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63)
EP.63 호문클루스의 딜레마
살갗이 타오르고 피가 끓어오른다. 셰이는 눈을 찌푸리며 그녀가 만들어낸 벼락을 바라보았다. 티르칸쟈카의 작은 몸이 피뢰침이라도 된 듯, 먹구름에서 흘러나온 벼락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 땅으로 스며들고 있다. 마치 폭포 아래에서 수행하는 듯한 모양새다.
그러나 그 아래에 있을 고통은 폭포와 비견조차 되지 않는다. 저 벼락의 급류는 피부뿐만 아니라 전신을 타고 흘러내리는 종류.
혈관을, 근육을, 살갗을, 피를, 신경을. 곧게 난 길이라도 되는 양 난폭하게 망가뜨리며 질주한다.
수천수만 개의 바늘로 전신을 찌르는 것? 그조차도 비교가 불가능하다. 벼락 한 줄기는 바늘보다도 빠르고, 미세하며, 강력하니까.
“아프면 비명을 질러! 계속 더 버텼다간…!”
고통에 익숙한 티르칸쟈카라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셰이는 그렇게 예감하고는, 언제든지 마법을 베어낼 수 있도록 천앵을 단단히 쥐었다.
그런데.
“확실히, 고통이 느껴지는구나.”
티르칸쟈카는 덤덤했다.
살갗이 타오른다. 신경이 그을린다. 천앵에서 시작된 어마어마한 뇌기가 흡혈귀의 몸을 침으로 삼아 땅으로 파고들었다.
“허나, 아프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번개는 흡혈귀를 상하게 하지는 못했다.
혈조술, 피를 다루는 능력은 이미 하늘 끝에 닿아있다. 단순히 ‘움직이는’ 것을 넘어, 그것으로 육신을 빚고 몸을 재생할 수 있다.
피가 닿아있는 한, 아직 피가 남아있는 한. 아무도 그녀를 해할 수 없다.
그리고 1200년 동안 퇴적된 혈해(血海)는 구름 한 조각이 만들어낸 벼락 따위에 상할 정도로 사소하지 않다.
벼락이 끝났다. 다 쏟아붓고 남은 벼락 조각이 간헐적으로 튀어오른다. 하지만 티르칸쟈카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본래 생겨야 할 번개모양 흉터도, 살갗이 그을리며 생기는 기분 나쁜 냄새도, 타오른 피가 만들어내는 새카만 색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되기 전에, 티르칸쟈카가 갈무리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더 강력하구나. 그러나 무언가 부족하다.”
티르칸쟈카는 그녀를 타고 흘렀던 벼락을 냉철하게 평가했다. 마치 감독관이라도 되는 것마냥.
“내 가슴에, 심장에 닿지 않아. 약간의 고통밖에 느껴지지 않는구나.”
티르칸쟈카가 아쉬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셰이는 무언가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시조가 그녀의 전격을 버텨서? 아니, 아니다. 애초에 셰이의 전력도 아니었을뿐더러, 티르칸쟈카 역시 아무런 방비도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불편함은 다른 쪽에서 온 것이었다.
꼭 이전에도 전격에 맞아본 듯한 말투, 비교하는 듯한 태도. 그 점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짚어냈기 때문이다.
“…혹시 그 남자가 너에게 무언가를 한 적 있어?”
“그 남자? 아아, 교관 말하는 거로구나.”
티르칸쟈카는 벼락 맞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쩡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그의 이름도 모르는구나. 사람 몇 없는 무저갱이라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만, 슬슬 알아가는 편이 낫겠구나….”
“말 돌리지 말아줘. 혹시 그에게도 전기를 흘려달라고 했어?”
“예리하구나.”
티르칸쟈카는 다시 어둠을 그러모아 양산을 만들고는, 가볍게 어깨에 걸치며 대답했다.
“그렇다. 몇 번 신세를 졌지.”
“몇 번이나?”
“능숙하고 섬세하더구나. 강하지는 않으나 재주가 좋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내 심장을 건드리면, 아주 잠시간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었지.”
“…지금 우리, 전격 말하는 것 맞지?”
반문하던 셰이는, 티르칸쟈카의 말에서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반문했다.
“잠깐, 뭐? 심장이 다시 뛰었다고?”
“그래. 잠시지만 분명히, 그리고 착각하지 않을 만큼 짧게.”
“그가 어떻게 했는데?”
“으음. 말하기 조금 부끄럽다만, 이미 여기까지 말한 이상 더 숨기는 의미는 없겠지.”
