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51)
EP.51 불청객
밤이 찾아온 무저갱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아니, 이것이 본래 무저갱의 모습이리라. 한 톨의 빛도, 한 줌의 온기도, 한 발을 디딜 공간도 없는 버림받은 땅.
그곳에 자청하여 들어온 멍청이를 살피기 위해 램프를 들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보다 먼저 나와 있는 시체가 있었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여기는 웬일이에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이 어두움에도 흡혈귀가 든 양산은 여전히 독보적으로 어둡다. 빛의 부재보다, 어둠이라는 개념이 뭉친 듯한 칠흑이 그녀를 가린다.
그 속에서 흡혈귀가 붉은 눈을 빛내며 나를 보았다.
“용케도 일어났구나. 밤잠이 많아 보이던 것을.”
“에이. 영면에 드는 티르칸쟈카 교육생만 할까요. 300년 연속 수면에 비하면야 제 밤잠은 하룻밤 반짝이는 반딧불이죠.”
“말은….”
흡혈귀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나를, 정확히는 내 머리 위에 있는 골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귀여운 장난감이로구나. 골렘이냐?”
“군국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골렘이라 아는 체를 잘 안 할 거니까 미리 양해를 구할게요.”
골렘이 대꾸했다.
『부정.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감시자의 입장에서 교육생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권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러하니 말이 없더라도 양해를 바랍니다.』
“뭣? 골렘이, 조종자 없이 스스로 말을 해…?”
흡혈귀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손을 입가로 대고 말아쥐고는 중얼거렸다.
“흠흠. 분명 새로운 기술이겠지.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구나.”
거짓말이다. 흡혈귀는 실로 조종하는 골렘밖에 알지 못하니까. 마력통신이란 그녀에게 최신문물인 것이다.
“아. 네. 일단 그런 거로 해드릴게요. 그보다 정말 왜 나오셨어요?”
흡혈귀는 내 물음을 회피했다.
“내 너에게 이래저래 설명할 이유 없다.”
“곧 내려올 사람 때문이에요?”
“…그러하다.”
살포시 인상을 찡그린 흡혈귀가 투덜거렸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하긴, 이곳은 군국의 땅이며 네가 관리한다고 했지? 영주나 다름없는 네가 모를 리 없겠구나.”
“딱히 영주 같은 건 아니지만요. 그나저나 정말 곧 내려올 사람 맞이하러 나온 거예요?”
“그래. 네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느냐. 다른 누군가가 온다면 이제부터는 나나 셰이가 처리하라고.”
“어, 기대도 안하고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진짜 해주시려고요?”
“그러하다. 비록 내 시간에 박리된 존재이나 이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니, 네 정당한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한 예의겠지.”
흡혈귀는 그리 말하고는 양산을 어깨에 얹고 시선을 위로 향했다.
흐음. 물론 흡혈귀가 옛날 사람이다 보니 이런 예의에 민감하기는 하지. 손님이라면 마땅한 의무를 다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나는 흡혈귀의 생각을 찬찬히 읽었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꼭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죠?”
“…내 말을 의심하는 것이냐?”
“의심이라니요? 분명, 그런 마음도 한구석 있겠죠. 그래서 기척을 느끼고 마중을 나온 거고. 다만.”
나에게는 재능이 있다.
마음을 읽어서 알아낸 비밀스러운 이야기. 하지만 만일 내가 독심술을 할 줄 안다는 게 알려지면, 나는 만인으로부터 경계받기 마련이다. 자신의 치부를 커튼 거둬내듯 들추고 빤히 들여다보는 나를 반길 사람이 어디에도 없으니. 오히려 앞장서서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좀 다른 종류의 능력을 개화시켰다.
“아시다시피, 티르칸쟈카 교육생께서는 흡혈귀시죠? 피에 대한 감지 능력은 이 탄탈로스 전체를 망라하는 수준. 아니, 누구 몸속에 있지만 않으면 아예 지배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죠. 하지만 달리 말하면, 피가 밖으로 흐르고 있지 않다면 그리 완벽하게 포착해낼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저나 불사자 라쉬 교육생 같은.”
바로, 독심술로 알아낸 것을 내가 추리해낸 것처럼 들려주는 내용.
그래서 한때는 탐정 노릇도 좀 하고 다녔지. 온갖 손님들이 나를 찾아왔다. 누군가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어 나를 고용했지.
가장 많이 받은 의뢰가 불륜 상대 처리였지만. 흠흠.
“그런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벌써 침입자의 존재를 알았다는 건, 아마 두 가지 경우. 떨어지는 침입자가 피를 흘리고 있거나, 아니면.”
흡혈귀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나 그건 곧 다가올 진실을 외면하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생각에서 읽어낸 사실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시조의 권능을 받아 몸을 움직이고 있는 흡혈귀던가.”
지금 떨어지는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닌 흡혈귀.
그런 흡혈귀가 이곳에 들어왔다? 햇빛을 피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햇빛을 피할 그늘이 많으니까.
이곳에 흡혈귀의 피가 이끌릴 일은 하나밖에 없다.
시조 티르칸쟈카. 그 강대한 피를 찾아 온 게 분명하다.
‘어차피 들킬 일, 조금이나마 늦추어보려고 했건만.’
흡혈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부탁이 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흡혈귀에 대한 편견은 없거든요. 애초에 편견이 있었다면 티르칸쟈카 교육생한테 이리 스스럼없이 대했겠어요? 지금 내려오는 상대가 저를 죽이려 들지 않는 한 죽이지 않을게요.”
