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59)
EP.59 슬기로운 생활
교육생들을 전부 교실로 불러모은 나는 손뼉을 치며 수업을 시작했다.
“자, 오랜만에 수업에 들어갑시다. 그런데 그 전에.”
오늘도 의자 대신 둥둥 떠있는 흡혈귀의 관. 그 옆에는 당연한 듯이 핀레이가 두손을 모은 채로 시립해 있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핀레이를 가리켰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그 옆에 서 있는 것 좀 어떻게 못 해요?”
내 물음에 핀레이가 덜컥 화를 냈다.
“어허! 고귀하신 시조께서는 궂은 일을 대신할 종복을 언제나 대동하여야 하는 법. 나는 조용히 나의 의무를 다할 테니, 너는 네 의무만 다하라! 서로 의무를 다하면 아무런 문제 없을 터!”
의무랍시고 매일매일 끼어들어서 어허거리는 작자가 저딴 말을? 아무리 생각해도 최선을 다해 수업을 방해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만.
내가 차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흡혈귀가 핀레이를 나무랐다.
“그만두어라, 핀레이.”
소리치던 핀레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를 향한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였다. 물론 그 태도에는 의도된 바도 없지는 않았다.
나와 흡혈귀를 대하는 태도에 차이를 두어 흡혈귀를 띄워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흡혈귀가 더 너그러워질 테니까.
어쨌건 흡혈귀는 단번에 핀레이를 침묵시킨 뒤 나에게 말했다.
“이해해다오. 그도 이 수업 내용이 궁금한 모양이더구나.”
“이해요? 뭔 소리예요. 궁금하다고 다 멋대로 쳐들어와서 강짜를 놓으면 돼요?”
나는 분필을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핀레이를 노려보았다.
“핀레이. 이 수업은 오직 교육생을 위해 준비한 것이거든요? 외부인은 빠져주시죠?”
“나는 시조의 시종이며, 시조께서 남기신 피 한 방울이다! 시조께서 필요하실 때, 나는 나 자신의 피를 바쳐 그분을 드높여야 할 의무가 있어!”
“나는 군국의 교관입니다. 이곳에서는 제가 관리자라는 말이에요, 만일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않으면?”
양팔로 교탁 위에 놓인 종이를 냅다 쓸어버렸다. 순식간에 말끔해진 교탁 위에 냅다 누웠다.
내 과격한 행동에 당황한 흡혈귀가 나를 나무랐다.
“무슨 짓이냐? 사람들을 불러놓고.”
“제가 안 부른 사람이 섞여 있잖아요.”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받치고는 느긋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나 수업 안 합니다. 앞으로 일절 건드리지 않을 테니. 흡혈귀 둘이서 짝짜꿍하고 노세요.”
그리고나선 몸을 칠판 쪽으로 휙 돌렸다. 사실상의 보이콧 선언이었다.
기대하던 수업이 보이콧 당할 위기에 처하자, 다급해진 흡혈귀가 말을 걸어왔다.
“다 큰 녀석이 삐지기라도 했느냐?”
“안 삐졌는데요.”
“삐진 것 맞지 않느냐. 유치하게 왜 그러느냐?”
“아, 알았어요. 나 사실 삐졌어요. 그리고 방금 그 말 듣고 두 배는 더 삐졌고요. 나 이제 수업이고 마사지고 아무것도 안 해.”
수업에 이어 마사지까지 인질로 잡으니 다급해진 쪽은 흡혈귀였다. 몸이 단 그녀는 이제 관에서 반쯤 내려와서는 말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들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이냐?”
“원래 삐진 사람에게 삐졌냐 하면 더 삐져요. 그리고 뭐, 저라고 좋아서 수업을 하는 줄 아세요? 나름 시간도 쓰고 노력도 기울여서 만드는 건데 한마디 할 때마다 누가 끼어들면 의욕이 팍 꺾이거든요? 뭐, 위대하신 시조는 자기 대신 호통을 쳐줄 나팔수가 필요할지도 모르지만요.”
바보가 아니라면 내 말뜻을 알아챌 것이다. 흡혈귀는 나이가 좀 많아도 바보는 아니었고.
무저갱까지 찾아온 권속과, 각종 유희를 제공하는 교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심장이 멈춘 흡혈귀답게 선택은 빠르고 냉정했다.
흡혈귀가 핀레이를 향해 손짓했다. 핀레이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 부름에 응했다.
“밖으로 나가 있거라.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오지 말고.”
“…받들겠습니다.”
권속인 핀레이는 단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흡혈귀의 명령에 따랐다. 나가면서 나를 한 번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고서는.
아무래도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너, 엿들을 생각이구나?
하하. 어딜.
“이왕 갈거면 저기, 저 마당까지 가 계세요. 엿듣지 마시고.”
“너!”
“그러하도록 해라. 나 역시, 네가 품위도 없게 몰래 엿듣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그런 것은 추잡한 밀고자나 하는 짓이다.”
말은 흡혈귀가 핀레이에게 했는데 저기 앉아있는 회귀자가 바늘에 찔린 듯 움찔거렸다. 내가 바라보니 살짝 시선을 피한다.
그래도 자각은 있는 모양이구나. 다행이다. 양심이 다 닳아버리진 않아서.
“…받들겠습니다.”
시조의 명은 절대적. 어길 수야 있지만 의미는 없다. 흡혈귀라면 무저갱 한쪽 끝에서도 핀레이의 피를 정확히 감지할 테니까.
핀레이는 고개를 조아리고는 문을 닫고 나섰다. 그가 충분히 멀어지자, 흡혈귀는 한층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핀레이는 단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컸을 뿐이다. 이제 내보냈으니 오늘 준비한 이야기를 해주거라.”
