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58)
EP.58 독심술사의 독백
흡혈귀가 말한 대로, 핀레이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으스대는 일은 사라졌다.
가끔 내가 요리할 때, 재료를 칼로 썰고 있으면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식칼과 손가락을 번갈아 쳐다보긴 했지만. 어림도 없지. 이깟 식칼에 손이 베일 바보였으면 카드 못 섞는다.
네가 셔플이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지 알아? 잘못 섞으면 손모가지가 날아간다고. 그거에 비하면 최대 아웃풋이 손가락인 칼질은 식은 죽 먹기라는 말씀.
미안하지만 인간의 부엌에 뱀파이어를 위한 음식은 없다. 썩 꺼져라.
어쨌든, 무저갱은 그나마 평화를 되찾았다. 흡혈귀는 예전보다 핀레이를 홀로 놔두고 다니는 시간이 늘었고, 회귀자는 만족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날을 세우지는 않았다. 커다란 파문이 잦아들고 서로 묘한 안정기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그 시기에, 나는 식당 한구석에서 골렘과 마주하고 있었다.
『확인했습니다.』
나의 보고를 들은 골렘에게서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산재한 문제가 많습니다만, 현재 취할 수 있는 수단이 적어 당분간 관망해야 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본국에서 추가 대처를 하기 전까지는 이 상황을 유지해주시길.』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
그러자 골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기 시작했다. 골렘의 시선이라 그런가, 왠지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왜 마이크에 입만 대고 가만히 있어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의문. 귀하는 어째서 오늘따라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까?』
“오늘이라니? 저는 언제나 에이비 대위에게 협력적이었어요. 에이비 대위가 부탁한 것 중 제가 안 들어준 게 있나요?”
『그것은 귀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귀하는 탄탈로스의 노역자이며, 관리자인 본관의 정당한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어서 조정할 때 말고는 다 따랐잖아요? 데려다 달라면 데려다줘, 구해달라면 구해 줘, 침입자가 떨어지면 대응해 줘. 심지어 명령이 없어도 알아서 해결한 적도 있고. 나처럼 모범적인 노역자가 어디있다고?”
『그때마다 그것을 빌미로 본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까?』
“무리한 요구? 그게 뭔데요?”
『본관에게 특정한 언행을 강요하는 일 말입니다.』
“특정한 언행이라니요?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데?”
골렘이 동작을 멈췄으나 그건 잠깐이었다. 곧이어 스피커에서 무미건조한 말이 흘러나왔다.
『본관에게 ‘오빠’ 나 ‘어부바’ 같은, 유치한 언행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요? 에이, 그건 장난이지, 장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으나, 빤히 노려보는 골렘의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 더 변명해야 했다.
“솔직히 그게 뭐가 어렵다고 ‘강요’라는 표현까지 써야 해요? 에이비 대위가 뭐 돈을 잃었어요, 아니면 다치기라도 했어요? 그냥 어부바해달라고 말만 한 거잖아요. 명령이 조금 더 귀여워졌을 뿐이지, 결과적으로 제가 흔쾌히 어부바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윈윈 아닐까요?”
『부정. 본관은 군국 통신병이며, 독립통신부대의 대위입니다. 본관은 직책에 맞는 품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애초에 골렘이잖아요? 내가 진짜 에이비 대위 본인을 앞에 두고 그런 걸 시켰으면 의심할 여지 없는 변태죠. 하지만 기껏해야 이 조그만 골렘이랑 말장난 좀 했던 건데요, 뭐.”
『귀하의 변태성은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만.』
“변태? 세상에. 오빠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
오, 화났나?
골렘이 진지하게 보복을 고민하기 전에 재빨리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 그리고 시조가 이런 말도 하더라고요. 핀레이는 실수로 여기 떨어진 셈이니 다시 지상으로 되돌려달라고.”
지그시 나를 바라보던 골렘에게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반박을 포기한 것이다.
