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380)
“그건 그래.”
“이 사람이?”
“그래도, 뭔가. 음….”
‘네가 껴있으면 묘하게 일이 잘 풀린단 말이야. 뭔가 미심쩍은 부분은 있지만, 그건 상관 없을 정도로 일이 수월해져. 끙. 이왕이면 같이 있는 게 마음 편한데.’
어? 알고 있었어?살짝 감동적이네. 평소에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아서 별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알아주는구나.
“그토록 저를 의지하고 있었어요? 흠, 어쩔 수 없죠. 만일 셰이 씨가 그렇게 원한다면 저도 곁에서 한 수 거들도록 할게요.”
나름 양보해주었는데 회귀자가 발끈해서 말했다.
“하? 그 정도는 아니거든? 애초에, 너는 싸움엔 도움이 안 된다고. 너는 협상 담당이지 전투 담당이 아니잖아!”
“협상 담당? 저는 그 역할이었나요?!”
“그러면 뭐라 생각했는데? 너는 말만 번드르르해서 여자를 꼬시거나 사람들을 움직이거나 했지, 직접 전투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진 않았잖아?”
거, 말 심하네! 내가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어왔는데!
지금까지는 회귀자나 티르처럼 다른 이들이 있었으니까 맡긴 거지, 나도 평범한 인간 수준의 힘을 쓸 순 있다고!
“쳇. 그러면 뇌신 사냥 혼자 잘 해보시던가요. 저는 여기서 편안하게 누워서 창문 밖으로 구경이나 하고 있을 테니까요.”
“흥.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잘 됐네. 대충 알리바이도 만들었으니, 그 시각에 움직이면 되겠다.
발소리를 쿵쿵 내면서 방으로 향하는데, 지켜보던 회귀자가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름 의지하고 있으니깐.”
“네? 뭐라고요?”
“아, 아무 말도 안 했어!”
‘저 자식, 귀도 밝네! 도대체 어떻게 들은 거야? 혼잣말이었는데!’
혼잣말은 혼자 하는 거고.
클라우디아의 아침은 물안개와 함께한다. 구름 폭포는 떨어지면서 클라우디아 상수원에 맺히지만, 일부는 가라앉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리 흩어진 수증기는 차가운 밤 중에 이슬로 맺히며, 아침 햇살이 그들을 깨우기 전까지는 대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구름이 되어 지상을 자욱이 메운다. 까다로운 인간들은 그건 구름이 아니라 물안개라고 정정하겠지만, 물방울 입장에서 무어라 부르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서로 함께 떠다닌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겠지.
쿠릉, 쿠릉, 쿠릉. 천둥이 연달아 세 번 울렸다. 클라우디아의 타종은 모아둔 천둥을 이용하는 것으로, 해가 뜨고 두 시간이 지났음을 알리고 있었다.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던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투덜거렸다.
“젠장. 누가 구름의 도시 아니랄까 봐 시간도 천둥소리로 알리네. 잠에서 못 깰 일은 없겠어.”
“멍, 멍. 깜짝 놀라! 멍!”
천둥 타종 때문에 진작 잠에서 깨어났던 나와 아지는 너 나 할 것 없이 투덜거렸다.
자욱한 물안개 때문에 태양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정오를 지나면 안개가 걷히고 좀 밝아진다지만 지금은 새벽과 별 다를 바 없다. 햇빛보다는 유리구 속에 담긴 벼락등불이 더 밝을 지경.이 탓에, 클라우디아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안개 낀 오전에는 건물 안에서 지내며, 제대로 된 일과는 오후부터 시작한다.
“비슷한 풍토라 그런가, 안개 공국과 사는 모습이 비슷하구나.”
티르가 자욱한 바깥을 보며 감상에 빠졌다.
“안개 공국에는 언제나 물안개가 가득하지. 대낮에도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니, 가증스런 햇빛도 우리에게 닿지 못한다.”
