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54)
지금껏 양초나 향료를 갖고 온 이들은 많았다. 화무십일홍을 들고 와서 자랑스레 내미는 그들이 얄미워 엘릭은 다시 금으로 바꾸어오라는 심술을 부렸다. 그러면 남이 쓴 편법을 고민도 없이 따라 한 한량들은 사색이 되곤 했다.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를 잃는 그것들과는 달리, 종은 그 가치가 보존된다. 엘릭이 바란 답은 아니었지만 제자가 만든 종은 청명한 소리를 마음 깊숙이부터 울리는 상등품이었다. 이대로 갖다 팔아도 썼던 금 정도는 가뿐히 벌어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못하겠다고?
예전에 방을 불빛으로 채운 기지를 보고 칭찬했던 건 유연한 사고와 능글능글한 언변에 높은 점수를 주었던 것. 그러나 어디서 들은 편법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주제에 상술조차 없어서 가르침을 내려달라니.
엘릭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너는 금을 하찮은 쇠로 바꾸어 온 주제에, 쇠를 금으로 바꾸는 법도 모르느냐! 황금을 쓰레기로 만드는 주제에 왕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 썩 꺼져라! 그걸 금으로 바꿔오기 전까지는!”
엘릭이 호통치자, 제자는 혼비백산하여 물러갔다. 못난 제자를 단숨에 쫓아낸 엘릭은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종소리는 좋았다. 종소리는.
다만, 그런 기술 따위 이해의 권능을 지닌 엘릭에게는 너무나도 사소한 것이었기에. 이해한 순간 너무나 쉬운 기술이 되기에….
어차피 어떤 기술도 엘릭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뻔뻔하게 양초를 갖고 왔던 녀석처럼 기지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그를 칭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엘릭은 한탄하며 다음 방문객을 불렀다.
하루가 지났다.
이틀이 흘렀다.
사흘을 보낼 동안 엘릭은 수많은 제자를 돌보았고,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일상 속에서 좋은 종소리를 내던 제자의 기억이 점차 잊혀갈 무렵이었다.
“해, 해냈습니다! 영원하신 엘릭이시여. 폐하께서 명하신 바를 이루어냈나이다!”
그는 종을 금으로 바꾸어오겠다는 말을 지켰다. 다만, 그 방식은 온갖 기술과 지식을 익힌 엘릭의 상상조차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었다.
엘릭의 앞에, 찬란히 빛나는 황금 종이 놓여 있었다.
“폐하의 가르침에 탄복했나이다! 처음에는 그저 저를 내치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불민한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처음에는 질 나쁜 장난인 줄 알았다.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하여 그녀를 즐겁게 해주려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호통치는 대신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러나… 제자의 발견이 진실이며 진리라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해졌다.
“폐하께서 짐작하신대로, 만물은 사실 하나입니다. 우리 장인들이 여러 종류의 철을 번갈아 쓰더라도 근본적으로 철은 하나이듯, 만물 역시 하나의 근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질을 이루는 어떤 순수한 형태로! 당연히 바꿀 수 있지요!”
제자는 엘릭이 이미 진리를 깨우치고 있으며, 그 이해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고자 문제를 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엘릭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설명을 해댔다.
그러나 엘릭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쇠를 금으로 만든다는 말인가.
쇠로 무기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래도 쇠는 쇠인 채로 무기가 된다. 다른 종류의 금속을 섞어 합금으로 만드는 경우도 밀가루 반죽에 깨를 섞어 넣는 것과 비슷하지, 찹쌀이나 메밀 반죽으로 바꾸는 게 아니다. 후자를 부를 때는 기술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사기라고.
권능을 지닌 엘릭은 그걸 분명히 이해했다. 그러나 제자가 말하는 내용은 지금껏 그녀가… 아니, 지금까지 인간이 쌓은 지식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믿음이 없을 때는 감히 짐작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 폐하께서 일러주시니 제 눈이 뜨였습니다! 그게 아주,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덩어리인지. 혹은 물처럼 흐르는 건지는 잘 모르겠나이다. 어쩌면 너무 작기에 우리가 아는 형태와 무관할 수도 있사옵니다. 아주 고운 모래라면 돌 틈에서 물처럼 흐르겠지요!”
모른다.
모든 게 가능과 불가능으로 나뉘었던 세상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모르겠다. 그녀가 아는 어떤 지식을 갖다 붙여도 그가 말하는 내용의 티끌조차 짚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한평생 군림해온 그녀에겐…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당당히 선언할 배짱이 없었다. 그건 고대로부터 내려온 엘릭이라는 이름과 그에 담긴 권능을 부정하는 셈이니까.
유리아 엘릭은 무너지려는 표정을 수습하며 말했다.
