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47)
EP.47 비팅포유
“…미리 말하건대, 네가 무슨 파렴치한 짓을 하려거든 그건 심장을 되살린 이후이다. 섣불리 몸에 손을 댔다간….”
“뭔 소리야. 심장에다가 전기 마사지를 해야 하니까 가슴을, 그러니까 살을 잘라서 열라고요. 제가 꼬챙이로 가슴을 가르는 것보다는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스스로 풀어헤치는 편이 훨씬 편하잖아요. 흡혈귀니까.”
내가 빤히 보며 반문하자, 흡혈귀는 뒤늦게 내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민망해하며 가슴께를 쥐었다.
“가슴…. 아. 그렇…겠구나.”
요즘 들어 사람들이 애먼 상상만 해서 곤란하다. 보여준다면야 냉큼 보겠지만, 그러면 나 죽일 거잖아.
미안한데 나는 다른 것보다 목숨이 두 배는 소중하다.
“…그, 그래. 그도 심장을 드러냈으니, 나 역시 그리해야겠지.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흡혈귀는 검지손가락으로 자기 가슴골을 따라 그었다. 새카만 드레스의 한가운데 한 줄기 혈선이 생기더니, 흰 가슴팍이 양옆으로 벌어지며 안에 있던 피륙이 드러났다.
몸을 감싼 새하얀 포장지는 쉬이 시선을 떼기 힘들 정도로 깨끗하고 매끄럽다. 그러나 그보다 고작 한 꺼풀 안쪽에는 아무리 비위 좋은 사람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광경이 있다. 피거품이 들끓고 근막이 꿈틀거리며 새하얀 뼈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몸 안쪽.
“…자. 잘 보이느냐?”
옷을 벗은 맨몸은 보이는 사람의 부끄러움이나, 그보다 더 안쪽으로 가면 꺼림칙함은 보는 사람에게로 넘어간다. 극단으로 치달으면 관계가 역전된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가슴을 만지작거릴 때만 해도 꺼림칙해하던 흡혈귀가 피부 안쪽을 내보이자 이제는 내가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다.
자기 맨가슴 드러내는 건 부끄러워하면서 왜 그 안쪽을 드러내는 것에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을까? 이 무슨 아이러니….
아니, 평범한가? 나라도 ‘피부를 벗고 심장 보여줄래, 옷을 벗고 맨몸 보여줄래?’ 양자택일을 시키면 맨몸 보여준다. 안 죽는 흡혈귀라서 자기 가슴을 가른 채 수술대 위에 눕기까지 하는 거지.
“자아. 다 끝냈다.”
흡혈귀가 자기 가슴을 들춰 보이며 말했다. 잘린 살 틈으로 새빨간 근육과 울렁거리는 핏물이 보인다.
아무래도 우리는 수치심 이전에 인간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 나는 새삼 눈앞의 소녀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존재인지 되새겼다.
“제가 오늘 분명 심장 드러내지 말라고 했는데.”
“네, 네녀석이 시키지 않았느냐. 나도 이런 꼴을 원한 건 아니다.”
“다시 강조하는데, 저 말고는 진짜 아무에게도 보이면 안 됩니다. 솔직히 저한테도 안 보여줬으면 하지만요. 우엑. 징그러.”
“잡설은 되었다! 그래서? 되겠느냐?”
“한번 보고요. 어디.”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검지손가락을 좁은 균열 안으로 집어넣으며 마법을 사용했다.
“럭스.”
손가락에서 한층 강렬한 빛이 번쩍인다. 나는 발광하는 손가락을 흡혈귀의 가슴 안쪽에 들이밀었다. 검붉은 어둠 속을 헤치며 빛나는 손가락이 흡혈귀의 몸 더욱 안쪽을 비추었다.
흡혈귀는 내 손길을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기하게도, 이런 꼴을 하고 있는데 그다지 부끄럽지 않구나….’
이게 부끄러우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거지. 그래도 걱정마시라. 댁의 부끄러움은 나의 메스꺼움으로 대체되었으니. 우웨엑.
“그, 저. 안에 있는 피 좀 치워주세요. 잘 안 보여요.”
“아, 그러하구나.”
