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7)
EP.7 핏빛 글씨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탄생으로 서두를 장식하고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으며, 세월로 채워나가는 한 권뿐인 책.
이렇게 삶을 책으로 비유하자면, 나의 독심술은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말미에 새로이 쓰이는 부분만 살펴 표층의식을 읽어낼 수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훌훌 넘기며 어떤 내용인지 대강 훑어볼 수도 있다.
각을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할 수는 있지만,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가 나한테도 위험하니 넘어가고.
군국의 수도인 아미텐그라드는 주변 도시를 잡아먹고 큰 괴물이었다. 폭발적인 성장을 한 그 도시는 원래 있던 것들을 전부 다 바깥으로 밀어내며 몸을 불렸다.
사람, 집, 돈, 심지어는 사상까지.
그렇게 밀려난 것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사연이 있어서, 그곳에서 살아온 나 역시도 어지간히 다양한 사람을 경험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밑바닥에는 그보다 한 치 더 파고든 아래가 있기 마련이다. 군국이 자랑하는 대감옥답게, 탄탈로스에 기거하는 존재들은 차원이 달랐다.
개의 왕.
흡혈귀의 시조.
회귀자.
풀어놓으면 도시 하나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괴물들. 규격 외의 존재라고 자기주장하듯, 그들의 책 역시도 보통과는 궤를 달리했다.
아지의 책을 설명하자면, 고대 상형문자로 쓰인 동굴벽화를 소리 나는 대로 따라 쓴 책 같다. 읽을 수는 있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게 뭔지, 저게 뭔지. 어째서 왼쪽과 오른쪽을 이름까지 붙여가며 구분해야 하는 건지. 공이 있는데 왜 던지지 않고 있는 건지. 아지의 책에서는 그러한 개념조차 있지 않으며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다. 설명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처럼.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개랑 인간이 똑같은 논리로 사고를 전개해나갈 리가 없으니까. 내가 인간인 이상, 아지의 책을 온전히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열심히 읽는다면 기분 정도는 알아낼 수 있겠지만 그럴 바에는 고개를 들고 아지의 표정이나 읽는 게 낫다. 생각을 읽으나 표정을 읽으나 별 차이 없을 테니까.
흡혈귀의 책은 ‘두껍다’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1200년을 넘게 살아온 고대의 괴물답게, 평범한 인간의 20배에 달하는 페이지가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대충 훑어보는 것조차도 마음의 각오해야 하는 분량이다.
내용도 별로 없으면 모르겠는데 삶도 파란만장해서 뭔 대서사시를 쓰고 있다. 흡혈귀로 각성했던 일, 모멸과 핍박의 역사, 기나긴 투쟁의 역사, 군림과 몰락, 도주와 영면…. 대강 넘기면서 본 것도 이 정도라 도저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불어 당시 시대상까지 반영하고 있다 보니 난해하기까지 하다.
고문학 연구가가 보았다면 사랑에 빠질 책이지만, 안타깝게도 마음의 책은 나밖에 읽지 못한다.
나는 고문학 연구가가 아니고.
마지막, 회귀자.
회귀자의 책은 그 어떤 유형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회귀자의 책이라고 한다면, 결코 존재할 리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14권짜리 시리즈였다.
분명, 한 생애의 마침표를 찍었는데도. 비참할지언정 나름의 결말을 맞이했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반칙 같은 삶. 미련을 가진 작가가 질질 늘여 쓰는 지긋지긋한 이야기. 심지어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그 탓에 나는 대단히 곤혹스러워졌다.
분명히 읽었는데,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이번 생애를 살아가지만, 행동 원리나 사상, 경험, 얻은 능력과 장비는 모두 전생에서 얻은 것. 그녀가 행동하는 이유나 무찔러야 할 적, 미래에 일어났던 사건은 이전 권에 수록되어있다.
그러나 회귀자와는 다르게 나에겐 시간을 뛰어넘는 능력처럼 대단한 건 없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이번 시대의 이야기뿐.
굳이 비유하자면 1권부터 13권까지 건너뛴 채 최신간을 집어 든 모양새라고 할까. 얘가 여기서 왜 이러는지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미래에 내가 죽고, 세상이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못 읽어냈다. 그녀가 드문드문 떠올린 기억이나 했던 행동에서 유추할 수 있을 뿐.
알기 위해서는, 회귀자에게 직접 듣거나….
