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59)
찌르는 시늉하는 순간, 칼끝이 새카맣게 변색하더니 이내 먼지처럼 부스러졌다. 순간 짐승의 엄니로 만든 단검은 가죽 손잡이만 남긴 채 사라졌다.
“어라라?”
내 돈이 먼지더미로? 잔녹의 힘은 짐승의 이빨도 부스러뜨리는 거야? 이 무슨…. 열국에서 어떻게 이런 능력자가 탄생했지?
혹여나 다른 게 부스러질까, 나는 가죽 손잡이를 던지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때 이쪽을 주시하던 회귀자가 날카롭게 경고했다.
“잔녹회주. 능력 함부로 쓰지 마. 죽을 수도 있어.”
진심이다. 살기가 페루의 목을 겨냥하고 있다. 천앵과 지잔은 권능으로 녹슬지 않으니, 아무리 페루라도 회귀자의 공격은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페루는 살기를 앞두고도 담담했다.
“…죽여. 어차피, 나는… 콜록. 없느니만 못하니.”
‘…내가 힘을 쓰면, 황금경께서 쓸 재료가 사라지는 셈이니까…. 전쟁이 일어나도, 나는 낄 수 없어. 부수기만 하는 능력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적진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완고하다. 충성심이라기보단 자포자기에 가까운 감정이나, 그래서 더 바꾸기 어려워보였다.
회귀자가 혀를 찼다.
“쳇. 휴즈. 칼 들고 협박해도 안 되겠는데.”
“그러면 돈 들고 협박하면 될까요? 페루, 저희에게 협력하면 열국의 반을 드릴게요. 부자가 될 거예요.”
“…콜록! 필요, 없어.”
생각해보니 돈이 있어도 부스러져서 잘 쓰지 못하지? 흠, 어렵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가 가장 무섭다더니. 후천적 무소유를 실천하는 페루에겐 칼도 돈도 안 먹힌다.
마음을 아무리 읽어도 답이 없네. 인간이라면 칼이나 돈 둘 중 하나에는 마음이 흔들려야 정상이지. 나는 한껏 투덜거렸다.
“칼도 안 돼. 돈도 안 돼. 황금경이 뭘 해줬다고 그리 충성스러워요? 보아하니 월급도 안 주는 것 같구만.”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냐. 이 땅, 난 음식. 연금술이라는 진리. 열국의 모든 것은, 황금경으로부터 비롯된 것. 그분은 열국의 전부야….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정작 황금경 본인은 금국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걸 포함해서 열국이니까. 난관에 부딪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페루는 욕심이 없다. 문제는 이게 신앙이나 신념과는 달리,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결과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부스러뜨리는 페루에게는 소유한다는 개념이 희박하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보다, 타인에게 베풀어서 인망을 얻는 게 무조건 이득이다. 자칫 고유마도를 쓰면 자기가 가진 모든 건 휴지조각이 되니까.
인간의 사회성에 기댄 타당하고 합리적인 생존방식이다. 따라서 나는 저 방식을 부정하거나 바로잡을 수 없다. 즉, 현 상황에서 나는 페루를 설득할 능력이 없다.
“황금경이 뭐라고.”
내가 투덜거리던 때였다. 땅위에서 명백히 수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리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지만, 인기척은 이유도 없이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입구 쪽으로 향했다.
회귀자가 천앵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쳇! 네가 떠들어서 들켰나 봐!”
“이게 다 페루가 기침해서 그런 거예요! 앗, 설마! 기침도 여기 있다는 단서를 흘리려고 일부러!”
“…콜록. 기침은 너 때문에….”
“목소리는 너희 셋 다 내지 않았느냐?”
모두가 왁자지껄 떠들며 지상으로 통하는 구멍을 노려보았다. 입구는 흙과 잔디로 덮어놨지만, 자세히 살피면 발견 못할 것도 없다. 서로 굳은 얼굴로 의견을 교환하던 중, 입구 틈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똑똑똑~. 계세요~? 군국에서 온 평화사자 여러분~?”
힐데였다.
뭐, 나는 생각을 읽어서 알고 있었지만.
힐데는 자연스럽게 입구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태평한 얼굴을 본 회귀자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게 알고 찾은 거야?”
“여러분이 헤치고 나아간 옥수수가 나침반처럼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는걸요? ‘제’ 기초적인 추적술로도 눈에 뻔히 보일만큼! 너무 노골적이라, 도리어 가짜 흔적이 아닐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진짜 별 잡기술에 능하네.”
“대단하네, 라고 말하면 될 걸. 셰이는 솔직하지 못하네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거든!”
피식 웃은 힐데는 몸을 빙그르르 돌리고는 연극풍으로 말했다.
“그보다 여러분, 큰일났어요~. 황금경이 무기를 만들고 있지 뭐예요! 아무래도 진심으로 전쟁을 준비하려나 봐요!”
