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66)
무슨 소리를. 세상은 이야기도 아니고, 나도 작가가 아니야. 하물며 예언자는 더더욱 아니지.
황금경이 무엇인지, 어떻게 반응할지, 페루가 어떤 선택을 할지. 그 무엇도 미리 알진 않아.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생각도 안 해. 다만.
“힐데. 포커 해봤죠?”
“네에. 아버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알면 설명하기 편하겠네요. 힐데가 카드를 킵할 때 그게 무엇으로 메이드될지 알고 킵하진 않죠. 페어가 될지, 스트레이트가 될지, 플러시가 될지, 풀하우스가 될지. 아니면 그냥 아무런 의미 없는 패가 될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방해할 수도 있다. 황금경의 부하가 되어 우리를 공격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폭주하는 황금경으로부터 우리를 지켰을 수도 있지.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모른다. 그래도 확실한 것 하나.
페루는 그녀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행동했을 거다. 나는 그거면 충분했다.
힐데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응시보다는 관찰에 가까운 눈빛. 나라는 캐릭터를 해석하려는 연기자의 눈이다.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은 어느 정도 알겠는데, 아버님만은 도저히 알아낼 자신이 안 생겨요. 알고 싶은데. 인간의 왕을 제대로 파악하면, 다른 모든 인간을 연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아직 해석이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한참 고민하던 힐데는 문득 말했다.
“아버님은 바람을 이루어주려고 하시네요. 그게 무엇이든.”
“글쎄요?”
바람도 바람 나름이라서 말이야. 막 들어주면 안 된다고.
힐데는 몇 번이고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느닷없이 생뚱맞은 말을 꺼냈다.
“아버님. ‘저’는 말이죠. 하늘의 계시를 받았어요. 원견의 성검대주가 되어라. 그것이 너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다. 아무 목적도 없고, ‘저’ 자신조차 없이 살아가는 도중. 계시는 무엇보다도 명확하고 확실하게 ‘제’가 갈 길을 밝혀주었죠. 비록 잘 드는 칼 취급을 받았지만, 그것만이 ‘저’에게 주어진 길. 그 순간 ‘저’는 성녀를 지키는 성황청의 검이 되었어요.”
“우와. 대단하네요.”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요? 아니면 ‘저’에겐 그런 구원도 사치인 걸까요? 하필 ‘저’를 부른 성녀가 성황청에서 파문된, 소위 말하는 타락성녀라. ‘저’는 성녀님 대신 군국을 지키는 검이 되었어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상대가 누구든, 어떤 사정이 있든 상관않고 베어버리는 비정한 검이.”
가슴에 손을 얹고 가련한 얼굴로 독백한다. 호소력이 넘치는 목소리는 살짝 젖어 있어서, 감성이 메마른 사람에게도 스며들 것 같았다.
뭐야? 내 캐릭터를 해석하려다가 갑자기 왜 자기 캐릭터를 설명하고 있어?
“육장성인 ‘저’는 페루를 막아야 해요. 암살하든, 잠깐 묶어두든. 그래야…. 황금경이 열국을 멸망시키고, 그 결과 군국이 이득을 보니까요. 그러니, 아버님. ‘제’ 바람은….”
“라는 캐릭터, 잘 들었어요.”
이런 바람이 들어주면 안 되는 바람이지.
진짜인가, 거짓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힐데에겐 거짓이 진실이며 진실이 곧 거짓이니. 연기를 진심으로 믿는 순간 둘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미 그녀는 신앙조차 ‘연기’할 수 있으니.
물론, 힐데는 언제나 자신을 찾아줄 사람을 원했다. 내가 그녀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기준점이 될 존재의 닻을 내려주자 나를 따라왔다.
그러나 그건 ‘연기를 그만두고 싶어서’가 아니다.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신을 되찾고 싶어서도 아니다.
“참신한 생각이에요. 유일하게 떠오른 대항마를 결정적인 순간 암살, 더욱 커지는 혼란. 그 틈에 이득을 보는 군국. 오오오. 선역과 악역의 대립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대서사시로 모습을 바꾸었네요. 흥미로워. 일단 손뼉을 쳐줄게요.”
관객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관객은 그녀의 무대 밖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나처럼.
한참 손뼉을 치던 나는 태도를 바꾸어 실망스러운 눈길로 되물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 거예요? 그게 최선인가요?”
울먹이며 호소하던 힐데는 한순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물기가 글썽이던 눈동자는 장난기를 담고 반짝거렸고, 살짝 높아진 목소리는 울음이 아니라 흥분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 다 연기였다고 주장하듯, 힐데는 한층 장난스럽게 말했다.
“극적인 대신 현실성은 좀 떨어지죠? 헤헤. 맞아요! 폭주하는 황금경은 제압된 황금경보다 몇 배는 더 무시무시할 테니까요! ‘제’가 정녕 군국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제한적인 능력을 가진 페루가 승리하도록 만들어야죠! 황금경보다는 몇 배나 승산이 높으니까!”
