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58)
‘피를 통한 지배는 시조의 능력…! 그게 호문쿨루스조차 지배할 줄이야. 역시, 조심하는 편이 좋았겠군! 이미 늦었지만!’
그에 비해 황금경은 호문쿨루스가 서로 싸우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었다. 약간의 기반 지식만 있다면 티르가 흡혈귀라는 것을, 호문쿨루스를 혈조술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겠지만… 지금의 황금경에게 그걸 알아챈 모습은 없다.
“…내… 금국이… 어째서, 이상하게….”
황금경이 멍청해서? 마신인데 그럴 리 없지. 단순히 대응능력이 떨어졌을 뿐이다.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그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이 사라졌으니까!
“황금경이시여! 흡혈귀입니다! 흡혈귀가 저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헥토가 분명하게 보고하고 나서야 황금경은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했다. 황금경이 삐걱거리며 답했다.
“흡혈, 귀? 지금껏 그런 일은 없었다. 어찌하여.”
“지금 일어났습니다! 어쨌든, 피로 저들을 조종하는 겁니다! 대책을!”
“대책. 강구.”
헥토의 ‘보고’를 받은 황금경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철사회주.”
그 순간 전황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지금껏 배신자들을 파괴하기 위해서 움직이던 호문쿨루스가 일제히 전략적인 행동을 취했다. 연금술을 활용해서 긴 철사 올가미를 만들어 배신자 호문쿨루스의 발을 묶었던 것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도 쏟아지는 강철 올가미를 도구 없이 찢어발길 수는 없다. 티르의 호문쿨루스는 함정에 빠진 짐승처럼 바둥거렸다.
한순간 대치 상태를 만든 황금경은 옆에 있던 농부를 손으로 짚으며 중얼거렸다.
“거울회주.”
연금광이 번뜩인 뒤, 농부였던 인형은 풍광에 녹아든 듯한 옷을 입은 회주로 바뀌었다. 안경을 끼고 돋보기와 렌즈를 몸에 치렁치렁 매단 호문쿨루스가 렌즈의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천신교에선 태양빛이 올곧음의 상징이라고 말하지만, 종교가 그렇듯 으레 과정이 섞이기 마련이다. 수십 개의 렌즈가 햇빛을 굴절시켜 한 점으로 모았다.
허공에 형상을 이룰 정도로 응축된 빛은 꼭 거대한 창처럼 보였다. 거울회주는 빛의 창을 휘둘러 검붉은 호문쿨루스에게 쏘아냈다.
화르륵. 호문쿨루스의 몸에 불이 붙었다. 피와 어둠을 매개로 하는 티르의 지배력은 응축된 햇빛에 힘을 잃었다. 흡혈귀라면 약간은 저항할지 모르나, 호문쿨루스는 아예 살아있지 않다. 그들은 몸을 비틀거나 숨지도 못하고 그대로 죽어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이윽고 티르의 호문쿨루스는 전부 불타 쓰러졌다. ‘대책’은 너무나도 유효했다. 황금경은 불탄 사체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내, 금국을… 더럽히게 두진 않겠다….”
하지만 호문쿨루스들은 이미 제 역할을 다했다. 이미 우리는 포위를 뚫고 황금궁의 경계까지 도달해 있었으니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수세를 취했다. 매복을 두지 않았다면 여기서 우리를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신경 쓴 이상 이미 늦었어! 잘 있어라, 멍청이들!”
한껏 비웃음을 날리며 황금궁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세상을 건너뛴 것처럼 잠깐 주변 광경이 어그러진다. 조금 전까지 호문쿨루스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공터는 어디 가고, 사방에는 무성한 옥수수밭만이 가득했다.
살았다, 하고 안심하는 그 와중. 옥수수와는 명백히 다른 한 인영이 눈앞에 나타났다.
작업복 비슷한 멜빵바지. 녹슨 것처럼 붉은 기 감도는 잿빛 꽁지머리. 열국의 잔녹회주, 페루가 눈을 크게 뜬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를, 어떻게.’
페루다. 헥토와 함께 찾아왔으나, 모종의 이유로 황금궁 밖에서 기다리던 페루는 이 불의의 순간에 우리와 마주쳤다. 불운하게도.
내 뒤로 회귀자, 티르가 연달아 빠져나온다. 일렁이는 공간 너머로는 우리를 쫓는 호문쿨루스가 보인다. 한참 뒤에는 헥토와 황금경, 그리고 엘릭이 서 있다.
페루는 영문도 모른 채 서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만물이 생겨나고 상식이 무너지는 황금궁 저 안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때, 헥토가 페루를 발견하고는 외쳤다.