그러자 빛이 닿는 범위에서 붉은 피가 벌레떼처럼 사방팔방 흩어진다. 스스로 가슴을 가르며 잘 보이게 피도 치워주는 환자라니 모범적이라고 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우욱. 핏기도 사라지니까 모양이 더 잘 보여서…. 참자.
어쨌건, 환자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도움 덕분에 나는 금방 흡혈귀의 심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람 빠진 허파 뒤쪽으로 미동도 안 하는 심장이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톡, 하고 손가락에 심장이 닿았다.
“윽.”
별의별 경험을 다 해보았으나 아무리 그래도 자기 심장까지 만져진 적은 없는 흡혈귀였다. 생소하면서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촉감에 흡혈귀는 크게 반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솔직히 심장을 직접 만지는 입장에서는 뭘 느끼고 싶지도 없다. 나는 계속 심장에 마력을 살짝살짝 흘려보내며 가능성을 재보았다.
으음. 이거.
심장을 툭툭 건들며 한참을 가늠하던 나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다.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되겠네요.”
나의 담백한 선언에 흡혈귀의 붉은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다.
“안…돼? 안 된다고?”
“네.”
“정녕,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냐?”
“네. 안 돼요.”
흡혈귀는 절망했다.
물론, 그렇다고 심장이 움직이는 일은 없다. 이토록 커다란 낙담조차도 심장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했으니. 그렇기에, 흡혈귀는 비원이 수포로 돌아간 이 시점에도 냉철하게 나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심장에 손가락을 댄 채로 말했다.
“애초에 라쉬 교육생과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주어진 상황이 달라요. 라쉬 교육생은 가사 상태라 심장이 멈췄던 거였죠. 그는 불사자이고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사람과 다르지만, 몸이 움직이는 원리는 똑같아요. 그에 반해.”
톡. 흡혈귀의 심장을 두 손가락으로 살짝 꼬집는다. 흡혈귀는 소스라치게 놀라 움찔했으나, 정작 내 손가락에 닿은 심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닿지 않아도 움직여야 하건만, 이미 역할을 잃은 심장은 상징으로만 남았다.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혈조술로 피를 움직이고 있잖아요. 가슴을 풀어헤친 지금 이 순간조차도.”
평범한 사람은 자기 가슴을 열지 못한다. 살을 들어내어 안쪽을 보여주면서도 피 한 방울도 흐르지 않도록 잡아채지 못한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바란다고 한들, 피가 전부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호흡조차 필요 없다. 피를 몸 밖으로 빼내어 공기 중에 흩뿌린 다음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게 시조 티르칸쟈카이니.
“아까 화로에 불을 지펴달라고 하셨죠? 아니에요. 비유하자면,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아궁이가 아니라 물레방아에요. 장작을 넣고 불을 당겨, 타오르는 삶을 사는 게 인(人)속. 그렇지만 흡혈귀는 혈조술로 강을 끌어와, 물레방아를 돌리는 방식으로 몸을 움직이죠.”
손가락의 빛을 꺼뜨렸다. 심장을 비추는 불빛이 사라지고, 흡혈귀의 몸 안쪽에는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흡혈귀는 그녀의 가슴 안쪽만큼이나 어두운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불가능하다는 거로구나.”
“네. 이 전격은 불씨에 불과해요. 장작더미에 불꽃을 당기면 불이 붙지만, 흐르는 물에 해보았자 잠깐 따끔거리고 말 뿐이죠.”
영민한 흡혈귀는 내 말을 이해했고, 낙담했다. 몇백 년 만에 희망을 찾고 들떴다가 추락했으니 그 낙차가 어마어마하리라.
그러나 그 감정 역시 반짝임으로 사라지고 만다. 흡혈귀의 감정이란 그러한 것이다. 담담하게 실패를 받아들인 흡혈귀는 마지막 남은 미련을 털었다.
“그렇다면, 딱, 딱 한 번만 해주겠느냐? 그게 무용하다고 하더라도 확인하고 싶구나.”
“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죽어서도 움직이는 사람 소원이야.”
“후후. 딱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흡혈귀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주 미소를 지으며, 팔꿈치에서부터 마력을 끌어올렸다. 전격을 끌어내는 군국 제식마법.
“볼트.”
짧게 끊어친 전격이 연달아 심장을 자극했다. 손가락 끝에서 심장이 경련하는 게 느껴진다. 움찔, 움찔거리며, 그 압력으로 핏물이 잠시간 왈칵 넘친다.