그런 뒤 힐데는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되물었다.
“어때요, 아버님? 아버님 생각이랑 비슷하죠?”
“아니요? 저는 단순하게 누가 이길지 궁금해서 그랬던 건데. 서로 완벽히 대척하는 둘이 서로의 의지를 겨루어요. 지켜보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요?”
힐데는 배신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대답이 예상과 너무 동떨어졌던 탓이다. 힐데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행동을 돌이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버님의 성격은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어떤 존재인지는 약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왜 성황청에서는 아버님을 야만이라 규정하는지.’
날카로운 통찰이 읽힌다. 으음, 좀 파고들 여지를 많이 줬나? 어쩌면 내가 힐데를 너무 얕봤을지도.
‘인간의 왕은, 인간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군요. 그게 선이든, 악이든. 추잡한 욕망이든 숭고한 사명이든. 황금경과 페루처럼, 완전히 다른 둘이서 누군가 죽을 때까지 싸우더라도.’
괜찮아. 힐데가 나를 파악했듯이, 나도 힐데를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까.
그때였다. 저편에서 회귀자와 티르가 주변을 경계하며 다가왔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회귀자는 대로변에 널브러진 나와 힐데를 발견하고는 단숨에 다가왔다.
“전투 도중에 황금경의 호문쿨루스가 일제히 물러났어. 성공한 거지?”
아, 그게. 설명을 한 번 더 해야 하네. 좀 귀찮지만, 지금은 멱살 잡을 페루도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
“셰이 씨. 좋은 소식이 있고 나쁜 소식이 있어요.”
“…네가 나쁜 소식이라고 하니까 뭔가 불길한데. 무슨 사고라도 쳤어?”
어떻게 알았지?
뜨끔 놀란 가슴을 다독이며, 나는 아까보단 수월하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전했다.
나는 회귀자와 티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황금경을 설득하려고 시도했으나, 정작 그의 분노가 다른 곳으로 향했다고. 승냥이를 전부 죽이려는 그를 막기 위해 페루가 나섰다고.
한 번 더 멱살 잡힐 각오를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회귀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었다.
“뭐, 그럴 수 있어.”
“네? 그럴 수 있다고요?”
“모든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야. 황금경 같은 미지의 존재는 특히 그렇지.”
‘나도 이것저것 건드리다가 완전히 망가뜨린 적 있는데, 뭐. 군국을 막겠답시고 성황청의 힘을 빌려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가 세계 전쟁의 불씨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상하다. 페루나 힐데가 나를 보고 뭐라 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회귀자가 공감하니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게 느껴진다. 내가 회귀자 급이라고? 설마. 나는 쟤보단 평범하게 정상이라고! 그래야만 해!
한숨 돌린 회귀자는 대인배스럽게 나를 두둔했다.
“어쨌든 수고했어. 일단 전쟁은 막았네.”
“저 때문에 열국은 망하게 생겼는데요?”
“네가 멸망시키는 것도 아니고. 황금경이 하려는 거잖아? 너를 탓할 이유는 없지.”
‘황금경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건 죄악의 왕이나 가능한 일이니까. 어쨌든, 휴즈 녀석은 신비와 소통하는 능력이 있는 게 확실해졌네…. 군국 출신이라 했는데, 부모가 제국에서 버려진 황자라도 되나? 뭐, 출신은 별로 상관 없지만.’
왜 이러지. 적응 안 되게. 이러면 내가 쓰레기 같잖아.
대강 상황을 파악한 회귀자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러면 가자.”
“네? 어디로요?”
“황금경을 막으러 가야지? 열국이 망하게 둘 순 없잖아?”
회귀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당연한 문제는 아니다. 힐데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왜 열국이 망하면 안 되는지는 둘째치고, 황금경은 어떻게 막게요?”
“그건 가서 봐야지. 우리만으로는 못 막겠지만, 잔녹회주가 있다면 될지도 몰라.”
“페루는 ‘저희’를 돕지도 않았는데요? 괘씸한데, 목숨을 걸고 황금경을 막아줄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다고 그냥 둘 순 없잖아?”
“그냥 둬요! 저걸 왜 건드려!”
방방 뛰는 힐데를 무시한 채 회귀자는 진짜 갈 생각으로 몸을 풀었다.
잠시 몸을 추스르고, 어떻게 할지 대강 방향만 정하고. 회귀자는 천앵과 지잔을 다시 갈무리하며 눈을 돌렸다.
“가자. 안내는….”
주변을 살피던 회귀자는 옥수수밭 한가운데서 시작되는 대로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따로 필요하진 않겠네.”
