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71)
EP.71 꼭두각시 시조와 불쾌한 인형극 – 마지막
파지직.
꼬챙이 끝에서 전류가 뻗어나왔다. 그건 진혈을 타고 흘러, 시조의 심장으로 파고들더니, 혈관을 따라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두근.
익숙한 전격에 흡혈귀의 몸이 크게 반응했다. 입이 작게 벌어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몸이 학습해 버린, 심장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쾌감.
그건 흡혈귀의 이성을 깊은 수면 아래에서 끌어올렸고,
동시에 핀레이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핀레이의 전신에서 꿀렁거리는 피. 핀레이의 피부 아래 쪽에서 수천 마리의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다. 코피가 줄줄 흐르고,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져서 붉게 물들었다.
전신의 피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극심한 고통에 핀레이가 땅을 기는 사이.
흡혈귀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흐릿했던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눈동자에 노을이 지는 것처럼 새빨간 색으로 물든다. 인형 같던 얼굴에 조금이지만 생기가 돌아왔다.
요동치던 피와 어둠이 전부 침묵하고는 시조의 귀환을 기다리는 가운데.
흡혈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꿈을 꾸었다.”
싸움이 끝났다.
랄리온은 갑작스레 전투를 멈추었다. 분노한 아지는 랄리온의 육신을 수십 갈래로 찢어발겼으나, 이번에 랄리온은 재생하는 대신 흡혈귀의 주변으로 흘러오는 것을 택했다. 흡혈귀의 근처로 돌아온 랄리온이 힘 빠진 듯 주저앉았다.
“한순간이지만 꿈을 이룬 줄 알았다. 다만, 금방 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더구나. 그것을 너무, 너무 가지고 싶어서, 방법을 찾고자 했다.”
“잠꼬대가 좀 심하시더라고요. 그러게 누가 침대 놔두고 관에서 자래요?”
회귀자의 몸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진혈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잔잔하게 허공을 맴돌며 흡혈귀에게로 날아들었다.
몸을 추스른 회귀자는 멈춘 흑기사들 사이를 걸어 이곳으로 다가왔다.
“미망, 이었더냐? 잃어버린 생명이라는, 감히 바라지 말아야 할 걸 넘본 것이었더냐? 단지 소망했을 뿐인데 나는 신에게 죄를 지은 것이냐?”
“아니요. 저에게 민폐를 끼쳤을 뿐이죠.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는데, 하지 말라는 건 다 하고 다니는 교육생을 보면 제 기분이 얼마나 처참할지 생각해보셨어요? 신보다 먼저 저에게 죄를 지었다고요.”
흡혈귀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말해다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꿈을 꾼 것? 소망을 바란 것?”
“일단, 여러 가지 잘못은 있지만 가장 큰 거.”
나는 손가락을 들어, 갈비뼈를 다 드러내고 있는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신하다고 자처하시는 분이 가슴 다 까고 다니면 어떻게 해요? 보기 부끄럽네요. 품행을 좀 돌보세요.”
내 대답은 흡혈귀의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마음을 읽었으니 틀림없다.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뜬 흡혈귀가 이내 작게 웃음을 지었다.
“후후, 숱하게 본 광경이면서 무얼 그러느냐.”
“내 앞에서만 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그건 매력포인트라고요.”
“아하하핫!”
흡혈귀는 크게 웃었다. 나지 않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폭소한 흡혈귀가 한 박자 늦게 입가를 가렸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자중하마.”
“노력도 많이 하셔야 할 겁니다. 제 안에서 이미 점수 엄청나게 깎였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잠시, 흡혈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공에 떠오른 작은 태양, 그리고 널브러진 혈기와 어둠, 부스러진 흑기사와, 상처 입고 절뚝거리는 랄리온.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걸어오는 회귀자와, 옷이 엉망이 된 아지, 그리고 새카맣게 변색된 토인의 팔까지.
다 한 번 둘러본 시조는 흐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좀, 아쉽구나.”
그리고 흡혈귀는 손가락을 흔들었다.
끊겼던 핀레이의 비명이 다시 이어졌다. 지금껏 핀레이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은 건, 흡혈귀가 그에게 비명을 허락지 않았기 때문.
바닥을 구르는 핀레이를 향해 시조가 차갑게 말했다.