“잔녹! 그들을 막게!”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을지 짐작할 수는 있다. 다급한 헥토의 표정. 피를 흘리며 날뛰는 호문쿨루스들. 그리고 우뚝 선 황금경과 엘릭.
도망치는 우리들을 눈에 담은 페루는 어렵지 않게 결과를 짐작했다.
‘…휴전 협상은, 실패한 모양이네.’
고유마도 때문일까. 붕괴의 전조를 본능적으로 파악한 페루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이번에도.’
그녀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었다. 아니, 헛수고를 넘어 우리와 열국 양측에 커다란 위험을 안겨준 셈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자네의 힘을 써서라도!”
페루에게 우리를 막을 수단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페루는 제 의무를 떠올렸다. 저거너트를 하사받은 열국의 회주는 황금경에게 충성해야 한다. 그들이 가진 힘, 부와 명성, 그 위업까지도 전부 황금경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그러나.
“안 돼! 멈춰!”
다급한 헥토의 목소리를 엘릭의 소름끼치는 비명이 뒤덮었다.
그 비명은 나도, 회귀자도, 하물며 티르를 향한 것도 아니다. 엘릭은 체면도 위엄도 잊고 페루를 향해 외쳤다. 마치 공포에 질린 것처럼.
“너는, 힘을 써선 안 돼애애애!”
‘…역시.’
딱히 막을 수단도 없고 그럴 의지조차 없었지만. 의무마저도 거부당했다. 페루는 고유마도조차 거둔 채 대신 양팔을 벌려 섰다. 몸으로 막으려는 것처럼.
폭포를 손바닥으로 막으려는 행위다. 고유마도 아니면 별다른 힘이 없는 여인이 회귀자나 티르를 어떻게 막을까. 평범하디 평범한 내 선에서 컷이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회귀자는 잔녹회주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눈앞을 가로막고 선 회주. 심지어 약간이지만 공격의지까지 보였다. 페루의 위험순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
‘우리에게 호의적이었을 지라도, 적은 적…! 죽여야 해!’
그동안 지낸 정이 있지만 회귀자는 정 털어내는 속도마저도 신속하다. 회귀자는 냉철하게 상황을 쟀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포위당하면 위험해. 하물며 동료가 있는 지금이라면! 약간의 위험도 남겨 둘 수 없어!’
살의를 품는 데 아쉬움은 있어도 주저는 없다. 죽이는 이유는 그저 필요하기에, 회귀자는 살의를 칼처럼 벼려 정을 끊어냈다. 천앵이 회귀자의 손아귀에서 뽑혀나온다.
끙. 안 돼. 죽이는 건 문제없지만 저쪽이 껄끄러워하는 카드야. 이대로 버릴 수는 없어!
“셰이 씨! 앞에!”
앞서가던 내가 슬쩍 몸을 움직였다. 페루를 베려던 회귀자는 그 궤적에 내가 나타나자 다급히 천앵을 멈췄다. 부지불식간이라 미처 피하지 못한 회귀자는 내 등에 콩 머리를 박고 말았다.
“끄악! 뭔 짓이에요!”
“너야말로! 위험하잖아!”
실제로 위험했다. 머리랑 부딪혔는데 등이 투포환에 맞은 것처럼 아파.덕분에 페루가 살긴 했지만 약간 후회될 정도다.
“어쨌든, 앞에! 제가 처리할게요!”
그리 외치며 나는 성큼 페루에게 접근했다. 공격의 의지가 없는 페루는 몸으로 막으려는 듯이 양팔만 벌리고 서 있었다. 방어는 도외시한 채로.
텅 빈 복부가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대놓고 각을 주면 못 참지. 멜빵 한가운데, 무방비한 복부로 아무런 주저 없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온힘을 다한 일격이 푸욱, 하고 배 깊숙이 들어갔다.
“…!”
다른 회주와는 달리 페루에겐 자기를 보호할 수단이 없다.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금방 녹슬어버리고 마니까. 그래서 내 일격은 페루를 일격에 무력화했다. 균형을 잃은 페루의 몸이 내 위로 무너졌다.
나는 쓰러진 페루를 어깨로 들어올렸다. 조우부터 격파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
캬. 이러니까 내가 꼭 강해진 것 같네. 역시 힘이란 상대적인 법. 평범한 나라도 상대가 약하면 충분히 무쌍을 찍을 수 있다고.
어때? 내 이 멋진 모습이….
“무저항인 여자를 그리 거칠게 때리다니…. 휴….”
아차. 나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아진 것 같다.
어쩔 수 없잖아. 따지고 보면 내가 살린 거란 말이야. 황금경과 척을 지게 된 지금 이렇게 쓰러뜨려 놔야 오히려 페루가 안전하다고!