그녀가 과거를 ‘회상’하도록 해야 했다.
“에휴. 이러나저러나, 결국 회귀자와 부대껴야겠네….”
내 처지를 자각하고는, 땅이 다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무저갱이라 더 꺼질 땅도 없었지만.
유희 거리가 없는 감옥에서는 할 일이 없으면 마당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철창으로 된 정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자 별 해괴한 광경이 나를 맞이했다.
“티르칸쟈카! 너를 만나러 왔다! 문을 열어줘!”
회귀자가 지하 무기고 앞에서 양팔을 벌리고 소리치고 있었다.
지하 무기고. 혹여나 죄수들이 난동을 부릴 때,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무기들을 가득 보관해놓은 곳이다. 최소 3레벨의 연금강으로 만들어졌으며, 세 가지 보안절차를 거쳐야만 문을 열 수 있다.
다만, 감당 못할 죄수들만 모아 놓은 탄탈로스에서는 애초에 무기 대신 ‘다른 것’을 넣어둔 모양이지만. 어찌 보면 최강의 무기라고도 할 수 있고. 어쨌건 평범한 죄수들은 절대 접근해서는 안 되는 구역인 건 마찬가지다. 멋모르고 다가간다면 이유 불문하고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다.
죄수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바로 지하 무기고 앞에서, 회귀자는 무슨 의식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뭔 짓이래. 가만히 그 꼴을 지켜보다가, 문득 내가 교관을 사칭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쓰읍. 내가 교관이면 지하 무기고에 기웃거리는 교육생을 막아야 하는 건가? 괜히 막았다가 목이 베이고 싶지는 않은데.
회귀자는 전 세계를 인질로 한 테러리스트, 아니, 세상 전체를 두고 실험을 반복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다. 여차하면 이번 회차를 통째로 뒤집어 엎어고는 다음 회차로 넘어가버리는 무책임한 녀석이라고.
하지만 역할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더 의심을 받겠지. 상대는 회차를 반복하여 최선의 미래를 찾으려고 하는 회귀자다. 내가 교관도 죄수도 아닌 이질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면 더 적극적으로 제거하려고 들 수도 있다.
그래. 막자. 설마 진짜 죽이겠냐.
내가 짐짓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셰이 교육생! 지금…!”
‘칫. 방해꾼이 왔네. 하지만 여기서 방해받을 수는 없어. 내 길을 막는다면 어떻게든 치워버리는 수밖에….’
“…까지 잘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감옥 안에서 잠든 건 처음이지만, 안이나 바깥이나 잠은 똑같은 잠이더군요.”
간신히 호통을 멈춘 나는 표정을 바꿔 싱긋 웃으며 다가갔다.
설마 진짜 죽이려고 할 줄이야. 좋아, 결정했다. 앞으로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자.
“…칫.”
내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자, 회귀자는 표정을 구기고는 고개를 휙 돌리고는 모르는 체했다. 그래도 인성은 되었는지 웃는 낯에 침을 뱉지는 않았다.
응. 고마워. 나도 반가워.
나 혼자 인사를 주고받은 뒤 굳게 닫힌 무기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대낮부터 고래고래 소리나 지르고. 도대체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알 거 없어.”
“저 안에 계신 분을 만나시려고요?”
회귀자가 칫, 하고 짧게 혀를 찼다. 그녀에게는 혀를 차는 행위가 긍정의 표시인 모양이었다.
“잘 주무시는 분을 왜 깨우려고 그래요?”
“알 거 없다고.”
“나, 참. 뭔 말도 못하겠네.”
회귀자는 나를 경계하는 나머지, 내 앞에서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으려고 들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멸망으로 다가갔는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회귀자만 해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귀자가 내 곁에서 과거를 회상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태도라면 1년이 지나도 이전 회차,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캐내기 요원하다.
으음, 어쩔까. 나는 지하 무기고로 시선을 던졌다.
탄탈로스의 지하 무기고에는 무기가 없다. 평범한 다른 감옥과는 달리, 이 대감옥 탄탈로스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탈옥이 불가능한 고립된 공간. 죄수들이 도망칠 걱정이 없으니 교관도, 유사시에 죄수를 공격할 무기도 배치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안에 넣었다.
최초의 흡혈귀, 역천의 괴물, 어둠의 여왕.
시조 티르칸쟈카.