“시대가 많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이제는 경의조차도 제멋대로 재단하는구나. 그래, 잠깐이나마 나를 움직여본 경험은 어떠하더냐?”
“시조시여….”
헐떡이는 핀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빨이 빠져서 홀쭉 들어간 턱, 시커멓게 변색된 뺨, 그리고 아직도 제멋대로 튀어오르는 핏줄까지.
끔찍한 몰골을 한 핀레이는 다시 돌아온 시조를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제가 감당 못 할 죄를 지은 건 맞으나, 시조시여! 들어주십시오! 당신은 지상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에겐 당신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모두를 한곳으로 이끌, 가장 깊은 피가!”
“가지 않겠다.”
“어째서, 어째서입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근래에 하나가 더해졌다.”
다시 양산을 그러모은 흡혈귀가 붉은 빛이 나는 눈동자로 핀레이를 내려다보았다.
동족을 향할 때는 잠깐 온정의 빛을 띄곤 했던 눈동자도, 배신자를 향해서는 한없이 차가울 뿐이었다.
“그러기를 바란 권속이 나를 기만하였기에,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안그래도 끔찍했던 핀레이의 얼굴이 한층 절망으로 물들었다. 잠시 이 상황을 부정한 그는, 이내 찌꺼기 같은 감정을 분노로 바꾸어 토해냈다.
“어째서!! 시조시여! 당신은 우리를 돕지 않는 겁니까!!”
그 불합리한 분노를 마주하면서도 흡혈귀는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멈춘 심장을 가진 시조는 일말의 흔들림 없이 차갑게 대꾸했다.
“나는 너희를 돕는 존재가 아니다. 너 역시 나를 돕지 않았지.”
“모두가 당신을 기다려! 우리를 만들고, 이 피를 만들어낸, 우리의 뿌리와도 같은 당신을! 당신은 우리를 이끌어야 해! 승리로, 영광으로!”
“내가 너희에게 선물한 것은 삶의 연장일 뿐이다. 승리니, 영광이니. 그러한 것을 약속한 기억은 없다.”
핀레이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흡혈귀가 되어 얻는 건, 죽음의 유예.
멈춘 심장 대신, 시조의 힘을 받아 혈조술로 피를 움직인다. 그렇기에 흡혈귀들은 모두 한 번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땅 위를 걸어다닐 수 있다.
그렇게 숫자를 불린 흡혈귀들은, 인간 사이로 숨어들어가 암약하며 밤의 귀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위대한 흡혈귀는 공국의 주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조가 그것을 약속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당신을 떠받들었어!! 그런데 왜, 우리는 보답받지 못하는 거야?!”
그렇지만 언제나 이성이 논리를 따라가는 것은 아니며, 극한에 몰린 상황일수록 생각 역시도 극단으로 치닫는 법.
핀레이는 아무런 논리도 없이 마구잡이로 말을 내뱉었다. 아무렇게나 던진 돌에 맞으라는 듯.
물론, 1200년을 살아온 시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시끄럽구나.”
뚝. 핀레이의 목소리가 끊겼다. 입을 크게 벌렸으나 그 틈으로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도 거슬리고.”
그의 호흡이 끊어졌다.
“나의 권능으로 네놈의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혈조술로 돌아가던, 그의 혈류도 그대로 멈추었다.
단 한순간, 생명을 이루는 활동이 전부 정지된 핀레이는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렸다. 공포가 조금 늦게 찾아온 건 단지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핀레이는 한층 객관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마주했다.
‘안, 돼. 이대로 죽으면. 나의 혈주와, 우리 동족과, 흡혈귀라는 종이.’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것까지, 전부.”
딱. 흡혈귀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어깻죽지에서 피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혈관 속에서 맹렬히 회전하던 피는, 어느 순간 더욱 강렬하고 날카로워지더니, 이윽고 살점까지 갈아버리며 점점 크기를 키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핀레이의 오른팔이 펑 터져나갔다.
비명조차 허락받지 못한 핀레이는 눈만 부릅뜨고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끄억, 끄어어어. 어, 어째서. 이토록 아픈. 나는, 밤의 귀족인데!’
그러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한 팔과 두 다리가 남아있었으므로.
딱.
