 아니라서?
“진짜 만나봐야겠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그때였다. 앞선 거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약간 비탈진 길에 마차와 하나로 얽혀있었다. 주인처럼 보이는 이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도시 안에 마차 갖고 들어온 새끼 누구야?!”
“저쪽이 급정거했다고!”
“내가 잠깐 멈춘 거랑 네가 벽이 들이박은 거랑 뭔 상관이냐!”
교통사고네. 흔한 일이지.
이 도시는 억압회주 휘하의 연금술사들과 옥수수밭을 노리는 승냥이들이 잠시 거주하고 있다. 억압회주의 힘과 인망에 의해 치안은 유지되고 있지만, 제멋대로인 승냥이들이 모여 사는데 문제가 안 생길 리 없다.
어쩔 수 없지. 빙 돌아갈까. 도시의 지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방향감각만 있다면 결국 원하는 위치까지 도달하게 된다.
뭐? 길치? 그런 환상의 생물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 믿을 게 지성밖에 없는 인간이 길치라니 너무 수치스럽잖아. 너희는 인간 탈락이다.
그렇게 옆 골목으로 빠져서 다음 골목으로 향하려는데.
“어라. 여기는 길이 없네.”
이상하다. 계산상 길이 있을 만한데. 조금 더 가야 하나. 어디, 다음 골목.
맞네. 이대로 지나면 다음 거리가 나온다. 골목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안쪽에서 들려오는 생각에 급히 발걸음을 멈췄다.
‘오면은 콱. 돈 많아 보이는 녀석을 찔러서 한탕하는 거야. 한 방이면 돼!’
뭔 강도가 다 있네. 명확한 살의를 갖고 단도를 쥐고 있다. 저런 사람에게는 방심시키고 하는 기습도 통하지 않는다. 말 거는 즉시 찌르려고 들 테니까 말야.
도망쳐.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꺾자.
아직 길을 잃지는 않았다. 태양이 뜬 방향도 알고, 동서남북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정 안 되면 지붕에 올라서 뛰어다니면 충분하다. 나는 길치가 아니니까.
그래서 더욱 묘하다.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별다른 고민 없이 그때그때 내가 선택했는데 저절로 어떤 길로 몰리는 것 같다. 분명 가는 길은 맞지만 조금 으슥하고 누군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어떤 골목으로.
기묘하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내 선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누군가 점지한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된 기분. 10수 앞을 내다보는 체스 기사의 손아귀에서 춤추는 듯한 불쾌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다. 나는 독심술사. 10수 앞을 내다보는 플레이어의 생각을 읽어 역으로 함정을 팔 수 있는 심리전의 사기꾼이다. 그런 내 독심술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길을 막았던 승냥이들도, 노상강도 지망생도, 그리고 막힌 벽도. 전부 의도해서 길을 막지 않았다. 알았다면 미리 읽고 대처했지. 누군가 설계했다고 해도, 내가 그 시간에 그 거리를 걸어올 줄 어떻게 알고 그런 장치를 준비한단 말인가.
내가 이 길로 오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겠지….
“경고하겠습니다. 야만이여.”
…아니,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다.
성황청에서 말하는 ‘운명’.
로브를 깊게 눌러쓴 여자가 좁은 골목길을 막고 서 있었다. 전신에 드러난 부분이라고는 갸름한 입가와 잿빛 머리카락, 그리고 소매 사이로 드러난 굳은 주먹뿐이었다.
역시라고나 할까.
생각은 읽었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칠 수도 없다. 첫 거리에서 방향을 바꾼 순간부터 이 조우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성황청의 성녀에 의해서.
정해진 대로 이 장소에 선 그녀는 정해진 대로 나를 노려보았다. 적의는 있지만 공격할 의지는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건, 단지 경고를 위해서니까.
“전쟁을 멈추고자 한다면 가만히 두고 보겠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앞날에는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 만일 또 다른 혼란을 추구할 생각이라면. 인간을 다시 제멋대로 행동하는 짐승으로 전락시키려고 한다면.”
강철의 성녀. 페르엘.
성황청의 정점인 성녀 중에서도 순수한 무력을 지닌 유일한 존재.