빛을 거부하고 지하로 숨어드는 흡혈귀를 위한 궁전이자, 감옥으로.
그리고 회귀자는 그 고대의 흡혈귀, 시조 티르칸쟈카를 깨우려고 하고 있다.
내 입장에서 인간의 피를 주식으로 삼는 존재가 깨어나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인간이 나 하나뿐인 지금은 더더욱.
하지만 회귀자와 말문을 터야 하는 지금,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해결해주면 관계에 진전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은 짧고 결정은 빨랐다. 그래. 회귀자를 돕자.
설마 흡혈귀가 나를 죽이겠어? 죄수 대부분이 탈출한 지금, 나는 탄탈로스에 유일하게 남은 ‘평범한’ 인간. 뱀파이어에게는 하루하루 피를 찍어내는 소중한 자원이다. 설마 잠깐의 목마름 때문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까. 기껏해야 죽지도 살지도 않은 몸으로 만들어서 영원토록 피만 짜내겠지.
…미래가 캄캄하네.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결심을 끝마친 나는 회귀자에게 제안했다.
“문이라도 부수지 그래요?”
“이 문은 티르칸쟈카의 지배 하에 놓여있어.”
회귀자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보안 장치가 있어야 할 열쇠구멍에는 붉은 빛을 내는 핏자국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에게 기운을 읽는 눈은 없지만 딱 보아도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문양이었다.
“선혈의 각인. 저것이 불길하게 빛나며 지배력을 행사하는 동안, 그녀의 피로 강화된 철문은 티르칸쟈카의 사역마나 다를 게 없어. 그녀의 명령 없이는 결코 열리지 않을 거야.”
“못 본 척 해드릴 테니까, 전력을 다해서 부숴보세요. 혹시 알아요? 며칠 동안 두들기면 깨질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나는 티르칸쟈카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거지 싸우려는 게 아니니까.”
응? 그냥 던진 말인데 왜 불가능하지 않다는 말이 나와?
평범한 인간은 통짜 강철문을 베지 못한다. 심지어 저건 군국 특제 연금강으로 레벨 3의 강도를 지닌 강철문. 마차로 들이박아도, 대포로 근접사격을 때려도 못 부순다.
그걸, 고작 ‘전력’을 다한다고 부술 수 있다고? 에이, 인간 하나가 전력을 다한다고 부서지면 안 되지. 그게 저 철문을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다.
“생각보다 상식적이네요.”
“당연한 일이지. 남의 사역마를 죽이는 건, 남의 집 대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보다도 무례한 짓이잖아.”
“참나. 느닷없이 사람의 팔을 자르려고 한 사람이 예의를 운운하다니.”
“뭐?”
“아니요. 혼잣말이었습니다.”
눈을 치뜨는 회귀자를 외면하며 생각에 잠겼다.
일반적인 지하 벙커에 쓰이는 연금강은 레벨 3. 흐음. ‘그거’를 쓴다면 아슬아슬하게 될 것 같기도 한데. 해볼까?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차임벨을 꺼냈다. 어제 아지를 조련할 때 썼던 바로 그 종이었다.
“뭐야, 그 종은?”
“개부르미 종이요.”
“개, 뭐?”
차임벨이다 보니 소리가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탄탈로스라는 공간은 세상이 집인 짐승의 왕에게 너무 좁다. 청각과 후각이 예민한 아지에게는 귓가에 울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릴 것이다.
물론 평소라면 아무리 종을 울려봐야 듣더라도 무시했겠지. 잡음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이 세상에 소리가 너무 많으니.
하지만 어제 하루 종일 이 종소리와 함께했던 녀석이라면 분명히 듣고는 온다. 그러기 위해 어제 계속, 계속 놀아주면서 반복적으로 종을 울렸으니까. 나는 종을 머리 위로 들고는 흔들었다.
딸랑딸랑.
“멍? 멍!”
작은 차임벨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리자,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직후 건물의 옥상에서 아지가 벽을 타고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떨어지는 것보다도 몇 배는 빠른 속도다. 건물 외벽을 이루는 회백색 콘크리드가 파박 깎여나가며 개의 족적이 새겨졌다. 쿵, 하고 땅에 착지한 아지는, 그 진동이 느껴지기도 전 몸을 튕겨 맹렬하게 내 쪽으로 돌진했다.