페루가 단번에 쓰러지자 회귀자도 천앵을 거두었다. 어디까지나 위험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 죽이려고 한 거지, 페루를 제압한 지금 회귀자도 구태여 손을 더 쓰려고 하진 않았다.
“그래도 잔녹회주가 우리를 도울 것 같진 않은데?”
“목에 칼 겨누고 협박하죠, 뭐!”
“…뭐, 된다면 좋으니까.”
‘저항도 없이 맞아주네. 그러면 나도 죽일 이유 없지…. 휴즈가 아니었다면 괜히 피를 봤겠는걸. 배를 너무 사정없이 때리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잔녹회주를 구한 셈이니까.’
그래도 회귀자는 알아주는구나. 그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칼을 휘두르려고 한 너는 인정해줘야지.
끙.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 하나 짊어지고 달리기엔… 내 기력이 그리….
“셰이 씨. 페루가 꽤 무거워서 그런데. 셰이 씨가 대신 들어주실 생각은…?”
“…건네줘.”
‘진짜 폼도 안 살긴….’
나에 대한 인상이 또 안 좋아진 것 같다. 넘기는 와중에 페루가 발길질로 나를 때린 건 실수라고 해두자.
어쨌건 내 용병술이 빛을 발한 건지 회귀자가 페루를 들자 속도가 충분히 빨라졌다. 우리는 황금궁을 뒤로 한 채 빠르게 옥수수밭을 이탈했다.
꽁지 빠지게 도망간 우리는 옥수수밭 한구석에 숨었다. 옥수수밭은 충분히 넓었고 황금경은 수색에 능하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숨 돌릴 시간을 얻었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도 없다. 이 옥수수밭을 둘러싼 공기가 명백하게 뒤바뀌었으니까.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우리를 수색하는 이들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나는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숨죽이고 있다가 말했다.
“끙. 밖에 엄청나게 나돌아다니는 것 같은데요.”
“호문쿨루스는 아닐 거야. 황금궁 바깥에서 돌아다니진 못할 테니까. 아마 억압회주의 병사겠지.”
“저들을 공격하면 호문쿨루스가 찾아올 테니까 비슷하죠.”
다행스럽게도 저들은 우리의 그림자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땅속에 숨어있으니까.
추격대로부터 충분히 멀어지자 회귀자는 익숙한 듯 지잔으로 땅 밑을 파냈다. 으레 이 경우 파낸 흙이 문제가 되지만, 회귀자의 지잔은 흙더미를 땅 아래로 더욱 다져버리는 기막힌 권능을 발휘했다. 덕분에 땅 밑 구덩이답지 않게 쾌적한 은신처가 완성되었다.
야생의 위협에 시달린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어둡고 좁은 공간을 선호한다. 어둠은 포식자의 눈으로부터 나를 가려주고, 좁은 공간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건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마찬가지라, 나는 구석에 누워서 이 편안함을 만끽했다.
“하아. 편하다.”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나 또한 그렇다. 고백하자면, 요즘 너희들이 자꾸 낮에 바깥을 돌아다니려 해서 조금 불만이던 참이다.”
“아니, 그래도 돌아다닐 거면 낮에 돌아다녀야죠. 여기서 천년만년 살 순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흡혈귀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지.
“거기다 지금 페루를 보세요. 기침하고 있잖아요. 여기 공기가 안 좋아서 그런가 봐요.”
“…콜록. 너, 때문인데….”
페루는 인상을 찡그린 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살은.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평범하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세게 쳤다고 한들, 기공도 담지 못한 그 주먹질은 평범한 축에 속한다. 그 정도면 맞을 만하잖아.
세세하게 따지고 보면 네 목숨을 살린 대가라고. 목숨값이라고 치면 나는 백 대도 맞겠다.
“뭐, 이참에 다시 묻죠. 우리에게 협력할 생각은 있어요?”
“…콜록, 콜록. 협력이라면, 충분히 했어.”
“흐음. 완고해서 말로는 안 되겠네요. 셰이 씨, 칼.”
나는 자연스럽게 회귀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한테 뭐 맡아 놨어? 왜 이리 당당해.”
회귀자가 툴툴거리며 아공간에서 매끈한 단검 하나를 건넸다. 엄청난 보물은 아니지만 귀한 짐승의 엄니로 만든 단검이다. 돈 주고도 사기 힘든 물건이라 흥정만 잘하면 대도시의 집도 살 수 있겠다.
…이런 물건을 서슴없이 내놓다니.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돌려주지 말고 숨겨두자.
흠흠. 어쨌든. 나는 불량배처럼 쪼그려 앉아서 단검을 페루에게 겨누었다. 찌를 생각은 없지만 날 선 칼날은 그 자체로도 위협이다. 계속 버티진 못하겠지.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요. 이렇게 칼 들고 협박하는데도 협력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