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62)
진짜 황금을 녹인 듯한 찬란한 금발을 꽁지머리로 묶고, 하늘거리지 않게 착 달라붙는 옷으로 몸을 감쌌다. 가죽 장갑을 끼고 부츠를 신은 ‘엘릭’이 해체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지긋지긋하다. 네놈에게는 상식이라곤 없는가.”
‘…어? 황금회주?’
페루조차도 그리 여길 정도니, 호문쿨루스도 마찬가지겠지. 진짜와 다름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지 없는 호문쿨루스라면 더더욱.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쟁에 상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겠죠.”
“…흥. 입만 살았군. 다들 비켜라.”
‘엘릭’이 거칠게 손을 휘젓자, 그 앞에 있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길을 텄다. 빼곡히 선 병사들 사이로 사람 두 명이 지날 법한 길이 났다. ‘엘릭’은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그 길을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도 곧 뒤를 따랐다.
와중, 페루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경악했다.
‘…말도 안 돼. 침입자를 이리 쉽게 데려간다고? 그 황금회주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황금궁의 진의를 누가 알까. 독심술사인 나조차도 모르는데 말이다. 황금회주가 자기만의 생각이 있어서 나를 데려갈 가능성은 있지.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비합리적이다. 전쟁을 준비한다며 무기를 잔뜩 만들고, 무장한 호문쿨루스를 보내 싸우면서 동시에 적일지도 모르는 존재를 심장부로 데려가다니.
‘…설마?’
뒤늦게 눈치챈 모양이지만 이미 늦었다. 사열한 병사들 앞을 지나 진지 안에 도달한 우리는 이미….
“…폐하?”
황금경의 앞에 서 있었으니까.
황금경은 커다란 천막으로 들어가려는 도중이었다. 품에 커다란 종이를 안고 있는 것이, 지도 혹은 설계도 비슷한 걸 옮기는 모양이었다.
황금경은 와중에 천막과 우리 쪽을 번갈아 보며 황망한 얼굴을 했다.
“조금 전 천막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보다. 그자는 누구입니까?”
와중에 허리춤에 매달린 황금 종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다급한 소리를 낸다. ‘엘릭’의 시선이 잠시 그쪽을 향했다.
‘아버님이 말씀하신 황금 종. 저 사람이 황금경? 금국의 왕 엘릭을 사모한다는?’
‘엘릭’의 생각을 읽은 나는 작게 턱을 당겨 긍정의 표시를 했다. ‘엘릭’은 황금경과 그 주위를 빠르게 관찰하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흐음~. 황금경치고 너무 상큼하게 생기지 않았나요? 본모습이 아닌 것 같은데. ‘저’라도 왠지 약간 소름끼치는 기분이 드네요~.’
너도 이것저것으로 변신하곤 하잖아. 동족혐오 아니야?
나를 데려온 ‘엘릭’은, 당연하지만 힐데다. 나는 힐데에게 엘릭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그 모습으로 변신해달라고 주문했다. 황금경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힐데는 내 설명만 듣고는 엘릭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정작 힐데는 변신하면서도 캐릭터 해석이 안 되었다느니 투덜거렸지만, 뭐 어때. 황금경의 경계심만 흐리게 하면 돼.
힐데는 현재 상황과 황금경의 말을 맞추어 대사를 짜냈다.
“데모. 인사하거라. 네가 알아야 할 이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그…….”
‘엘릭’에 몰입하려던 힐데가 나를 가리키며 말을 골랐다.
‘아버님은 총애하는 제자를 앞둔 스승 느낌으로 연기해달라 했지만~. 역시, 직접 보지 않고는 제대로 따라 할 수 없는걸요? 임기응변에도 한계가 있다구요~.’
완벽하게 할 필요 없다니까. 아주 잠깐 경계심만 흐트려놓으면 돼. 내가 저 황금종을 소매치기할 때까지.
자. 빨리. 뭐라도 말해 봐! 조금이라도 황금경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게!
이윽고 컨셉을 정한 힐데가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 깍지 낀 손으로 어깨를 짚고, 내 팔을 자기 가슴에 묻었다. 머리를 내쪽으로 기울이면서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어, 잠깐.
힐데는 내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냈다.
“짐의 부군이 될 자이다.”
“…네에엣?! 무슨, 말도 안 되는!”
경계심을 없애라니까 더 늘리면 어떻게 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잖아! 무엇보다 그렇게 이질적인 대사를 하면 네 정체를 의심할 거 아니야!