“그럴 만하죠. 클라우디아는 구름 폭포와 인접했다고 해도 바깥쪽에 있지만, 안개 공국은 구름 폭포를 가르고 그 안에 들어가야 나오는 땅이니까요.”
여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개 공국이 괜히 안개 공국일까. 이 구름 폭포를 지붕 삼아 언제나 그늘진 땅이라 흡혈귀도 대낮에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이 광경을 보니, 안개 공국에 충분히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구나….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 들리지 않겠느냐?”
“클라우디아에서의 일이 제대로 끝난다면 그럴 것 같네요.”
흡혈귀의 나라라. 나도 약간은 관심이 있다.한때 마신의 씨앗이었으나, 성황청의 칼날 아래 죽는 바람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비틀려버린 티르칸쟈카는 신(神) 대신 귀(鬼)가 되어 구천을 떠돌았다. 그녀의 힘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지 못하고, 대신 자신의 피를 나누어 흡혈귀라는 하나의 종을 만드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분명 인간이나, 평범한 짐승과는 너무 다른 생태를 갖게 된 새로운 종.
이쯤 되니 궁금하긴 하네. 성황청은 흡혈귀라는 종을 초래한 걸 후회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마신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으려나.아마, 후자인 것 같지만….
“휴.”
“네?”
티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 나긋하게 물었다.
“나의 나라에는, 네가 찾는 것이 있느냐?”
‘인간의 왕이,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그토록 찾아다니는 것이?’
말로는 표현하진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확신했네.
끙. 요즘 내 정체를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단 말이야. 개인 아지야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테니 논외지만, 힐데도 그렇고 티르도 그렇고. 거짓말이라고 해명해도 안 통하는 수준까지 왔다.어쩔 수 없나. 성황청과 연관되면 내 정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그나마 회귀자가 아직도 내 정체를 짐작 못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만일 밝혀지면 다음 회차는….
에라, 몰라. 신경 쓸 수 없는 건 신경 쓰지 말자.내가 인간의 왕이든, 아니든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어차피 나는 ‘평범’하니까. 내가 인간의 왕이라는 걸 자랑하지 않는 것도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흡혈귀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러느냐?”
‘평범한 인간은 흡혈귀를 두려워하지. 인간의 왕인 휴라면, 그들 모두를 대변할 테니….’
나쁘지 않은 추측이긴 한데, 꼭 그런 건 아니야. 흡혈귀도 일단 인간이긴 하거든. 다만.
“제 입장에서는 다른 흡혈귀보다는 티르가 훨씬 편하고 친근해요.”
“내, 내가 말이냐?”
티르는 정말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성황청의 숙적인 시조로 군림하며, 뭇 인간의 두려움이 되었던 그녀는 편하고 친근하다는 단어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딱히 즐기지는 않았다고 해도, 죽음과 살육은 그녀의 곁에서 빈번히 벌어지는 일상이었다.그래도, 그조차 인간적이다.
다른 흡혈귀에 비하면.
“다른 흡혈귀들에게는 그들의 주인이 있어서요. 왕이라고 할까, 그들의 바람이자 지배자인 상위 흡혈귀가 있는 이상 제가 뭘 할 수가 없거든요.”
상위 흡혈귀가 하위 흡혈귀에게 가하는 지배력은 절대적이다. 중력에 얽매인 인간이 대지에 의존하듯, 전신의 피를 전부 끌어당기는 그 감각은 단순한 존경이나 충성과는 궤를 달리한다. 지배와 종속에 가까우나, 꼭두각시조차 아니라서 더욱 악질적이다. 종속에 가까운 의존이라고 할까.
그래서 흡혈귀의 생각은 쉽게 바뀐다. 내가 아무리 잘 양념해두고 관계를 쌓아 놨다고 해도, 보다 상위의 흡혈귀가 한마디 한다면 그 생각이 통째로 바뀔 수 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굳게 믿어왔던 자신의 바람마저도 한순간에 휘어지니.