“제대로 짚었구나. 나 역시 비슷하게 짐작하고 있었느니라. 너처럼 자세하게 파고들진 않았지만.”
“폐하께선 공사다망하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폐하의 의중을 깨달은 첫 번째 제자라는 사실만으로도 황송합니다!”
전혀. 그런 의중이 아니었다. 제자가 멋대로 오해했을 뿐이다.
“혹 그 형태를 내게 보일 수 있겠느냐?”
“어, 그것이…. 저도 생각해본 바는 있으나…. 순수한 강철을 녹여내기 위해서는 용광로가 필요하듯, 그 순수한 형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용광로보다 몇백 배는 더 뜨거운 고로가 필요할 터인데…. 혹시 폐하께선….”
말할 것도 없다. 왕의 권능을 지닌 그녀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불가능. 현재 인간의 기술로는 도달할 수 없다.
“불가하다. 원하는 온도에 도달하더라도 고로가 녹을 것이다.”
“역시 그렇습니까…. 하면 편법이나마 고유마도로 도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폐하께서 깨우친 이치를 세상에 펼칠 방법은 고유마도뿐입니다.”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고유마도라면 엘릭은 따라할 수 없다. 엘릭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불가하다. 왕의 권능을 지닌 이는 고유마도를 익히기 불가능에 가깝다.”
진실이다. 왕의 권능을 지닌 이들은 대대로 고유마도에 재능이 없었다. 너무 강력한 권능이 심상을 구현하는 재능을 집어삼킨 것이다.
하나, 그 진실은 다른 또 하나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엘릭은 심상은커녕 그 원리조차 짐작하지 못했다는 진실을.
왕은 백성의 마음을 모른다지만, 백성 또한 왕의 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위대한 엘릭을 한없이 존경하고, 추앙하며, 연모하던 제자는 그 속뜻도 모르고는 외쳤다.
“그, 그렇다면 제가 폐하의 고유마도가 되겠습니다!”
“…그러겠느냐.”
“이 역시 폐하께서 제게 내리신 은혜. 그걸 갚기 위해서라도! 저는 평생토록 폐하를 위해 이 힘을 쓰겠나이다!”
엘릭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배운 적도 없고 가르친 적도 없는 것을, 제자는 약간의 오해만으로 스스로 도달했다. 왕의 권능조차 뛰어넘어, 어떤 인간조차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어쩌면, 권태감은 상당히 사치스러운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무력감과 열등감, 그리고 저열한 쾌감에 비하면….
“허락하겠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네 발견을 더욱 널리 알리도록 하라, 데모.”
연모하는 왕에게 인정받은 데모는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숙였다.
“받들겠나이다!”
그로부터 몇 년. 금국은 연금술사라는 이들이 등장했다. 데모의 가르침을 받은 몇몇 기술자들은 강철을 황금으로 바꾸어내는 데 성공했다. 연금술사들은 자연스레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으며 금국의 실세로 떠올랐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 연금술사들이 부상함에 따라 금국의 기반을 이루던 대장장이와 기술자들은 고달픈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금국이 자랑하는 기술자라고 하더라도 황금을 직접 만들어내는 연금술사의 앞에서는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금국의 황금은 세계 곳곳으로 퍼졌고 온갖 재산으로 돌아왔다. 연금술사들이 흘린 콩고물만 주워도 온갖 호사를 누렸으니. 내로라하는 장인들도 기술조차 잊은 채 술에 찌들어 세월을 보냈다.
점차 커지는 균열을 황금과 비단의 찬란함으로 가린 채, 금국은 끝없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 저희 가게에서는 오늘부터 금을 받지 않습니다….”
붕괴는 여느 때처럼 조용하게, 확실하게 찾아왔다.
“너, 너무 많아요. 금편이 곡식보다 많을 지경이란 말입니다. 차라리 다른 걸로 주십시오….”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황금이다. 오래도록 부의 상징이었으며, 세계 어느 곳에서도 화폐로 쓰이던 귀중한 금속. 마력의 촉매제로서도 가치가 높았으니 모두가 금을 탐했다.
하나 연금술사가 찍어낸 금이 돌보다 많아지자, 인간들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기 시작했다. 경제 논리가 수천 년 이어져 내려온 가치를 뒤바꾼 것이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누구도 대비하지 못했다. 당연히 마땅한 해결책을 가진 이도 없었다.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제발 내 금을 사줘!”
“이만큼의 금이 있는데 왜 못 주겠다는 거야!”
“도적이 습격을? 용병을 구해와! 금을 있는 대로 주겠다고 해…. 뭐? 안 받는다고?”