“무기?”
“네! 예를 들면, 이런 거!”
힐데는 살포시 웃으며 손을 입구 쪽으로 뻗었다. 바깥에 놔두고 온 무언가를 붙잡고는 힘껏 끌어내렸다. 흙더미가 무너지며 거친 금속 질감을 가진 갑옷이 끌려 내려왔다.
각반, 투구, 흉갑, 건틀릿까지. 부위별로 따로 만들어진 갑옷이 분리되어 땅을 굴렀다.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플레이트 아머네.”
“네! 전신 갑옷이네요! 어찌나 단단한지, ‘제’ 힘으로도 찌그러뜨리는 게 고작이었어요! 이토록 어마어마한 갑옷이 더 있을까!”
갑옷과 맨손의 싸움이라면 갑옷이 이기는 게 인지상정이나, 상대가 기공의 고수라면 다르다. 기공을 두르면 육체가 강철만큼이나 단단해지며, 철 내부에 기공을 침투시켜 파괴하는 기술도 있으니까.
그러니 경지에 이른 고수이자 군국의 최강전력인 육장성의 공격을 받고도 찌그러지는 게 고작이라면 저 갑옷은 세기의 보물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저런 갑옷이 흔할 리 없다. 질 좋은 연금강에 제련 기술까지 고려하면 한 벌을 만드는데 성 한 채 가격이 들어갈 것이다…만.
“이런 갑옷이 옥수수밭 옥수수처럼 늘어서 있지 뭐예요!”
연금술의 마신, 황금경에게는 옥수수 정도 되는 물건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옥수수보다 더 쉬울지도.
“이것뿐만 아니에요. 무기, 탈것. 하나같이 흉악한 물건이 바닥에 늘어져 있더라고요. 황금경은 이 옥수수밭 너머에 거대한 무기고를 만들 생각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무기를 쓸 일이 생긴 거겠죠?”
말할 것도 없다. 엘릭은 전쟁을 시작하겠노라고 선언했으니까.
힐데는 건틀릿을 들었다가 떨어뜨리며 회귀자를 추궁했다.
“저기, ‘우리’ 평화 협상을 하러 간 게 아니었나요?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군국의 평화 사절로서 간단하게 설명해주시겠어요?”
“그건 제가 설명할게요.”
회귀자는 처음부터 같이 있지 않았으니까 자초지종은 모를 거고. 대신 내가 황금궁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엘릭. 그에 동조하는 황금경. 잇달아 튀어나온 호문쿨루스들. 그리고 마지막에 찍었던 탈출극까지.
전부 들은 힐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아하하~. 역시, 휴전은 무리였으려나요~. 큰일이네요. 황금경이 지금부터 전쟁을 준비한다면 입안해둔 작전이 어그러지는데요?”
“작전?”
“네에~. 군국 통신병을 활용한 기동전. 회주들의 얕은 결속을 비집고 끊어서 혼란을 초래하고, 각지를 점령하여 최종적으로는 클라우디아까지 진군하는 거였는데~.”
포옥하고 한숨을 내쉰 힐데는 자기 머리카락을 꼬며 한탄했다.
“큰일이네요~. 황금경이 회주를 모은다면 열국 태세가 만만치 않겠죠. 이대로 전쟁이 벌어지면 완전 전면전. 군국과 열국 양측에 엄청나게 큰 손실이 생길 거예요. 하아. 이걸 어쩌죠?”
힐데의 말은 군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평화 사절이랍시고 보냈다가 골든 타임도 놓치고. 경각심까지 심어 넣었다. 힐데가 말로 하니 귀엽지, 이 손실을 수치로 따지면 어마어마할 것이다.
졸지에 구박당하는 신세가 된 회귀자는 말을 흐렸다.
“으…. 그건.”
“괜찮아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여러분! 여러분께는 이 커다란 실패를 무마할 방법이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힐데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언젠가 끝내야겠죠? 당연히, 압도적인 힘으로 빨리 끝내는 게 더 좋겠죠. 그래야 덜 죽고 덜 소모할 테니까요. 하지만, 군국의 전력은 셰이를 비롯한 여러분이 차근차근 깎아 먹었어요. 몇 안 되는 장점인 기동력도 여러분이 사령부에 칼 겨누고 협박한 바람에 잃어버렸고요.”
회귀자가 군국을 공격했던 건 어디까지나 혼돈의 시발점이 될 전쟁을 막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열국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면, 의도치는 않아도 열국 편을 든 거나 마찬가지.
이건 명백히 휴전을 빌미로 군국을 협박한 회귀자의 탓.
힐데는 그 점을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다만, 여러분이 참전해주신다면 밸런스가 맞겠네요!”
일을 벌였으면 책임을 지라고. 힐데는 웃는 얼굴로 회귀자를 압박했다.