티르칸쟈카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토인의 부활을 보고 교관을 찾아갔던 일, 가슴에 전기를 흘려달라 부탁했던 일. 그 뒤, 잠시 심장이 뛰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몇 번이고 마사지를 요구한 것까지.
전말을 깨달은 셰이가 대꾸했다.
“그럼, 지금껏 둘이서만 만났던 것도….”
“마사지를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자주 귀찮게 만들었지.”
“으으. 그게 그러면….”
셰이는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흡혈귀라지만, 연금술사이자 마법사이기도 한 이를 상대로 심장을 내보이다니. 위기감이 없어도 얼마나 없는 걸까? 교관이 위기감 수업이니 뭘 한 것도 이해가 갈 정도였다….
거기다 그 교관도.
아무리 부탁이라도 한들 그런 짓을. 타인의 신체를 마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금기인데.
아직까진, 딱히 나쁜 짓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다. 0레벨 마도는 그런 금기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기도 하고, 티르칸쟈카처럼 강력한 존재가 쉽사리 당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셰이는 아직도 교관을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미래에 필히 찾아왔을 어떤 끔찍한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르칸쟈카. 만일 다음에 교관을 만나면, 이걸 물어봐.”
그렇기에 셰이는 시험해야 했다.
현재, 시조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이, 탄탈로스의 교관.
그에게 나쁜 뜻이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호의인지.
“호문클루스의 딜레마. 그가 그것을 알고 있는지.”
만일 그것을 순순히 알려준다면, 최소한의 자각은 있다고 생각해도 좋겠지.
*****
“…갑자기 오셔서는. 네? 호문클루스의 딜레마요?”
“그래.”
호문클루스의 딜레마, 그건 일종의 경고문 비슷한 이야기다.
회귀자는 왜 그 이야기를 나한테 들으라고 한 거야?
자기가 직접 말할 수 있는데 굳이 나한테 들으라고 시켰다는 것은 둘 중 하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자신이 없어서 나에게 떠넘겼든가.
아니면 나에게 보내는 경고이던가.
흐음. 예전 같으면 분명 나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생각해서 몸을 사렸을 텐데, 요즘은 왠지 전자 쪽에도 무게가 살짝 실린다. 말을 어지간히 못 해야지.
이래서 사람은 인상이 중요해. 암.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닌데. 심지어는 연원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괴담 같은 거예요. 그래도 들어보시겠어요?”
“청자가 이야기의 내용을 가려서야 되겠느냐.”
“그렇다면야. 자아. 그러면 이야기할게요.”
나는 저 멀리 원반을 던지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픈 아이를 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도시를 돌며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 누구도 아이의 병명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했다. 흔히들 말하는 희귀병이었다. 그 당시에는 저주라고 불리기도 했다.
둘의 차이가 있다고 하면, 의원들이 곤란해하냐, 두려워하냐 차이일 것이다. 내로라하는 의원들도 면전에서 문을 세게 닫았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고개는 힘없이 떨어졌다.
아이의 증상은 자랄수록 점점 심해졌다. 밤마다 고통에 흐느끼는 아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는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깊은 숲속 마법사에게로 찾아갔다.
마법사에게 향하는 길은 멀고 험했다. 조금이라도 빈 곳이 있으면 일단 자리를 잡고 보는 나무와 수풀은 식물보다는 성긴 벽 같았고, 그것들을 헤쳐가며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전신에 생채기가 들었다. 아버지는 도끼로 잔가지를 내리치며, 조그만 램프를 들고 연기가 흐르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러기를 수 시간. 빽빽한 나무숲 너머에 조그마한 오두막이 나타났다. 마법사의 거처를 찾은 아버지는 냅다 문을 두들겼다.
아버지의 절절한 사연를 들은 마법사는 침묵했다.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 그는 불길한 목소리로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라서 그럴까. 건강한 아이를 되돌려주겠다는 말에 아버지는 별다른 의심도 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아픈 아이를 업고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그 멀고 험한 길을 두 번도 모자라 한 번 더, 그것도 뜨거운 몸으로 신음하는 아이를 등에 매단 채로. 지쳐서 나가떨어질 강행군이었으나, 지친 와중에도 아버지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이 길을 한번 지나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만일 그가 두 번 오가며 잔가지를 정리하지 않았다면, 그의 몸에 있는 생채기는 고스란히 아이에게 났을 테니까.