“이야기가 아니라 수업이에요. 나름 내가 고심해서 짜낸 수업을 그냥 신기한 이야기로 받아들이시네.”
“그래. 수업을 해주거라. 오랜만에 공부해보고 싶구나.”
혹여나 내가 더 삐질까 봐 최선을 다해 다독이는 흡혈귀.
물론 흡혈귀에겐 나보다 전기 마사지와 수업 때 해주는 이야기가 중요하겠지만, 뭐 어때. 원래 인간은 세속적인 법이다. 그런 거 신경 쓰면 독심술사 못 해먹는다.
“후우. 좋아요. 만학도를 냉정하게 쳐내면 평생 못 배워먹은 귀신이 붙는다니 제가 그냥 넘어가 드리죠. 아니, 이미 붙었나?”
“무어라?”
“좋아요. 오늘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핀레이가 나간 이상 이제 거칠 게 없다. 교탁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한 말을 흡혈귀가 온전히 깨닫기 전에 교탁을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제가 지난 시간 동안 여러분을 관찰한 결과, 여러분은 온갖 기행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언어능력이나 공감 능력 자체는 별다른 부족함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정말로 의외로 말입니다!”
‘저건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 거야?’
회귀자의 마음속에서 실례되는 생각이 들려온다. 어허.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무언가 중대한 하나가 빠져있습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아주 소중한 그것이 말이죠. 그것 하나 때문에, 여러분들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흡혈귀가 양산을 살짝 기울였다. 대답하겠다는 표시였다.
적극적인 수업 태도가 마음에 드는군. 나는 바로 흡혈귀를 가리켰다.
“네, 티르칸쟈카 교육생!”
“혹, 우리에겐 현시대의 상식이 부족한 게 아니더냐?”
예상과는 달리 타당한 주장이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러하니, 네가 많이 알려주면 되겠구나. 요즘 들어 수업이 너무 드문드문 열리는데, 교관으로서 너무 게으른 게 아니냐? 네가 정녕 우리를 위한다면 이런 자리 좀 자주 만들거라.”
“하지만 나라마다, 시대마다, 세대마다 상식이 다르거늘 어찌 오만하게 상식의 부재를 정의할 수 있답니까? 안타깝지만 제가 원하던 대답이 아닙니다!”
후우. 대처가 빨라서 다행이다. 자칫하다간 수업시간을 늘릴 뻔했어.
추가 노동의 징후를 원천봉쇄한 나는 다시 말했다.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 그건 바로 평범한 위기감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불량스러운 자세로 앉아있던 회귀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평범한, 위기감?”
“그렇습니다. 위기감, 나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지 판단하며 경계하는 부분. 그 부분에서 여러분들의 나사는 하나씩 빠져 있거나 아니면 과도하게 조여서 뇌가 상해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야기를 듣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둘. 진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생각을 안 하는 건지.
어쩔 수 없이 나는 스스로 깨닫게 두지 못하고 하나하나 지적해주었다.
“참고로 과하게 조여있는 쪽은 셰이 교육생이며, 한껏 풀려서 그 부분이 날아가 버린 쪽은 티르칸쟈카 교육생입니다.”
“뭐어?”
“망언이로구나!”
동시에 터지는 아우성. 그래, 이렇게 될 걸 예상했다. 어리석은 이는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주지.
“자아. 그러면 아직도 자기객관화가 덜된 여러분을 위해 시뮬레이션을 해보겠습니다.”
교탁 밑에서 미리 준비해둔 물건을 꺼냈다. 관리실에서 주운 골렘의 잔해로 급조한 마리오네트 인형이었다.
마술사를 할 적, 어린아이를 끌어모으려고 인형극을 한 적이 있지. 짧은 한 편의 인형극을 끝내고 모자를 내밀면, 그동안 어딘가 방문하고 돌아온 아이들 부모에게서 싸구려 동전이 떨어지고는 했다.
그때의 경험을 살릴 때였다. 나무로 된 십자가에 가느다란 실이 연결된 마리오네트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여러분에겐 평범한 위기감이 없는지. 한참을 고민한 결과 저는 여러분의 문제점을 파악했고, 그걸 알려드리기 위해 상황을 준비했습니다.”
손가락을 놀려서 마리오네트를 조종했다. 대충 내 키의 3분에 1 정도 되는 마리오네트가 내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왼손으로 머리를 긁어보기도 하고 다리를 흔들며 춤을 춰보이기도 했다. 온갖 동작을 해보며 충분히 손에 익힌 뒤, 나는 마리오네트를 잠시 멈추고는 말했다.
“제가 가져온 이 꼭두각시 아저씨, 줄여서 꼭두저씨로 상황을 정해주겠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알맞은 대응을 하시면 됩니다.”
“무슨 애도 아니고….”
“그러니까 어린아이에게 할 법한 수업을 안 하게 해주세요. 자, 시범을 보여드리죠! 아지야!”
“멍!”
내가 부르자 아지는 곧장 몸을 일으켜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아지는 내 마리오네트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꼭두저씨를 이리저리 흔들자, 아지의 시선도 그에 따라 흔들렸다.
“자, 이제 이 골렘이 말을 걸 거야. 그러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한도 내에서 알맞은 답변을 하면 돼. 알겠지?”
“멍?”
“그래. 그런 대답이라도 충분해. 그러면 시작!”
꼭두저씨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아지의 고개도 그에 따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흔들린다. 내밀면 마주 손이 내밀어진다.
아지의 관심을 이끌어낸 나는 복화술로 말을 걸었다.
“안녕, 꼬마야?”
“멍! 안녕!”
마주 인사하는 아지. 이것만으로도 무려 무저갱 상위 50%의 예절이다.
나는 아지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저씨가 재미있는 거 가르쳐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