『불가합니다. 무저갱 탄탈로스에 특정한 의도를 지니고 침입한 이상 보안법을 위반한 것이며, 만일 지상이었다면 수배령이 내려졌을 것입니다. 이곳이 무저갱이라. 따라서 시조의 요청은 수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도 비슷하게 이야기해서 일단 어떻게든 붙들어놓긴 했는데, 수틀리면 그냥 날아갈 기세에요. 아시다시피 강력한 흡혈귀는 이런 어둠 속에서도 자유롭게 날아다니잖아요? 이러다가 지상으로 올라가버리면 어쩌죠?”
『탈출 역시, 불가능합니다.』
골렘이 딱 잘라 대답했다. 너무 짧은 설명에 나는 양팔을 휘적이며 항변했다.
“아니, 날아간다니까요? 늙어 죽을 때까지 하늘을 날아갈 생각이라던데요? 흡혈귀는 늙어 죽지 않으니, 사실상 영원히요! 아무리 무저갱이 깊어도 언젠가는 탈옥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나는 관리를 못했다는 죄목으로 사살당하고!”
『그 점에 대해선 귀하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공중을 날아가는 방식으로는 이곳, 무저갱을 탈출할 수 없.』
거기까지 말한 순간, 골렘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칼로 베어내는 듯한 소리의 절단.
그 이후, 골렘 너머에서 한층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군국 통신병으로서, 귀하에게 엄중히 경고합니다.』
대화할 때 있었던 조금의 여유가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한참 풀어놓은 분위기에, 느슨한 긴장감 틈으로 진실을 슬쩍 드러내버린 골렘은 그것을 자각하고는 자신을 다잡았다.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는 딱딱한 태도로 골렘이 말했다.
『본관은 귀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탄탈로스 내부 유일한 가용인원이자 그 신분으로 교육생과 친분을 쌓은 점을 고려하여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다만.』
수정구로 만들어진 눈이 움직인다. 빛을 가두는 그 동그란 구슬에 내 모습이 온전히 비친다.
저 너머, 나에게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을 것이다.
『또다시 본관에게서 정보를 캐내려는 움직임을 보일 경우, 혹은 그런 징후가 관측될 경우. 본관도 귀하를 ‘대체’할 다른 수단을 강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래서 군국을 별로 안 좋아한다니까. 사람도, 사상도, 시스템도 다 이리 딱딱하니, 참 살아남기 힘들어.
이런 팍팍한 세상에선 낭만을 좇는 마술사가 설 곳이 없다는 말이지.
나는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했다. 골렘은 그런 나를 쭉 노려보다가,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연결을 끊었다.
수정구에서 빛이 사라지고, 철로 만들어진 몸체가 푹 주저앉았다.
*****
핀레이가 나에게 피를 요구하는 일은 없어졌다. 지고하신 시조의 명령대로 내 생활을 방해하거나 느닷없이 끼어드는 일이 아예 사라졌다.
사라지긴 했는데.
‘베여라. 손가락이나 베여라. 피나 흘려라.’
나는 내가 독심술사라는 사실을 간과하고야 말았다.
핀레이는 내가 요리를 할 때면, 특히 식칼로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면 몰래 숨어 지켜보면서 저주를 퍼붓고는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생각이 계속 들려오면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이쯤되면 저주나 다름없다.
아니, 저 잡귀는 왜 자꾸 나의 피를 탐내는 거야?
‘시조께 피를 진상하여야 하는데! 권속이 혈주께, 그것도 아득히 높은 서열의 혈주께 의견을 말하기 위해선 신선한 피를 지참하여야 해. 권속은 피를 진상하고, 혈주는 그 피를 받으며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이 전통이니, 시조께서도 받아주실 거야!!’
생각을 읽어보건대 아무래도 시조 티르칸쟈카 역시도 조금 착각한 모양이다.