마치 고무공이 땅에 튕겨 나오는 듯한, 급격하고 격정적인 방향전환이다. 떨어지는 것보다도 빠른 속도. 치이면 사람 하나는 우습게 죽일 것이다.
나는 다급히 어제 만들어둔 고깃조각을 찾았다. 아지가 다가오기 직전 간신히 꺼내든 뒤, 지하 무기고의 문에다가 냅다 던져버렸다.
달려오던 아지는 고깃조각을 따라 나를 지나쳤고.
그 속도 그대로 철문에 들이박았다.
쿵–. 장엄하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종탑에 있는 커다란 종을 때려도 이보다 큰 소리는 나지 않을 것이다. 마치 타악기 속에 있는 것처럼, 탄탈로스의 공기가 떨리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 기분탓이겠지만 이번 충돌로 땅이 살짝 기울어진 것 같기도 하다.
경악한 회귀자가 내 멱살을 잡아챘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이야!”
“어허. 지켜보세요.”
“내가 말했잖아! 나는 티르칸쟈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우리 집 개가 들이받은 건데 어찌합니까.”
그리고, 그 충격을 만들어낸 아지는.
“맛있어! 멍! 맛있어!”
태연자약하게 고깃조각을 입에 물고는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지와 철문에 한 번씩 시선을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레벨 3의 연금강 정도는 우습게 박살 낼 위력이었는데. 각인의 강화효과가 예상을 웃도는 모양이네요. 최소 레벨 4.”
전속력으로 달려온 아지가 들이받았는데도 발자국 모양이 새겨지는 데 그쳤다. 만일 아지가 격분해서 진심멍멍펀치를 날리면 어찌 뚫을 수 있겠지만, 온화한 개의 왕이 저 철문에 화를 낼 일은 없겠지.
됐다. 안 되는 걸 확인했으니 아지는 이제 필요없다.
“종소리를 듣고 왔네. 잘했다. 자, 이제 돌아가.”
“아우우!”
거칠게 도리질을 친 아지는 꼬리를 빙글빙글 흔들며 내 곁에서 폴짝거렸다.
“놀자! 멍! 놀자!”
“어제 놀았는데?”
“그러니까 놀자!”
어제 일은 어제의 일이고, 오늘 일은 오늘의 일이라는 거지. 과거 따위는 개의치 않는 참 진취적인 짐승이다.
“오늘 나는 바빠. 안 놀 거야. 돌아가.”
“싫어! 놀자!”
아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 종아리를 무는 시늉을 했다. 하아. 고집이나 부리기는. 내가 아주 제 종이지?
이게 다 회귀자 때문이다. 어제부터 아예 버릇을 고쳐놨어야 하는데, 괜히 지켜보겠다며 나를 방해하는 바람에 당근만 주고 채찍을 못 때렸잖아. 원망을 담아 회귀자를 한 번 노려보았다.
“뭐, 뭐야? 나를 왜 봐?”
“후. 말을 말죠.”
다들 무책임해서는. 개의 권리를 챙겨주자는 사람 중에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다니까. 개를 한껏 치켜세워놓고 결국 놀아주는 건 내 몫이지.
하지만 짐승과는 달리 인간은 과거를 되새기는 동물. 나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를 해두고 나왔다. 어제처럼 공 던지는 기계가 될 수는 없다.
“자, 아지야. 내 손 냄새를 맡아봐.”
“멍!”
손을 뻗자 아지는 냉큼 코를 문대며 킁킁거렸다. 내 체취를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 가며 냄새를 맡게 했다. 충분히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감옥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차! 아지야. 큰일났어. 내가 공을 저기 안에 놔두고 왔지 뭐야.”
“멍?”
“냄새 기억했지? 내 냄새를 쫓아서 공을 가지고 와줘. 그러면 놀아줄게.”
“멍멍!”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지는 땅을 박차고는 건물 안쪽을 향해 달려갔다. 멀어지는 아지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 오늘을 위해 공을 깨끗하게 씻고는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 아래쪽에 깊숙이 찔러넣고 왔지. 개의 왕이라고 해도 찾는 데 한 세월은 걸릴 거다.
시간은 벌었다. 나는 회귀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들이박는 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네요. 자,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요.”
어라. 또 저 시선이다. 내가 강아지 다루는 게 마뜩잖다는 표정.
회귀자는 멀어지는 아지에게 시선을 한 번 건네며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아지랑은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야?”