아이를 매달고 마법사의 거처에 도착했다. 어둑한 밤, 마법사는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사흘 뒤에 찾아오란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남아있는 잔가지를 마저 정리하며.
아버지는 약속대로 사흘이 지난 뒤 마법사의 거처에 방문했다. 오두막 안으로 한 걸음 내딛은 순간,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아이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완연한 병색도,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도 이제 없었다. 아이다운 순수한 미소를 본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아버지는 전재산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값을 치르고, 건강해진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왔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건강해진 아이를 보던 아버지는 다시 한번 마법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당신이 고친 아이가 이렇게 자랐다며, 우리 모두 당신에게 고마워한다고 전하려고 했다. 그는 똑같이 아이의 손을 잡고 마법사의 거처에 방문했다.
일 년이나 지난 길이었다. 잔가지는 예전의 노고를 비웃듯 다시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때와는 달리, 아이는 생채기쯤 충분히 이겨낼 만큼 건강했으므로.
아버지가 앞장서서일까. 아이는 그 덤불을 지나면서도 티끌만큼의 상처도 나지 않았다.
마법사는 마침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마냥 기다리던 아버지는 해가 서산 너머로 가자 불안해졌다. 아이는 여전히 씩씩했지만, 혹여나 아이가 지쳤을까 걱정된 아버지는 무례를 무릅쓰고 거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때 아버지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들었다. 또 다른 환자가 있나 갸웃하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길한 예감에 얼굴을 굳혔다.
애석하게도, 파국의 예감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기 마련이다. 생명이란 본디 위기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리라.
그 신음소리는 일 년 전에나 들었던, 그의 아이가 고통에 흐느끼는 소리와 너무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더 힘없고 고통스러웠다는 것뿐.
아버지는 홀린 듯 소리를 찾아 나섰고, 지하에 두꺼운 철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았다.
몇 가닥 실에 매달린 채, 울부짖을 기력도 없이 고통에 떨고 있는 아이를.
아버지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이는, 마치 부품을 떼어 어딘가에 사용한 것처럼, 톱과 칼로 너저분히 해체되어 있었다….
“라는, 평범한 괴담 같은 이야기에요. 나중에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마법사들이 이 이야기는 마법의 진리를 담고 있다며 거창한 별명을 붙인 거죠.”
아지가 원반을 물고 돌아왔다. 덤덤하게 원반을 받아들고, 다시 저 멀리 날리며,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마법이란 자의의 발현. 자기 세상을, 자신의 이치를 세상에 풀어놓는 것. 그렇기에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어요.”
나는 생각을 읽을 수 있지만, 쓸 수 있는 마법은 모두에게 허락된 0레벨 제식마도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루어내는 마법은 독심술로도 재현할 수 없었기에.
“그렇기에 마법으로는 타인의 몸을 고치지 못해요. 만일 고친다고 하면, 그건 옛이야기처럼 원래 있던 몸을 폐기하고 새로 호문클루스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의미를 담아, 호문클루스의 딜레마라는 거창한 원칙을 가르치지요.”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흡혈귀는 바보가 아니니까.
아니, 바보는 맞나? 누가 벼락을 자기 몸에다가 쏴달라고 해. 난데없이 천둥이 쳐서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엎드렸단 말이야.
다시 돌아오는 원반을 눈에 담으며 말을 맺었다.
“좋은 제자를 두었네요. 분명 티르칸쟈카 교육생을 걱정한 게 분명해요.”
“…그래.”
흡혈귀는 그렇게 수긍하고는, 별다른 말도 없이 물러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아지가 보채는 바람에 다시 원반을 던져야 했다.
으음, 이상하다. 원반 써서 좋은 게 맞나? 그냥 내 근무시간만 늘어나고 딱히 더 나아진 건 없는 것 같은데?
“멍!”
그래, 지금 이리 호감도를 쌓아두면 언제고 쓸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그때를 위해서라도 조금 참자. 이건 적금이야.
과연 만기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라, 생각해보니 그런데 오늘따라 마사지 해달라고 하지를 않았네?”
무슨 바람이라도 불었나? 어제 수업 이후 조금 삐진 것 같아서, 꽁해지기 전에 좀 풀어주려고 했는데.
혼자 골방에 있다가 이상한 생각으로 빠져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괜찮겠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벼락을 뒤집어 쓰는 것보다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거 아니야?
원반이 다시 돌아왔다. 나는 원반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그냥 땅에 굴려버렸다.