혈주의 앞에서 권속은 한없이 하찮다. 흡혈귀로서 태어나게 했으며, 혈조술을 통해 권속을 지배할 수 있고, 손가락 하나 까닥이는 것으로 숨을 끊어버릴 수도 있는 혈주는 권속에겐 신과 부모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
‘시조께선 우리를 가엾게 여기신다. 우리를 비호하고자 하신다. 그분의 뜻은 알았으니, 몇 번이고 계속 말씀을 올리면 설득할 수 있어.’
그러나.
세상에는 제 부모도 못 알아보는 자식들이 수두룩하며, 신을 업신여기는 인간은 터무니없이 많다.
또한, 그들이 품은 마음도 각양각색. 만인이 부모를 공경하는 방식은 만 가지이고, 한 종교의 신도 추앙받는 방법은 각기 다르기 마련.
‘그래! 엘더가 소멸한 이야기를 전해드리자. 가장 가까웠던 권속 중 하나가 소멸했다는 사실을 알면, 이를 슬퍼하신 시조께선 마음을 달리 먹으실지도 몰라.’
핀레이는 고민했다.
흡혈귀에겐 신과 같은 시조의 앞에 처음 부복했을 때, 잠시지만 그는 분명하게 고민했다.
시조를 기만해서라도 상황을 나에게 유리하게 이끌 것인가, 아니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진실을 털어놓을 것인가.
그때의 그는 시조의 힘이 두렵고 낯설어 진실을 고했지만.
‘비록 그가… 성황청에게 사냥당한 건 아니지만. 거기까진 시조라도 모르실 테니. 훗날 시조께서 나를 탓하신다면 벌은 달게 받겠다. 그분이 여기서 이깟 별 볼 일 없는 종자들과 노닥거리는 건 우리 밤의 귀족에게 있어 크나큰 손해야.’
미지란 곧 공포이다. 따라서 우리는 알 수 없음 앞에 늘 겸손하다.
어둠이 찾아오면 횃불이나 램프를 들고 공손히 마중을 나가던가, 아니면 방 안에서 몸을 조아리고 있어야 한다.
반대로 말해서, 앎이란 평안이며 동시에 오만이기도 하다.
시조 티르칸쟈카는 그 악명과는 달리 꽤 인자하다. 지금껏 그런 시조로부터 몇 번 비호를 받은 핀레이에겐 예전만큼의 두려움은 없었다.
그게 핀레이의 판단을 바꾼 거겠지.
“하아. 그래서 나의 대응도 바뀌어야 하고.”
가끔 느끼지만, 생각을 읽는 능력은 간간이 아쉬울 때가 있다. 지금처럼 별로 알고 싶지 않지만 들어버렸을 때,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것까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생각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올 때면, 독심술이 볼품없는 계획에 비해 과하게 충만한 각오를 낱낱이 들려줄 때면 묘한 감상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안쓰러움? 하찮음?
너무 우스워서 계획을 이루어주고 싶기도 하고, 악동처럼 그 계획을 망가뜨려버리고 싶기도 한. 묘한 감정이 뭉근하게 피어오른다.
생각해보면, 생각을 읽는 데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있는 쪽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골렘이나, 아니면 회귀자나, 정 안 되겠으면 흡혈귀, 하다못해 아지라도. 나름 캐내는 재미가 쏠쏠한데 말이야.
이것도 어찌 보면 배부른 자의 기만이겠지.
마침 요리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딱딱한 당근을 길게 썰어 그릇을 장식한 나는 주머니에서 종을 꺼내 흔들었다.
딸랑딸랑.
“멍! 멍멍!”
그러자 아지의 짖는 소리가 들리고, 모퉁이 너머에 숨어있던 핀레이가 다급히 도망쳤다. 핀레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식당에 들이닥치는 아지를 보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아지는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처박고 당근부터 씹어삼키기 시작했다.
나는 천으로 손을 닦으며 외쳤다.
“핀레이!”
슬금슬금 돌아온 핀레이가 내 목소리를 듣고는 흠칫거렸다.
나는 모퉁이 너머의 그를 정확히 노려보며 말했다.
“티르칸쟈카 교육생에게 전하세요. 오늘 오후에 수업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