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40)
EP.40 집에 들어오면 손발을 깨끗하게 씻도록 해요
아주 다행스럽게도, 회귀자는 누군가를 처형하기 전에 한마디 듣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죽이기 전에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서 들인 습관이지만 어쨌든, 최후변론 시간이라도 주는 건 다행이었다. 회귀자가 군국보다는 낫구나.
자초지종을 들은 회귀자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이었다. 위협적으로 천앵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와 아지를 번갈아보았다.
“그러니까, 아지가 더러워서 씻기려고 했다. 그 뜻이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좀 보세요. 욕조로 쓸 상자와 호스, 비누까지 들고 물탱크 옆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게 목욕이 아니면 뭐겠어요?”
“글쎄?”
혐의가 조금은 풀렸는지, 회귀자는 천앵을 다시 머리 위에 띄워놓고는 팔짱을 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이 남아있었다.
“그것을 구실로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지.”
“뭐? 아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의심은 참을 수 없다. 나는 발끈해서 아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을 꾹 감고 있던 아지는, 내 손길이 사라지자 귀를 쫑긋 세우고는 실눈을 떴다.
“갈(喝)! 비록 짧고 모자란 생각으로 인한 지리멸렬한 오해라고 하더라도 정도가 있지! 저는 인간, 만물의 영장! 비록 지금 땅속에 처박혀있다고 한들 짐승 따위에게 눈을 준다? 어림도 없다! 학교에 가서 영장류와 개의 차이에 대해 더 공부하고 오도록 해!”
“멍? 나, 안 씻어?”
“아니. 오늘 무조건 씻을 거야. 기다려. 내가 하늘이 무너지고 무저갱에 빠져도 너는 꼭 씻기고 만다.”
“끼잉….”
귀와 꼬리가 착 가라앉는 아지를 뒤로 하고 회귀자를 향해 따졌다.
“그러면 어쩌게요? 나한테 아지를 못 맡기겠다고 하면, 셰이 교육생이 씻기기라도 할 겁니까?”
회귀자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꼭 씻겨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할게.”
“댁은 되는데 왜 내가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너는 남자고, 아지는 여자잖아. 네가 옷을 벗기고 아지를… 크흠, 그런 건 애먼 생각이 없다고 해도 안 되지! 불순하잖아!”
도대체 이 회귀자는 머리에 무엇이 들었기에 평소에 이딴 생각만 하고 사는 걸가? 내가 언제 엄한 생각을 했다고? 나는 단 한 번도….
어. 음.
그런 생각이 아주, 섬광처럼 잠깐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인간이란 가끔 충동적이고 원초적인 욕구에 휘둘리는 경향도 있으니. 사람을 볼 일이 없는 외딴 곳의 양치기들은, 가끔 말로는 차마 표현하기 힘든 미친 짓을 저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성으로 본능을 극복하기에 비로소 인간. 잠깐의 흔들림이 나를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셰이 교육생, 혹시 아지를 성적으로 의식하고 있습니까?”
“뭐? 무슨 소리야.”
“의식 안 해요? 아지가 찰싹 달라붙어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요? 반쯤 헐벗고 있어도 신경도 안 쓰여요?”
“당연하지.”
“그러면 당신이 아지를 씻겨도 아무런 잡념 없이 일을 끝마칠 수 있겠네요?”
“물론이야.”
“셰이 교육생은 그러할진대, 왜 저는 그러지 못하리라 생각합니까?”
“그야….”
‘그야. 너는 남자고 나는…. 아차. 맞다. 나 지금 남장 중이었어!’
어?
그러게? 너, 남장하고 있었잖아.
나조차도 잠깐 까먹고 있었다. 정작 너도 까먹으면 어떻게 해. 그럴거면 도대체 왜 남장을 한 거니…. 에휴, 말을 말자.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하니, 감옥에서 ‘엄한 짓’이라도 당할까 봐 남장한 거지. 쯧쯧, 자의식은.
어, 잠깐만. 남장이라. 아까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는데….
이건 써먹을 수 있을지도.
자가당착에 빠진 회귀자를 향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당신, 지금 대단히 수상한 거 아십니까? 조금 전까지 성실하고 무고한 사람을 고작 남자라는 이유로 그렇게 몰아 세워놓고, 정작 똑같은 남자인 당신이 아지랑 씻겠다고요? 이거, 의도가 불순한데요.”