강철의 성녀는 굳게 쥔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이단을 일격에 분쇄하는 그 주먹을 성해포로 가린 건 주먹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먹에 맞을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저 눈물 나는 배려에도 불구하고 보호받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성녀의 주먹이 닿은 건 모두 분쇄되었기에.
“이 몸종을 축복하고, 야만을 저주한 처음의 성녀의 뜻을 받들어.”
위기감 없이 홀로 온 건 인정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왔다고 해서 더 안전하지도 않았을 거다. 강철의 성녀는 막을 수 없으니까 말이지. 말 그대로.
페르엘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경고했다.
“이 주먹으로 직접, 당신에게 신벌을 내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아니라, 인간의 왕을 향해서.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태어날지 정하지 못한다. 인간의 왕도 마찬가지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 눈을 떠보니까 인간의 왕이었는데.
인간의 왕이라고 뭔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왕도 나라가 없다면 자기를 왕이라 믿는 정신병자에 불과하다. 하물며 모든 힘을 잃은 인간의 왕은? 그저 인간이 하는 일에 조금 능숙할 뿐인 평범한 정신병자일 뿐.
그래서 나는 평범하게 살아가고, 소일거리하며 평범하게 지내려고 했다.
문제는 세상이 나를 가만 안 놔둔 나머지 특별한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되었고, 적응의 동물이라 나름 적응해버렸을 뿐 본질이 달라진 건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녀가 찾아와서는 나보고 경고하겠대. 여차하면 주먹으로 신벌을 내린대. 억울해. 말이 안 되잖아! 내가 왜 맞아 죽어야 하는데!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한껏 억울함을 담아서 소리쳤다.
“제가 뭘 하려고 한다고요? 저는 평범하게 살아가려다가 이상한 일에 휘말렸을 뿐인데!”
“무저갱의 마신지정을 건드렸으면서 발뺌하는 겁니까?”
“마신지정? 그게 뭔데요? 먹는 거예요? 그걸 제가 건드렸다고 도대체 누가 그래요? 당신이 제 속에 들어갔다 나와봤어요? 오히려 제가 천신에게 따지고 싶은 지경이라고요! 느닷없이 잡혀서 무저갱에 던져졌는데, 거기에 제 자의가 어디 있다고!”
“시치미 떼긴! 당신이 요술사 란카르트와 작당해서…!”
발끈해서 외치려던 페르엘은 문득 제 입을 막고는 웅얼거렸다.
“…아니. 야만과 대화하는 건 어리석은 짓! 현혹되지 않습니다!”
“현혹이라니? 당신은 억울한 어린 양의 호소도 현혹이라고 해요? 언제부터 신이 그렇게 무정했죠?”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당신이 한 행동으로 이미 명확해졌습니다!”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 뭔가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잠깐 대화로 풀어보시죠.”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죠? 서로 대화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권능이라고 성경에서도 말하지 않던가요. 그토록 고귀한 거라면 더욱 활용해야죠.”
“악마가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과의 대화는 필요 없습니다!”
페르엘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가볍게 발을 구른 것 같은데 몸이 훌쩍 솟구친다. 어느덧 거리 입구까지 돌아간 페르엘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몸종은 오늘 물러갑니다. 다만 잊지 마십시오!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걸!”
“음침하게 뭘 자꾸 지켜본대. 변태에요? 그렇게 계속 지켜볼 바에야 서로 다 까고 솔직하게 이야기나 해보죠. 여기 빈집 많으니까 일단 어디라도 들어가서….”
페르엘은 귀를 콱 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성해포에 덮인 귀는 내 목소리를 하나도 통과시키지 않았다.
쳇. 아쉽네. 조금 더 생각을 읽을 기회였는데.
내 독심술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읽는 것. 성녀는 인간이니까 그들의 마음은 읽힌다. 하지만 그들이 보았던 미래를 직접 훔쳐볼 수는 없다. 세상에 진리가 존재한다고 모든 인간이 그걸 보는 게 아니듯이.
거기다 강철의 성녀가 하는 예지는 특별해서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대화를 통해 점차 정보를 끌어내야 했는데…. 교육이 잘 되어 있네.
새삼 느끼지만 세상은 너무 불합리해. 아무런 힘도 없는 나는 머리를 굴리고 온갖 수를 다 활용해서 아득바득 살아남는데, 정작 저쪽은 운명을 타고 나타난다. 그래놓고 휘말렸을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나를 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