금으로 쌓아 올린 탑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금에 대한 신뢰를 잃었을 뿐인데 금국에 존재하던 모든 금이 한순간 가치를 잃고 애물단지가 되었다. 이는 그 어떤 연금술사조차 해내지 못한 위업이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모두가 동시에 가난해지자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더 이상 황금의 논리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대신 강철로 된 무기를 들었다. 연금술사에 밀려서 부와 권세를 잃었던 장인들은 강철의 시대가 도래하며 다시금 득세했다.
무기를 쥔 이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연금술사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연금술사를 죽이고 그들이 가진 재산을 빼앗았다. 그때까진 연금술사란 강철을 황금으로 바꾸는 기술자일 뿐, 전투에는 문외한이었기에 잇따른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토록 믿던 황금도, 그 황금으로 부리던 이들도 그들의 목숨을 구하진 못했다.
전국적으로 연금술사 사냥과 처형이 이루어졌다. 피로 얼룩진 금이 땅에 흩뿌려진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피바람이 금국 전역을 휩쓸었고.
“대역죄인 데모는 들어라. 네 어리석은 행동으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죄, 용서하기 어렵다.”
최초의 연금술사인 데모 역시도 그 화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목에 족쇄를 차고 철구를 매달아라. 그 뒤, 채찍을 때려 금국을 배회하게 하라. 심판은 금국의 백성들에게 맡기겠다.”
연금술사에 대한 증오가 하늘에 닿은 지금, 연금술의 창조자는 백성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금국의 왕 유리아 엘릭은 차가운 눈으로 데모를 내려다보며 그의 죽음을 선고했다.
***
그래. 느꼈다. 이 기억은 무저갱 지하에서 보았던 과거의 기억을 닮았다.
잔류사념이라는 게 있다. 경지에 이른 인간이 죽었을 때, 생전 그들이 이룩했던 마력과 기력이 죽고 나서도 계속 머무른다. 가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생전의 습관을 재현하기도 한다.
화장이든 매장이든 장례를 치르거나, 혹은 시체가 손상되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 잔류사념도 사라지지만, 모종의 수단으로 그 원형이 유지된다면 계속 남는다. 무저갱 밑바닥처럼.
그리고… 이 황금궁처럼 말이지.
의문이 있다면, 왜 황금경 대신 엘릭 왕의 사념이 느껴지냐는 거지.
“티르. 어때요. 무언가 느껴지나요…. 티르?”
어라. 내 보디가드 어디 갔지.
분명 곁에 있었고 같이 걸어왔는데 어느새 사라졌다. 뭐야, 이거. 생각을 읽어보니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
그보다… 뭔가 이상하다.
옥수수밭을 헤치고 지나왔는데 왜 공터가 있지?
아무리 키 큰 옥수수가 가득했다지만, 조금 전 내가 다가올 때만 해도 이런 널따란 공터 따위 없었다. 옥수수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다음 옥수수뿐이었다. 그런데 열폭회주를 제치고 옥수수 하나만 건너오니 느닷없이 공터가 나온다.
목가적인 광경이었다. 창고를 겸한 커다란 마을회관이 보인다. 치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정감이 가는 모습이었다. 그 뒤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그 뒤로 시냇물이 졸졸 흐른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시골의 풍경.
당연히, 그건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딴세상에 온 것만 같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내 뒤쪽 옥수수밭을 헤치고 농부들이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옥수수를 한 아름 든 농부들이 창고로 향한다. 말없이 그 안에 옥수수를 채워넣은 뒤 다시 옥수수를 따러 간다. 마치 일개미처럼.
그러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도 읽히지 않는다.
이곳에서 일하는 그들 모두가 호문쿨루스이기에.
“자, 자네는! 어떻게 황금궁에!”
그 와중 밀짚모자를 쓴 노인이 나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억압회주 헥토였다. 역시, 이 사람만은 황금궁과 관련이 있었군.
‘어떻게 여기까지!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생각이 읽히는 걸 보니 저 사람은 원본이네. 네 생각 읽고 여기까지 왔지.
“하루 말미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건 계약 위반이네!”
“네? 무슨 소리를. 옥수수밭을 구경하다 우연히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데 여기가 황금궁이라고요?”
“뭣…!”
당황하던 헥토는 곧 생각을 가다듬고 외쳤다.
“거짓말하지 말게! 이 넓은 옥수수밭에서, 가디언이 지키는 황금궁을 정확히 찾아오고 우연이라고? 되도않는 소리를!”
역시 머리는 잘 돌아가.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쩔 건데. 거짓말이라고 아득바득 우기는 거 말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증명할 수 없으면 그게 사실인 거지.
“진짜 우연이에요. 저는 단순히 정찰하다가 여기까지 도착한 거라고요. 만일 그쪽이 황금궁의 위치를 순순히 불었다면 우연이라도 여기 안 왔지.”
“정찰하는 시점에서 찾아올 생각이었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