“친해지기는. 고작 하루 놀아줬을 뿐인데요.”
“말도 안 돼. 나는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아는 체만 하는데….”
그야 네가 개를 인간 다루듯이 했기 때문이겠지. 개한테 백날 손 흔들면서 ‘안녕, 날씨가 참 좋지?’라고 인사해 봐야 개소리밖에 더 되겠어. 나처럼 당근과 채찍으로 조련하라는 말이야.
자,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다시 흡혈귀가 기거하는 지하 벙커를 어떻게 들어갈 건가 생각해야 하는데.
“어쨌건, 도그 미사일로도 열리지 않는 문이고, 박살내고 싶지도 않다면…. 안쪽에서 스스로 문을 열게 하는 수밖에 없죠.”
“갖은 방법은 다 썼어. 소리도 지르고 노크도 해봤지. 하지만 티르칸쟈카는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
“하하. 걱정마세요. 저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요.”
“네가?”
의심하는 듯이 눈을 치뜨는 회귀자.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처음 탄탈로스에 떨어졌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흡혈귀는 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그때 희미하게 생각이 읽혔지.
왜 깨어났을까? 떨어진 죄수를 반기기 위해? 아니, 그럴 위인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피를 바쳐야 해요.”
아지가 내 발목을 물고 잡아끌었을 때, 넘어지면서 살이 쓸려 피가 나왔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다 익은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듯, 아주 자연스럽게 내 피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해서 콘크리트 위에 멍울진 피를 흡수했다.
그리고 뭐, 맛없다고 투정을 부렸던가? 다시 생각하니까 또 아니꼽네. 지가 먹은 거면서.
맛없어서 일어났든 뭐든, 피에 반응해서 일어난 건 일어난 거기는 하다.
“피를 바쳐야 흡혈귀를 깨울 수 있어요.”
내가 자랑스럽게 말했으나, 회귀자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자기 손가락을 내밀었다.
“내가 그 정도 생각도 못했을 것 같아? 이미 해봤어.”
‘아직’ 검을 많이 휘두르지 않아 희고 부드러운 손가락 끝. 그곳에는 슬슬 아물기 시작한 가느다란 상처가 보였다.
“내 손가락을 그어서 피를 바쳤지. 하지만 티르칸쟈카는 일어나지 않았어. 피만 저 안으로 빨려들어갔을 뿐.”
“어라.”
“흥. 잘난 듯이 말하더니, 너도 별로 방법이 없나 보구나?”
회귀자는 팔짱을 끼며 나를 약올리듯 말했다. 내가 헛발질을 하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어이, 애써 낸 작전이 수포로 돌아갔는데 왜 좋아하는 거냐고.
흘려낸 피가 안으로 빨려들어갔다는 걸 생각하면 피를 ‘감지’할 수 있다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피를 조금 흘린 정도로는 깨어나지 않는다. 왜냐면, 흡혈귀가 피를 흡수하는 건 숨을 쉬는 것처럼 일상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음,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피로 글씨를 쓰죠.”
“뭐?”
본디 개의 왕에게 종소리란 그저 철과 철이 부딪힐 뿐인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음일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종소리는 아지에게 어떠한 감흥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함께 공놀이하고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간식을 주자, 그제야 비로소 종소리는 아지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청명한 울림으로.
시적으로 설명했지만, 조금 낭만 없게는 학습이라고 한다.
흡혈귀도 마찬가지. 그냥 핏자국이라면 빨아먹겠지만, 만일 피로 글씨를 쓴다면 분명 의식이 그쪽으로 쏠릴 것이다.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피를 느낄 수 있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피에는 의미가 담겨있지 않아, 그냥 무심코 빨아들이는 거죠. 만일 피로 글씨를 써서 뜻을 전달할 수 있다면…. 최소한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만나고 싶은지 아닌지는 알 수 있겠죠?”
“…칫.”
‘일리…가 있어. 제법 머리가 돌아가잖아. 인정해주지.’
인정한다면 말로 해줬으면 한다. 혀를 차지 말고.
“그래. 해볼게.”
회귀자가 손을 머리 뒤쪽으로 올려 허공을 부여잡았다. 그제야 회귀자의 인식 속에서, 머리 뒤쪽에서 둥둥 떠 있던 하늘의 검, 천앵의 이미지가 잡혔다. 자기 무기를 어디에 두었나 했더니, 기공으로 띄워놓고는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이라 독심술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무장인줄 알았는데, 머리 위에 칼을 띄우고 있었다니? 아무리 천앵이 무게가 없는 검이라지만, 그렇기에 더욱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한 법인데.