“…내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구나.”
청산유수 같은 나의 대답에 흡혈귀는 푸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이해해주어서.”
“무얼요. 알고 지내는 흡혈귀가 있는데, 의외로 같이 지낼 만하더라고요.”
“녀석. 넉살은.”
짧고 맑게 웃은 흡혈귀는 다시 고개를 위로 들어, 지금도 떨어지고 있을 흡혈귀를 기다렸다. 흡혈귀의 마음마저 만족시킨 훈훈한 엔딩.
다만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렇듯, 그 뒤에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난과 고통이 자리하고 있었다.
『귀하는 무엇을 멋대로 정하는 겁니까!』
흡혈귀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골렘이 내 귀밑머리를 쭉쭉 잡아당기고 있었다. 터져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나는 팔을 뒤로 뻗어서 골렘의 팔을 잡아 뜯었다.
“그럼 내가 정합니까? 시조께서 정하는 거지.”
『상대는 시조입니다. 모든 흡혈귀의 시작이자, 그들의 지배자이자, 적혈공의 공국(公國)을 비롯한 다섯 세력의 실질적인 주인입니다! 귀하는 저 만남을 성사하게 둘 겁니까?』
“아니. 어쩌라고요. 그러면 내가 막으라고요? 무슨 힘으로?”
『저 사이에 끼어들어 시조를 설득하십시오!』
“뭐라고?”
『할 수 없다면, 본관이 하는 말을 그대로 전달하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시조는 침묵할 겁니다!』
나 참. 그토록 중요한 내용이었다면 지들이 할 것이지. 일개 노역자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발걸음을 옮겼다.
“알았어요. 일단 옆에서 거들기는 해볼게요. 하지만 나에게 흡혈귀를 무찔러 달라 이런 말을 하기만 해 봐. 군국이고 뭐고 그냥 당신을 물속에 처박아버릴 거야.”
『이 일을 잘 끝내는 게 우선일 겁니다. 당신과는 달리, 저는 실질적인 이곳의 책임자이니까요.』
골렘을 머리에 매달고 슬금슬금 걸어가서 흡혈귀 근처에 섰다. 그리고 흡혈귀와 똑같이 하늘을 보며 곧 떨어질 침입자를 기다렸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떨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지, 아니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곧 내려온다는 침입자는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나와 흡혈귀는 별똥별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목만 빼고 가만히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침묵이 길어질 무렵, 양산 아래쪽에서 감상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까마득한 과거에는, 밤 중에 이리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게 낙이었다.”
나도 적당히 대꾸했다.
“똑같네요. 요즘도 그걸 낙으로 삼는 사람들 많아요.”
“그래. 과거든 지금이든, 하늘은 여전히 아름답겠지.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꼭 은하수가 흘러가는 것 같아,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단다. 오직 밤만이, 아무런 제약 없이 하늘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그러다 영원할 것 같은 밤이 끝나고 저 멀리서 태양신이 대지모의 팔베개 너머로 고개를 내밀면, 푸르게 번져오는 햇빛을 피해 땅 아래로 몸을 숨겼지.”
뭐야, 갑자기.
12세 소녀도 저리 가라 할 12세기 소녀의 감수성에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흡혈귀도 딱히 나의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감상에 젖어 내뱉는 말은 바람에 머물다 사라지길 바라고 하는 것이니.
“그저 살고자 하였을 뿐인데, 우리에겐 떳떳함이 없었다. 고개를 들고 당당히 빛을 맞이할 수가 없었다. 나와서 정당한 심판을 받으라고 요구하여도, 그것이 정오의 광장에서 행해지는 것이면 도망쳐야 했다. 결국 우리는 살아남았으나 당당해지지 못했다.”
흡혈귀의 시작이자, 그림자의 여왕.
한때 죽어가는 이들이 안쓰러워 그들을 흡혈귀로 만들어 일으켜 세웠으나, 이제는 그리 태어난 흡혈귀를 동정해버린.
그리고 그런 감정은.
못난 부모가 자식에게 품곤 하는 죄책감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왜 태어나게 했을까.
이 고통뿐인 세상에 너를 낳은 것이 잘한 일일까.
도망치고, 쫓기고, 숨어야 하는 생명을 선물한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더 낫지 않았을까.
선한 부모는 그러한 괴로움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 죄책감에 또다시 괴로워한다. 괴로울수록 죄책감은 더욱 부풀어오른다. 자기 자신을 집어삼키는 불처럼, 감정은 어둡고 탁하게 몸을 불려나간다. 그들은 끝없는 고통 속에서 정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우성친다.
시조 티르칸쟈카의 감정이 지금 그러했다.
흡혈귀라는 존재를 탄생시켰으나, 창조의 죄악에 젖어버린 작은 신은 새카만 양산을 손에 쥐고 괴로워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건만. 그리하여 자청해서 이곳에 들어왔건만. 이곳에서 그리워하는 게 정작 하늘이라니.”
그때, 별빛 하나 없는 무저갱에서 무언가 반짝인다. 주기적으로 반짝이는 지시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별똥별,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인공적이라 별로 와닿지 않는 그러한 빛이 이곳으로 다가왔다.
그건 꼭 무언가가 전락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처량하구나.”
그리고 침입자가 땅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