황금경의 흔적을 찾긴 어렵지 않았다. 옥수수밭 한가운데 그를 향한, 아니, 그가 만들면서 간 길이 곧게 뻗어있었으니까.
힐데가 근처 승냥이의 마차를 빌렸다(고 주장했다). 말도 없이 바퀴에 몸체만 단 짐수레였으나 그거면 충분했다. 돛을 하나 달고 천앵으로 바람을 일으키자 힘은 그대로 속도로 치환되어 수레를 밀어냈다.
황금경이 만든 길에는 굴곡도 없고, 천앵의 힘으로 공기저항도 극복한다. 빠르게 옥수수밭을 벗어난 우리들은 저 먼발치에서 도시로 진입하는 황금경을 발견했다.
그리고 모두 말을 잃었다.
“도, 도망가!”
“신이시여…!”
저걸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황금경은… 그래, 마치 걸레 같았다. 더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러움을 닦아내어 보이지 않던 광경을 드러나게 해주는 의미로.
옥수수밭 옆 도시 안에는 승냥이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언젠가 떠나갈 승냥이들은 도시를 아껴 다루지는 않았다. 창문에 달린 잠금쇠나 문짝 경첩은 전부 뜯어서 팔아먹고, 쓰레기는 아무 데나 버리고, 필요하다면 벽이나 기둥을 무너뜨려 제 공간을 확보했다. 그래서 도시는 활기가 넘치면서도 지저분했다.
그 지저분함을 황금경이라는 걸레로 닦고 지나간다.
황금경이 행진할 때마다, 열국이라는 찌든 때가 벗겨진다. 한꺼풀 안에 숨겨졌던 찬란한 금국이 다시 색을 되찾는다. 널브러진 잔해가 다시 솟아오르며 번화한 거리로 거듭난다.
반경 500m가 일제히 금국으로 뒤덮인다. 황금경, 그건 500m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국가 전용 청소도구였다.
“으, 아아….”
…인간마저도 제거하는.
인간이 으스러지는 광경이 보인다. 승냥이들의 신체 일부는 황금경이 만든 작물로 채워져 있다. 그건 고품질의 연금물질이며, 황금경의 영향권에 닿은 순간 분해해서 재료로 쓸 수 있게 된다.
지금껏 황금경은 적극적으로 그들을 거두지 않았다. 억압회주가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기도 했지만, 황금경도 구태여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으니.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황금경은 승냥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도시가 움직인다. 도망치던 승냥이들은 경로가 막혀 멈칫한다. 시간이 끌리는 동안 황금경의 호문쿨루스가 무차별적으로 승냥이를 습격한다.
회주의 호문쿨루스로부터 도망칠 방법은 없다. 압도적인 힘에 승냥이가 도시째로 짓이겨진다. 그 와중에도, 도시는 원래보다 더욱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황금경이 인간을 배제한 채 더 아름답게 복원했기 때문에.
“모두! 이쪽으로 움직여라! 최대한 빨리 탈것에 올라타!”
억압회주 헥토가 넓적한 철판으로 목소리를 증폭시킨 채로 모두에게 알렸다. 승냥이는 그들의 힘인 기동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달아났다. 희생은 있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이도 많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황금경은 다음 수를 썼다.
도시가 살아있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두 다리로 뛰어 달아나던 한 승냥이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달리기엔 자신이 있는데, 자꾸만 다리가 무거워지고 심장은 터질 듯이 박동한다. 처음에 그는 두려움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하곤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넘어진 순간, 그는 몸의 피로가 단순히 기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미끄러진 것처럼, 그의 몸이 바닥을 긁으며 아래로 흘러내렸으니까. 그는 깨진 손톱으로 돌바닥을 할퀴며 중얼거렸다.
“도, 도시가…. 기울어지는….”
그는 그 말과 함께, 황금경에게로 ‘떨어졌다’.
이 도시는 황금경의 작품. 황금경은 도시에 숨어 사는 벌레들을 처리하기 위해 아주 간단한 방법을 썼다.
도시를 ‘접은’ 것이다.
마치 거대한 조개가 입을 다무는 것 같다. 비탈길이 된 거리를 미끄럼틀 삼아, 미처 도망가지 못한 승냥이들이 굴러떨어진다. 상당수는 벽을 발로 디디고 버텼지만, 그만큼 운이 좋지 못했던 몇몇은 그 전에 어딘가 부딪혀 죽었다. 혹은 황금경에게까지 굴러떨어져 그대로 ‘공명’당했고.
꽤 많은 수가 아직까진 살아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시간 문제였다. 도시가 입을 다물면 그들은 둘 중 하나의 죽음을 선택해야 하리라.
실족하거나, 공명하거나.
공포에 휩싸인 승냥이들이 소리쳤다.
“도와줘! 내가 가진 돈을 다 줄게!”
“살려주세요! 누구라도 좋으니, 여기서 꺼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