철컥, 철컥. 그의 뒤로 황금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걸어 나왔다. 이 타이밍에 저 뜬끔없는 등장. 확실치는 않지만 황금경의 분노를 상징하는 존재인 듯하다. 여차하면 저 칼로 내 배를 가를 생각이겠지. 힐데. 나를 죽일 셈이야?
황금경은 눈에 불꽃이 튈 정도로 맹렬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곧장 부복하며 외쳤다.
“토,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어디서 온 지도 모를 뜨내기가 부군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정녕,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
‘엘릭’은 요망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몸으로 부드럽게 나를 밀며 마치 자랑하듯 볼을 비볐다. 황금경이 이를 악무는 가운데, ‘엘릭’은 이제 엘릭인지도 모를 표정으로 악마처럼 속삭였다.
“너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예?”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짐에게 어울리는 이는, 짐에 버금갈 정도로 고귀한 남자뿐이라는 것을. 헌데 세상 어떤 남자가 이 몸에 어울리겠느냐.”
호오. 그런 건가. 이제 힐데의 생각을 알겠다.
‘집착이 심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빼앗기는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뜻. 달콤한 꿈보다는 악몽이 더 잘 기억나는 법! 황금경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상황을 연기해볼까요!’
다른 의미의 완벽주의네. 어설프게 하느니, 원하는 방향과 반대더라도 완벽한 연기를 하겠다 이건가.
큭. 이건 예상하지 못했네. 예술성이란 어렵구나. 일단 쿵짝은 맞춰줄까. 금발 양아치처럼 ‘엘릭’의 허리춤을 노골적으로 주무르며 힐데처럼 연기했다.
“참. 제자 앞에서 너무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폐하도 짓궂으시군요.”
“아흣…. 그대만, 할까.”
신음을 토하는 ‘엘릭’은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보였다.
아니, 너무 과하게 연기하지 마. 농락하는 양아치도 아니고. 진짜 황금경에게 죽을 것 같다고. 내가!
그렇지만 덕분에 일단 의심은 거뒀다. 황금경은 지금 나를 증오할지언정 힐데를 의심하지 않고 있다. 좋아, 이대로 조금만 더 가까이 간다면….
“…황금경이시여. 그녀는 가짜입니다!”
그러나 황금경은 몰라도, 페루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페루는 이미 힐데의 변신 능력을 겪었으니.
“무어라…?”
“…속으시면 안 됩니다! 그녀는 황금회주로 변신한 타인입니다! 진짜 황금회주는, 저리 말하지 않습니다!”
페루는 황금경을 향해 진심어린 충언을 고했다. 황금경은 그제야 의심을 갖고 힐데를 보았다. 그러면 이제 다른 점이 확연하게 보인다.
왜냐면, 황금경은 엘릭을 ‘연금’할 수 있을 정도로 속속들이 아니까.
환상이 깨어진다. 아니, 덧씌워진다.
그의 엘릭은 그리 말하지 않는다.
그의 엘릭은 그리 행동하지 않는다.
그의 엘릭은, 다른 남자의 품 안에서 기뻐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건 가짜다.
쨍그랑, 하고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황금경의 옆 천막이 활짝 젖혀지며 진짜 엘릭이… 그걸 진짜라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엘릭이 뛰쳐나왔다.
“데모! 저건 짐이 아니다! 짐으로 변장한 가짜다!”
그러나… 황금경의 눈은 ‘엘릭’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황금경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기를 둘러싼 세상이 거짓이며,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이 진짜라는 걸. 그래서 처음 보는 ‘엘릭’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진짜 엘릭의 등장을 허락하지 않은 것을.
힐데의 엘릭 연기는 그만큼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황금경이 틀어박힌 세상에서 잠시 뛰쳐나올 정도로.
그래서… 아주 잠깐이지만. 생각이 읽혔다.
“네놈! 역시…!”
정신을 차린 황금경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가늘고 연약한 힘이 그를 잡아당기고 있다.
스페이드 9. 근원의 나무. 네비다를 보고 얻어낸 마신의 우상이자, 드루이드의 힘. 카드를 씨앗으로 삼고 자라난 덩굴이 황금경을 찰나 동안 붙잡았다. 금방 끊어졌지만 시간은 벌었다. 힐데는 그 찰나 동안 황금경의 병사들을 밀쳐내어 길을 텄다.
속임수로 한 걸음. 대지술로 한 걸음. 힐데와의 연기로 한 걸음. 그리고 나무 덩굴로 한 걸음.
하나하나는 사소하나, 모으고 모으면 황금경에게까지 닿는다.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은 덕에 이윽고 황금경에게 도달한 내 손에는….