이건 뭐, 심장 소생보다는 기계적인 반응에 가깝다. 인간의 근육이란 전격에 닿으면 움찔하기 마련이고, 흡혈귀의 경우 그게 심장이었을 뿐이다.
나는 별다른 감흥 없이 손가락을 떼려고 했다.
그때였다. 흡혈귀가 다급히 내 손을 꽉 움켜잡고는 끌어당겼다.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내 손이 흡혈귀 가슴 속으로 쏙 들어갔다. 살아있는 고깃덩이의 물컹거리는 촉감이 느껴졌다.
내가 기겁하려는 무렵.
“뛰었다.”
“네?”
흡혈귀는 경악한 얼굴로, 그러나 대단히 밝은 표정으로 외쳤다.
“느낌이 있었다. 분명, 잠깐이지만 가슴이 뛰었다.”
“그야 전격이 튀었으니까….”
“그래. 잠깐이지만, 제멋대로 튀어 나갔다는 말이다! 이게…. 심장이….”
내 손이 희망이라도 되는 양, 꼭 품고는 놓아주지를 않았다. 도망이라도 갈까 걱정되어 아예 몸 안으로 품으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정말, 정말 안 되는 것이냐? 심장, 내 심장이….”
그러나 상대가 흡혈귀라고 하더라도 현실은 비정한 법.
마력의 잔재가 사라지고, 들뜬 심장도 안정을 되찾아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덩달아 흡혈귀의 희망 역시도 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흐르는 피 사이로 심장이 천천히 멎는다.
그에 따라 팔을 잡은 손에서 힘이 약해진다. 내가 슬쩍 팔을 빼자, 힘없는 손가락이 내 손목에 툭 걸린다. 나는 그 손을 살짝 쥐고는 말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러하구나.”
흡혈귀가 가슴을 여미며 몸을 일으켰다. 아쉬움과 슬픔, 그리고 만성적인 체념을 피부 한 장 안쪽에 숨겨놓은 채 잘린 살가죽을 손가락으로 스윽 밀었다.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뽀얀 피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졌다.
‘이번에는 되나 했건만. 희망은 여전히 나의 손아귀 틈으로 사라지는구나. 나의 손이 터무니없이 커진 것일까, 아니면 희망이 그토록 작고 고운 것일까. 지금도… 안 되는 것일까.’
그러나 마음마저도 질척거리지 않는다. 손에 쥐었다가 사라지는 반짝임마저도 차갑게 흐르는 피에 쓸려나간다.
흡혈귀는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하고는, 도리어 나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말했다.
“괘념치 말거라. 실패는 익숙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네? 제가요? 저는 그저 선의로 도우려다가 안 된다는 걸 알고 포기했을 뿐인데 무슨 아쉬움이 있겠어요? 저는 봉사를 의무로 생각하는 멍청이가 아니네요. 티르칸쟈카 교육생이나 아쉽지, 저는 아무런 생각 없답니다?”
“여전히…. 말은 참으로 잘하는구나. 얄밉게도.”
서글픈 미소를 지은 흡혈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풀어헤쳤던 옷을 끌어올리며 몸가짐을 단정히 한 흡혈귀가 느릿하게 밖으로 향했다.
“오밤중에 실례했구나. 우리와는 달리 너희에게 밤은 잠에 들 시간일 텐데.”
“어차피 무저갱인데요, 뭐. 괜찮다니까요. 필요한 일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천여 년 동안 군림한 흡혈귀의 시조. 그 심장을 다시 뛸 수 있게 했다면 엄청난 대가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내 능력밖에 있는 일.
나에게 독심술이 있다고 한들, 내가 뒷골목 최고의 도박사라고 한들. 손패가 없는데 억지로 족보를 만들어 돈을 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한 일이고 아쉬워할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이 이후에 무엇을 얻어갈 거냐. 그것뿐.
“가끔은, 심장 마사지라도 해드릴 테니까요.”
손가락을 슬쩍 들어 보였다. 이 손가락이 닿았던 것과, 그때 느꼈던 희망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가끔이지만요.”
“그래….”
조금 아쉬운 결과이나, 이 정도 인연이라도 얻어간다면야.
내 방을 나서는 흡혈귀를 바라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