나는 흡혈귀에게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줄 수 없기에,
“그렇지만 티르는 시조지만 온전한 인간이고, 자신만의 바람을 갖고 있으니까요. 저는 티르 쪽이 몇 배는 더 편해요.”
그런 의미에서, 흡혈귀의 시조는 평범하니까. 천여 년을 살아왔을지언정 자신의 바람이니까.
‘…내가, 인간이라. 다른 이라면 입에 발린 말이라 치부하겠으나… 인간의 왕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감회가 남다르구나.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들이 그래서 인간의 왕을 찾아다니는 걸까….’
티르는 시선을 조금 방황시키며 괜히 헛기침을 했다.
“어흠, 편하다니. 첫 만남 때부터 무례했던 것도 그 때문이더냐?”
“무례하다뇨. 마치 제가 예의도 모르는 야만인 같잖아요. 친근하다고 표현해주시겠어요?”
“그래. 첫 만남 때부터 예의도 없이 친근했지. 덕분에 우리가 더 빨리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네 무례함 덕을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셰이 씨 덕이 더 크죠. 티르가 계속 지하 무기고 문을 봉인한 채로 쿨쿨 자고 있었으면 서로 대화할 일도 없었을걸요.”
“그 말도 맞구나. 따지고 보면 전부 셰이가 일을 벌인 덕분이니. 고마워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작게 웃은 티르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우레바퀴는 너무 거대해서 안개 속에서도 거대한 윤곽을 내보이고 있다. 천천히 돌아가는 우레바퀴에서 인위적인 벼락이 번뜩인다.슬슬 뇌신을 죽일 준비가 끝났나 보다.
“헌데, 휴. 천신의 종인 뇌신이 인간에게 굴복하는 진귀한 광경인데 정녕 보러 가지 않겠느냐?”
‘내가 아는 휴라면 이런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을 터인데.’
그게 진짜라면 옥수수를 튀겨서라도 찾아가서 관람하지. 천신과 척을 진 티르가 아니라도 구경할 가치는 충분할 테니까. 하지만 뭔가가 걸려서 말이야.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쉴게요.”
“알겠다. 쉬고 있거라.”
‘또 우리 몰래 무언가를 하려나 보구나. 무얼 하든 도와줄 터인데도 속내를 밝히지 않는 건 아쉬우나, 원한다면 굳이 캐묻지는 않겠다.’
벌써 들켰어? 요즘 너무 원패턴이었나? 언제나 내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티르라면 눈치채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리고, 나 역시. 말하지 않은 일이 있으니.’
티르는 구름 폭포 쪽을 흘긋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클라우디아의 시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들어요. 그대들이 알아야 할 내용이 있어요.
안개가 채 다 걷히기 전 클라우디아에 우레회주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위대한 우레회주의 연설에 클라우디아의 시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우레회주는 이들이 충분히 집중하기를 기다리다가 말했다.
-황금경이 질주를 멈추었어요.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그 말뜻을 뒤늦게 알아차린 시민들은 경악했다.클라우디아가 열국 제일의 도시인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우레의 힘으로 번성한 덕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열국 유일의 정주 도시인 게 가장 큰 이유다. 황금경이 땅을 배회하는 열국에서 유일하게 황금경이 발을 디디지 않는 땅이니 연금술의 정수를 땅에 쌓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황금경이 멈추었다면, 클라우디아는 더 이상 열국 유일의 정주도시가 아니게 된다.
-몇몇 용감한 회주와 타국에서 온 귀인이 그를 멈추어 세웠죠. 덕분에, 열국은 이제 그로부터 자유로워요.
황금경이 사라졌다, 라고 표현하지 않은 건 민심이 너무 크게 요동치지 않게 하려는 이유일 테지. 어쨌든 열국은 황금경의 힘으로 먹고 살던 곳이었으니.