“아니야! 내가 아지와 씻겠다고 말한 적은 없잖아!”
“그러면요? 남자인 제가 아지를 씻기는 건 불순하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자기는 아무런 잡념도 없다고 하고. 그게 말이 돼요? 와, 이거 완전 내가 하면 종족조차 뛰어넘은 로맨스고 남이 하면 수간 아니에요? 이 정도면 무섭네.”
“수간이라니! 아지는 여자잖아!”
회귀자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변명했으나, 그건 악수였다. 나는 커다랗게 충격이라도 받은 척,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그러면 아지를 여자로 사랑할 자신이 있으니 내 사랑은 진짜 사랑이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나의 어루만짐은 그저 추행일 뿐이다? 어라? 뭐가 이상하지 않아요? 감정을 담은 접촉이 더 불건전한 게 당연하잖아?”
“그런 말은 안 했어!”
“뭐가 달라! 당신과 나는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잖아! 그런데 나보고는 불순하다며 막아놓고는, 자기는 괜찮아? 자기가 생각해도 뭔가 논리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아?”
“으윽…!”
후. 중등학교에서 군국 교양서 ‘논리여 놀자꾸나’를 독파한 경험이 빛을 발하는군.
나의 완벽한 논리에 논파당한 회귀자는 이를 악물었다.
‘이익…! 어째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렇게 얄미울 수가 있지…!’
왜 얄밉냐면, 네 논리가 나의 것에 비해 지리멸렬하기 때문이겠지. 원래 사람이란 항거할 수 없는 강자에게 시기와 질투를 하기 마련. 폭풍과도 같은 나의 논리에 빠져 익사해라.
“하하!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자승자박이야! 네가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너는 네가 펼친 논리에 먹혀 사라진다! 크하하하하, 어디 더 지껄여 보시지!”
“그러면!”
궁지에 몰린 회귀자는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마치 비장의 한 수라도 되는 듯이 소리쳤다.
“그렇다면 확실한 여자한테 맡기면 되잖아!”
“엉?”
회귀자의 생각을 읽은 나는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나보고 개의 왕을 씻기라는 말이냐?”
회귀자로부터 자초지종 설명을 들은 흡혈귀는 고운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막상 흡혈귀를 데려온 회귀자는 말하면서도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어, 음. 하지만, 부탁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그렇다고 티르칸쟈카에게 이런 잡일을 부탁하는 건 너무 무리한 이야기였나…?’
나한테 지기 싫어서 흡혈귀를 불러왔지만, 상대는 1200년을 살아온 흡혈귀이자 한때 세상을 반쯤 지배했던 그림자의 여왕이다. 그런 그녀를 시녀처럼 부려먹으려고 하다니.
응석일까, 아니면 교만일까.
흡혈귀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나를 이 옥상까지 부른 이유가, 그게 끝이더냐?”
“으….”
크크크. 꼴 좋다. 회귀자. 세상 뜻대로 안 되지? 거기에 하나 더 얹어줄까?
필살, 부추기는 시누이!
나는 흡혈귀 옆에 붙어서는 간신배처럼 속삭였다.
“세상에. 그렇대요.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녀석이 감히 어른 보고 일 시키려고 한다니까요? 그것도 더러운 개 씻기는 일을!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죠?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배분이라면 진지 드실 때 옆에 공손히 앉아서 숟가락질을 대신에 해줘도 모자라는데, 아니! 대신 씹어서 넘겨줘도 모자랄 판에 일을 시켜? 저저 건방진, 한 대 쥐어 박아주세요. 끄악!”
왜 나를?!
허공에 생겨난 핏빛 주먹이 내 머리를 가볍게 치고 지나갔다. 땅에 주저앉은 나를 향해 흡혈귀가 한 줄기 시선을 던졌다.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건방지다고 한들, 그럼에도 나의 제자다. 아무것도 아닌 네놈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끄으으으….”
“엄살은 그만 부려라. 살살 때렸으니.”
살살? 살을 파내겠다는 게 아니라?
별다른 적의도 안 느껴져서 한 대 맞아줬는데 과하게 아프잖아! 하긴 총에 맞아도 신기하구나, 하고 넘어가는데 평범한 인간의 고통을 알 리가. 흡혈귀는 인간의 아픔을 모른다. 앞으로는 이놈들이 살살 때리겠다는 생각 절대로 믿지 말아야겠다.