맑은 소리를 내는 황금의 종이, 나와 공명하고 있었다.
모두가 금국을 위해서였다.
모두가 폐하를 위해서였다.
모두가… 철혈의 왕께서 어색하게 짓는 그 아름다운 미소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목에 칼을 차고, 발에는 족쇄를 맸다. 칼 끝에 매달린 묵직한 철구는 그 자체로 고통이었다. 철구를 든 팔이 빠질 듯했지만 놓을 수도 없다. 그랬다간 팔을 잡아 뜯는 이 무게는 그의 목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다.
날카로운 바늘이 등을 찌른다. 고통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데모는 탈진한 와중에도 고통을 피해 한 걸음 걸었다. 그러자 가시는 한 박자 늦게 데모를 쫓아와서 다시 찔렀다.
오직 인간에게 고통과 절망을 주기 위한 도구를 줄줄이 매단 채 데모는 맨발로 금국의 땅을 걸었다.
욕설이 들렸다. 돌이 날아왔다. 저주하며 달려들고, 단검을 휘두르며 습격해왔다. 그를 호송하던 병사들은 막는 척만 하면서 관망했고, 상처는 점차 늘어나 데모는 산 송장이나 마찬가지인 꼴이 되었다.
고통에 울부짖는 것도 잠시. 그도 다섯 시간이 넘어가자 이제 고통과 그를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어쩌면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고통과 함께했을지도 몰랐다.
편해지고 싶다.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차라리 죽어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러나 데모는 그걸 외면조차 할 수 없다.
찬란했던 금국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이 바로 그였으니까.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다지만, 돈이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 행복하기 위해선 일말의 여유가 필요하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그 여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단은 오직 돈뿐이다.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위해 데모는 황금을 만들었다. 온 나라가 행복해지도록.
그래야 하는데.
그가 알던 상식으로는 그게 맞는데.
데모는 침침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너진 성벽. 불타는 집. 흘러나오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다. 한때 금의 가치에 짓눌려 갈아엎어진 논밭을, 낡은 호미를 든 늙은 농부가 힘들게 일구고 있다. 그러나 쇠독에 절은 땅은 이미 임종을 맞이해, 정성스레 가꾸어 보아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길거리에 나앉은 거지들은 데모에 비교해봐도 더 나을 것 없었다. 갈라진 목으로 빈그릇을 내밀며 일말의 자비를 갈구한다. 그 그릇은 황금으로 만들었으나 한 끼 식사도 약속하지 못했다. 쌀 한 톨이 금편보다 귀하리라.
죽은 아이의 시체를 껴안은 채 통곡하는 어미는, 그걸 한때 자식이었던 존재로서 사랑하고 있을까, 아니면 몇 끼 분량의 식량으로서 사랑하고 있을까.
황금의 빈곤. 금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더욱 큰 문제는 해결할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래도 없다. 과거도 지워버렸다. 악마와 계약한 끝에, 찬란했던 한때를 대가로 영원을 팔아넘겼다.
금국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지옥이 되었다.
그리고, 이 지옥을 만든 건…황금을 만들어내는 연금술.
만일 그가 연금술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터. 자신의 위대한 발견이 악마의 지식이었다는 참혹한 진실은 그의 마음조차도 고통스럽게 했다.
퍽.
무언가가 데모의 관자놀이에 틀어박혔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휘청인다. 아프진 않다. 이미 기력이 다한 몸은 고통조차 만성적으로 받아들였다.
데모는 초점 없는 눈으로 자기를 때린 물건을 바라보았다. 무게에 비해 한참 작지만, 찬란하게 반짝이는 빛이 제 가치를 한껏 부풀리고 있다.
황금이다. 차마 다른 이름으로는 그 빛을 담기 어려워 제 색을 이름 붙인, 황금색 동전이 흙바닥 위를 데구르르 굴러갔다.
허탈하게 바라보는 그를 향해 피골이 상접한 여인이 다가와 소리쳤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황금이 이토록 필요 없던 것이었나. 저 굶주린 여인에게 한 끼 식사조차 되지 못하고 돌멩이 대신 던져졌다. 하물며 누군가에게 던지는 데에도 별로 유용하지 못하다. 차라리 모난 돌이라면 더 아팠을 텐데.
먹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할 황금. 한때 그 빛에 눈이 멀었으나… 지금은 땅을 좀먹는 쓰레기와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황금을 만들어내던 그는 지금껏 무엇을 만들었던 것인가. 모두를 부유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모두를 가난하게 만들고 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