저건 재능만으로 이루어낸 영역이 아니다. 수년, 수십 년 동안 하나의 검을 들고 다닌 자만 도달할 수 있는, 몸이 익힌 기예. 새삼 회귀자가 보이는 것보다 경험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도대체 저 검을 몇 회차 동안 들고 다녔기에 무의식적으로 띄우고 다닐 수 있는 걸까.
앞으로는 주의해야겠다. 회귀자의 무기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핏.
검이 가로로 그어진다. 그 궤적에는 회귀자의 손가락이 있다. 달인에 가까운 솜씨로 자기 손가락을, 잘리지 않을 정도로 베어낸 회귀자는 천앵을 띄워놓고는 손가락을 들었다.
길고 흰 손가락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느다란 상처가 새겨지고, 그 틈으로 시뻘건 핏물이 몽글몽글 맺혔다.
그 뒤, 수도꼭지라도 연 것처럼 피가 쏟아졌다. 빈혈이 걱정될 정도로 많은 양이.
보기만 해도 아플 정도의 광경이지만, 신기하게도 내 마음은 가라앉은 것처럼 차분했다.
정작 상처 난 회귀자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 묘한 침착함에 경도된 나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쓰는 게 좋을까?”
회귀자는 붓이라도 든 것처럼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세우고는 말했다. 손가락 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가 돋보인다.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자, 쓰세요. 어.”
“어.”
회귀자는 떨어지는 핏방울이 획을 망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글씨를 써나갔다.
“르.”
“어르.”
“신.”
“어르, 신….”
거기까지 쓴 회귀자는, 퍼뜩 고개를 들며 외쳤다.
“어르신?”
“네. 어르신,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이렇게 적죠.”
“잠깐! 도대체 무슨 짓이야?”
“네? 무슨 짓이냐니. 문자 그대로 어른을 깨우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회귀자는 시조 티르칸쟈카라는 존재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지난 회차 동안 인연이 없었나 보다. 나는 그녀를 위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나이가 물경 1200여 세에 이르는 어른이고, 그녀가 한창 활동하실 무렵에는 연공서열이 횡행하던 때였어요. 그러니까 가능한 공손한 태도로 존칭을 해야 적합하죠.”
“아니지!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세상 어떤 여자가 노인 취급을 좋아하겠어!”
에이. 무슨 소리야. 1200년 동안 살았으면 노인이 아니라 역사서다. 어지간한 나라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설마 자기의 객관적인 나이마저도 모를까.
그때였다.
[당돌한 놈들이구나….]어둡고 깊은 목소리가 들리고, 매끄러운 쇳소리와 함께 지하 무기고의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철문 틈으로 보이는 안쪽에는 새카만 어둠이 넘실거렸다.
무저갱 탄탈로스를 비추는 광원은 대부분 탐조등이다. 날카롭고 퍼지지 않는 불빛이라 그늘진 곳일수록 어두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하 무기고에 있는 어둠은 단순한 빛의 부재와는 차원이 달랐다.
빛을 빨아먹는 것만 같은 칠흑. 그러나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 핏빛 색감이 아른거린다. 분명 새까만데, 피처럼 붉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
허나, 저 안에 기거하는 것은 상식의 잣대를 부수는 괴물.
몇 날,
몇 달,
몇 년,
몇 세기….
전설과 역사, 그리고 시대 속에 저문 인간들의 핏값. 그 모든 죽음을 수확한, 처절하게 압축되고 응집된 핏물의 역사가 저 아래 넘실거린다.
분명 이 앞에 있는 건, 강약을 논하기 이전의 신비다.
동화 속에서 회자되었으며, 역사서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전설이 되어 내려온 자.
시조 티르칸쟈카.
소름이 끼친다. 저 안에 있는 건 인간의 피를 양식으로 천 년을 살아온 괴물. 홀로 성황청 전체와 전쟁을 벌인 역천의 어둠.
괜히 봉인을 풀었나 불안해지려는 때.
[들어오거라.]굳건한 철문이 활짝 열리며, 새빨갛게 빛나는 선혈의 낙인이 나와 회귀자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