흡혈귀의 시선은 이제 회귀자를 향했다. 회귀자는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쯧. 그래. 응석을 부리는 게로구나. 더 따져서 무얼 할까.’
마음을 조금 풀은 흡혈귀가 조용히 회귀자를 타일렀다.
“그리고 셰이, 네 주제넘은 행동과는 별개로, 나는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없겠구나.”
“앗, 그. 미안. 내가 너무….”
“아니. 능력의 문제이다. 나에게는 개의 왕을 씻길 능력이 없다.”
흡혈귀가 관에서 내려와 아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언제나처럼 나긋하게, 한 줌의 적의를 지니지 않고. 그저 오연하게 땅 위를 걸어왔다.
“개의 왕은 나에게 몸을 맡기지 않을 터이니.”
그리고 아지가 반응했다.
나와 회귀자가 있을 때는 불편하더라도 싫은 티를 내지 않는 아지였다. 내가 품 안에 가둔 채 물을 틀었을 때도, 회귀자가 나를 막을 때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아지다.
그러나 흡혈귀가 가까워지자 불편한 듯이 움찔거렸다. 물을 묻히겠다는 협박 속에서도 나나 회귀자 곁에 있던 아지인데, 흡혈귀가 다가올수록 볼을 씰룩이며 이빨을 드러냈다.
아지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흡혈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나는 살아있는 자가 아니니. 개의 왕은 나에게 아무런 호의를 느끼지 못한다. 인간의 벗이며, 스스로 길이 든 짐승의 왕께서는 심기가 불편하실 때도 너희들에게는 언제 어느 때나 여전한 호의를 보일 터이지만.”
크르릉.
낮은 울음소리. 자신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리며,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하울링. 나에게 보였던 투정과는 질적으로 다른, 야생적인 의사의 표현이었다.
“시체인 나에게까지 그러하지는 않겠지.”
흡혈귀는 잠시 아지를 마주하다가 몸을 휙 돌렸다. 그러자 아지의 으르렁거림도 잦아졌다. 사박사박. 무게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흐릿한 걸음으로 흡혈귀는 차갑고 외롭게 걸어갔다.
“옛날 옛적, 인간의 손을 탄 짐승의 왕들은 흡혈귀의 가장 큰 적이었지. 태양 아래서도 제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엘더도 짐승의 왕 앞에서 정체를 숨기지 못했어. 그중에서도, 오직 인간에게만 호의적인 개의 왕은 가장 큰 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공격하지는 않으나, 흡혈귀에게는 거리낌 없이 적의를 내뱉고는 했지.”
아지는 흡혈귀가 멀어지자 관심을 끄고는 다시 앉았다. 조금 먼발치에서 몸을 돌린 흡혈귀는, 조금 쓸쓸한 목소리로 단념했다.
“이번 대의 왕이라도 마찬가지구나. 이제 알았다면, 나의 도움이 왜 무용한지 알겠지.”
“어….”
그 단념 속에 있는, 세월로부터 박리된 이의 읊조림은 담담하여 더 서글펐다. 회귀자는 어찌할 도리를 모르고 우물쭈물거렸다.
‘나 때문이야. 괜히 저 남자에게 도발당해서 티르칸쟈카를 데려와서…. 아직 티르칸쟈카에게 도움받을 게 많은데 마음을 상하게 해버렸어.’
이 와중에 내 탓을 하는 게 어이가 없네…. 도발? 도발에 당한 사람이 잘못이지. 누가 그렇게 발화점이 낮으래?
회귀자가 나를 원망스럽게 흘겨보고는 흡혈귀를 향해 다가갔다.
“저, 티르칸쟈카.”
“무얼. 이 스승에게 더 시킬 게 남아있느냐?”
흡혈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으나, 그렇기에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회귀자는 마땅히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는 말을 삼켰다. 결국, 이럴 때 회귀자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할 말이 없을 때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사과였다.
“티르칸쟈카. 미안….”
“어허.”
하지만 그건 오답이다. 사과는 마음의 반창고다. 상대 마음에 난 상처와 나 사이에 벽을 하나 세우는 행위.
쯧, 조금 놀렸다고 자폭하다니. 이래서야 놀리는 보람도 없다. 13번 회귀하면서 다른 건 다 배워도 사교성은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조금만 도와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