“군국 측에서 참전해주세요. 잡다한 일은 할 필요 없고, 적장만 물리쳐주시면 돼요! 무리한 요구는 아니죠? 여러분은 군국에서도 총사를 포섭하고 과병을 물리쳤으니까, 오히려 공정한 행위죠! 열국 말로는 저울눈을 맞춘다고 해야 하나!”
힐데는 빚쟁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요구했다.
아무리 그래도 총사령부의 심장부에 칼을 겨누었던 회귀자다. 더 큰 목적이 있었다지만 군국에 개인적인 적대감이 없다면 공격한다는 방법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회귀자는 거부감을 느끼며 대꾸했다.
“군국의 군인이 되라고?”
“임관하라는 건 아니고, 용병으로 잠깐 들어오세요! 여러분의 힘과 군국의 작전이 합쳐지면 황금경이 이끄는 군단도 가뿐하게 격파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압도적인 힘으로 쟁취하는 빠른 종전이야말로 진정한 평화 아니겠어요?”
본색을 드러내자 더할 나위 없이 청산유수였다. 지금껏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왔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힐데는 처음부터 군국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했다. 평화 회담에 따라온 것도 회귀자가 휴전이랍시고 군국에 불리한 협정만 맺을까 봐 걱정되어서. 다만 누구보다도 군국의 이익에 민감해야 할 사람이 정작 방관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휴전 협정이 백지로 돌아간 지금에서야 드러났다.
“처음부터 그걸 노렸어?”
“노렸다고 하긴 좀 그렇죠? 모름지기 외교사절이라면 실패했을 경우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잖아요? ‘저’는 ‘제 의무’를 다했을 뿐이에요!”
‘사실 노렸죠! 군국 입장에서는 애매한 평화보다는 확실한 승리가 더 좋거든요! 더군다나 인간의 왕을 포섭하면 흡혈귀 여왕이 따라온다니까요? 완전 떨이잖아요!’
인간의 왕이 떨이 취급을 당하네. 뭐, 힘을 다 잃었으니 평범한 백성 1이긴 한데.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그 아래 깔린 의도가 노골적이다. 회귀자도 이제는 힐데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내가 너희 뜻대로 움직일 줄 알고?”
“책임 안 지고 도망치는 방법도 있어요! 몇만 명 죽어도 나 몰라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시도했는데 실패했으니까 안타까운 일이고. 뒷일은 너희가 알아서 하든가! 안면몰수하고 싹 떠나면 그만!”
말은 방법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무책임하고 뻔뻔한 인간이라고 아닌 척 비난하는 거다. 힐데가 말을 덧붙일 때마다 회귀자의 표정이 구겨졌다.
수틀리기 직전까지 한껏 비꼰 힐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하지만 셰이, 그래도 되겠어요? ‘당신’은 전쟁을 막아야 하지 않나요?”
둘의 시선이 부딪힌다. 회귀자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맹렬하게 노려보았으나, 힐데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제정신인 사람이 전쟁을 막겠다고 날뛸 리가. 순수하게 정신 나간 평화 바보가 아니라면, 셰이는 어떤 사명에 매인 몸이겠죠? 마치 옛날의 ‘저’처럼요. 그렇다면 일을 벌이고 무책임하게 떠날 리 없겠죠?’
제법이네, 힐데.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석해야 한다는 건가.
봐봐. 독심술 그다지 쓸모 없다니까? 같이 며칠 지낸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읽잖아.
조금만 더 같이 지내면 회귀자의 다른 비밀도 알아차리겠네. 조심하라고.
‘자아. 어떻게 하실 거죠? 더 알려주세요. 사명을 저버릴지, 아니면 싫어도 사명을 위해서 군국의 휘하로 들어올지. 꽤 궁금하네요!’
힐데가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회귀자는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군국은 싫어. 군국의 휘하로 들어가서 전쟁을 벌이라니, 절대 하고 싶지 않아. 해봤자 평범한 일반병을 학살하는 것뿐이잖아. 뒷맛 찝찝하다구.’
‘그래도 영궤의 말처럼 다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진 않아. 다음 회차를 위해서라도 이 결말을 봐야 해. 끝까지 간다면, 어떻게 가는 편이 좋을까.’
고민이 길지 않은 건 회귀자의 특징이다. 한 번 결정했다면 부러지기 전까지 전진한다. 다음 기회가 주어졌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이번에도 그랬다. 회귀자는 생각이 다 정리되기도 전에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네에?”
“휴전 협상.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게 억지란 건 알고 있어. 쉽지 않겠지.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성공할 수도 있어. 성공한다면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는 셈이야.’
이제 필요한 건 각오뿐. 회귀자는 천앵과 지잔을 꽉 움켜쥐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군국에 했던 것처럼, 목에 칼을 겨누고.”
캬.
감탄밖에 안 나온다. 저 미친 짓을 태연히, 진심으로 추진한다는 점이 존경스러워. 동경하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