-이제 열국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올 거예요. 아래로는 황금경에, 위로는 뇌신에 눌려서 세를 펼치지 못하고 있던 클라우디아도 족쇄를 끊고 나아갈 차례에요.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우레회주는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 열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우레회주는 완벽한 존재고, 그런 존재에게는 거짓말처럼 하찮은 방도 따윈 필요하지 않다.
-황금경을 멈춘 이들의 힘을 빌려, 뇌신과의 악연을 끊겠어요. 클라우디아의 미래를 위해.
그제야 클라우디아의 주민들은 우레회주의 큰 뜻을 알아차리고는 환호했다.
연설을 마친 우레회주는 몸을 돌려 걸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우레 수호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우레회주 만큼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 벼락의 힘을 다루는 이들. 뇌신과 싸울 때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들 대다수가 출동한 상태였다.
‘일이 생각보다 커졌잖아. 이전 회차에서 뇌신을 죽일 때, 비밀로 하고 조용히 처리했는데. 뭐지?’
예상에서 벗어난 상황에 회귀자는 의문을 표시했다.
“…그, 너무 거창하게 일을 벌이는 거 아니야? 조용히 뇌신만 잡을 수도 있는데.”
우레회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답했다.
“평소라면 그랬겠지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황금경이 사라진 충격은 언젠가 찾아오기 마련이에요. 평범한 인간들은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지금 미리 일부 알려서 나중에 올 혼란을 최소화해야 해요.”
“아, 그런가. 황금경 때문에.”
‘왜 전 회차와 반응이 다른가 했더니, 황금경이 사라져서 그런 거였구나. 이번 회차는 정말 많은 부분이 달라졌네. 하긴… 마신을 없앴으니까.’
새삼스레 자기가 한 일을 떠올리고는 조그맣게 뿌듯해한다. 아직 남은 일이 많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나아가는 모습에 나름의 만족감을 느꼈다.
“당신도 채비해야 해요, 황금회주. 능력을 지닌 당신은 저와 같이 모두를 이끌어야 하기에. 이번 일은, 그 첫걸음이 될 거예요.”
“…네.”
조금 뒤처져 있던 페루가 이를 악물고 나란히 섰다. 그녀의 힘없는 걸음걸이를 바라보던 우레회주는 약간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색이 좋지 않군요. 모두를 이끌어야 할 이가 몸이 약해서는 곤란한데.”
“걱정하지 마. 저건 황금경을 무찌르면서 생긴 문제니까 치료할 수 있어. 해결방법을 찾아볼게.”
“그렇다면야 안심이네요. 일단, 눈앞에 일어날 일에 집중하도록 할까요.”
두 명의 회주와 한 명의 회귀자는 뇌신을 죽이기 위해 피뢰탑으로 향했다. 뇌신에 대한 공포를 상징하는 우상이자, 뇌신을 극복할 수 있는 구조물. 피뢰탑에서 뇌신과의 악연을 끊기 위해.
그들이 떠나고 난 빈자리.
나는 피뢰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피뢰탑. 높이만 50m에 이르는 초거대 구조물. 단순히 벼락을 받아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내부에는 벼락을 이용한 시설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우레회주는 농장을 안내해줬지만 다른 것도 많다. 수확한 농작물을 가공하는 제분소. 강철에 벼락을 깃들게 하는 제련소. 그걸 이용해 여러가지 도구를 만드는 시설 등등.그렇게 피뢰탑에서 생산된 자원은 그 아래로 뻗어나간다. 자원만은 풍족한 덕분에, 일할 사람만 있다면 클라우디아는 멀쩡하게 돌아간다. 열국의 황야를 떠돌기보다 훨씬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기에 힘없는 승냥이들은 클라우디아에 살기를 희망한다.
다만 우레회주가 아이를 가진 승냥이만 받아들이는 탓에, 클라우디아는 기댈 곳 없는 신혼부부나 아이를 가진 여자로 가득 찼다. 그들조차 아이가 다 자라면 떠나야 하고.
도시는 융성하나, 대부분은 언젠가 이곳을 떠날 이들.그 속에, 떠나지 않는 이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