아지가 불만스럽게 짖었다.
*****
“결심이 섰다, 핀레이.”
“시조시여….”
어둠 속에서 감격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핀레이는 울음 섞인 경탄을 내질렀다. 그가 울지 못하는 흡혈귀만 아니었어도, 눈물이 이미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시조 티르칸쟈카는 가만히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핏기없는 입술에서 준엄한 말이 흘러나왔다.
“둘은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불가능하다고만 말했지. 결국, 그들로는 이룰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밤의 귀족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삶에 매인 천민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나 역시 믿지 않는다. 한 번 죽은 이가 어찌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되찾는다는 말이냐. 그렇기에 내 권속들에겐 방법이 있다 주장하는 너의 말도 반신반의하고 있다. 나의 권능으로 움직이는 너희들이 어찌 나를 되살린다는 말이냐?”
타당한 지적이었다.
시조의 의문에 직면한 핀레이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시조시여,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상은 흘러가고 모든 이들은 각자의 방도를 찾았습니다. 혈마법은 세상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습니다. 그건 평범한 마법과는 달리, 생명과 피로 빚어내는 주술. 그것이라면, 무지몽매한 천민들은 알 수 없으며 알아서도 안되는 그것이라면 시조의 심장을 되살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거짓말이다.
권속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은 거짓을, 핀레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했다.
긴장이나 흥분은 없었다. 그도 심장이 멈춘 흡혈귀였기 때문이다. 물론, 시조를 속인다는 죄악감은 있었으나, 그건 훗날 죽음으로 갚으면 되는 것.
그리고 핀레이는 확신했다. 이 거짓말이라면, 시조를 바깥으로 유인해낼 수 있음을.
또, 혹시 아는가? 안개 공국의 엘더와 아인, 그 강력하며 지혜로운 흡혈귀들이라면 시조의 심장을 되찾을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민이 감히 혈조술의 비의를 알 수 있을까?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여기서 그들과 함께하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흡혈귀들과 함께하는 것이 백 배는 나을 터.
그렇기에 이것은 충성이다. 핀레이는 시조를 기만하였을지언정, 여전히 시조에게 충성했다.
그렇게 자신을 속일 수 있었다.
핀레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시조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한 번 믿어보겠다. 그 방식으로, 나의 심장을 되돌려보아라.”
“알겠습니다! 지상으로 올라만 가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지금.”
“…네?”
핀레이가 멍청하게 반문했다.
“네가 아는 그 방법을 써보아라. 실패해도 좋다. 나는 너희들의 뿌리이며, 나의 권능은 그들 전부를 합친 것보다 강하니. 네가 쓰는 혈마법이 타당하다면 나는 그 가능성을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
큰일났다.
핀레이가 땀을 흘릴 수 있다면, 지금 전신이 흠뻑 젖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재연하라고?
불가능하다. 그것은 대충 지어낸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얄팍한 거짓이 실증의 눈앞에서 천박한 나신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
핀레이는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읍소했다.
“하지만, 시조시여. 저는 혈마법에 별다른 조예가 없습니다. 제 불민한 마법이 시조를 다치게 할까 저어되나이다.”
“관계없다. 가능성만 본다 하지 않았느냐. 네가 그 마법을 보았다면, 필시 흉내는 낼 수 있을 터.”
시조의 명은 절대적. 핀레이는 따라야 한다. 그러나 거짓을 고했기에, 핀레이는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거짓을 말했다고 고백한 뒤, 기만한 죄를 치러야 할까?
아니, 그럴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거짓을 고하면 안 되었다.
기호지세. 이미 산군의 등허리에 올라탔다. 남은 건, 그 끝이 어디든 질주하는 것뿐.
어둠 속에서 탁한 눈동자가 번쩍였다.
“받들겠습니다. 시조시여. 다만, 제 힘이 미천하기에, 시조의 권능이 여전하다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나이다. 그러니.”
사실 핀레이는 혈마법에 조예가 깊다. 그의 전문 분야는 지배술. 선혈의 낙인을 새겨, 그의 피로 무언가를 조종하는 권능이다.
비록 하찮은 예일링이지만, 만일. 시조께서 조금의 빈틈을 허락해준다면.
“잠시 모든 권능을 내려놓으시고, 심장을 제 앞에 드러내주십시오.”
불경이나, 불가능은 아니니.
시조께서는 바라시던 대로, 자기 의지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갖게 될 것이다.
분명 시조의 뜻대로 뛰지는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