왼팔에 고인 피가 톱날처럼 그의 몸 안을 갈아버렸다. 핀레이는 정신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려고 했다. 그러나 움직임조차 허락받지 못하였기에, 핀레이의 몸은 파들파들 떨릴 뿐이었다.
딱.
이번에는 왼다리였다. 혈관이 가닥가닥 끊어지며 제멋대로 날뛰었다. 채찍처럼 제멋대로 날뛰는 혈관이 전신을 찢어발겼다. 피부 사이사이로 핏방울이 새어나왔다.
‘아파아아아! 커헉, 허억! 아파, 아파!’
딱.
마지막 오른다리. 이번에는 핏방울이 바늘처럼 날카롭게 변하여 그의 몸속을 헤집었다. 바늘이 혈관을 돌아다니는 고통에 핀레이의 정신이 반쯤 사라졌다.
이윽고, 그의 팔다리가 전부 떨어졌을 때.
핀레이는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되뇌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일….’
정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단말마. 최후의 최후에 존엄을 지키기 위해 매달리는 하나의 동아줄.
흡혈귀는 벌레처럼 몸부림치는 핀레이를 보고도 한 점의 안타까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덤덤하게 자기 할 일을 할뿐.
“-그리고 살아있는 것까지. 거슬리기 그지없어.”
곧장 핀레이를 죽여버리려는 흡혈귀를, 나는 제지하고 나섰다.
“잠깐만요, 티르칸쟈카 교육생.”
기이한 열망을 느꼈다.
왜, 어린 시절에는 조금 악동스러운 장난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행군하던 개미 한 마리가 홀로 떨어졌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얇은 거미줄에 매달려 내려오는 거미는, 얼마나 세게 흔들어야 떨어질까.
상하고 해진 밧줄은, 얼마나 더 당겨져야 가닥가닥 끊어질까.
“안녕하세요, 핀레이.”
미안, 핀레이.
갈 땐 가더라도, 자기 마음엔 솔직해져야지.
“저는 당신에게도 기회를 줬어요.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었죠. 그런데 당신은, 가장 멍청한 선택을 해버렸군요.”
‘…나는, 혈족을… 위해….’
“하지만, 아시죠? 중간에 되돌릴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분명히 그 점을 깨닫고 있었고요. 만일, 이대로 티르칸쟈카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가, 안개 공국으로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하찮은 예일링이 감히 시조를 지배하려고 들었다는 건, 절대 용서받지 못할 중죄인 것을.”
‘…알아. 목숨은… 아깝지, 않.’
“혈족을 위해 저질렀다는 핑계. 참 좋아요. 하지만 우리, 조금만 더 솔직해지죠?”
죽음 직전에서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마지막 동아줄.
하지만 그 정체를 아는 나로서는, 건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당신, 시조를 기만하고 지배하려고 할 때 말야. 당신이 그토록 떠받들고 충성하는 혈주랑, 목숨을 바쳐서라도 위대하게 만들고 싶었던 혈족의 안위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았잖아?”
‘…뭐?’
드디어 이쪽을 봐주는구나.
나는 싱긋 웃으며,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과장된 태도로 흡혈귀에게 물었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핀레이는 감히 시조의 힘을 탐하는 중죄를 저질렀네요! 이것은 흡혈귀 역사상 처음이며, 다시없을 끔찍한 하극상! 그렇다면, 그 중죄를 저지른 핀레이는 어떻게 처벌하죠?”
나의 물음에, 흡혈귀는 왜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한 태도로 대꾸했다.
“멸족이다.”
‘…멸, 족?’
흐릿한 이성 속에서 두 단어가 명확히 새겨진다.
멸족. 하나의 혈족을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그 뿌리부터 끊어내겠다는 악의를 담은 끔찍하고 가혹한 처벌.
공국에서도 존재하기만 할뿐 실제로 시행된 적 없는 그것을, 시조 티르칸쟈카는 간단히 입에 담았다.
“권속 주제에, 주제넘게도 나를 지배하려 들었다. 보다 윗줄의 피를 향한 권속의 죄는, 그 혈주가 치러야 하는 것.”
그러나 핀레이가 몰랐던 것.
1200년? 아니, 불과 몇백 년 전만 해도, 멸족은 아주 흔히 사용되는 처벌이었다.
‘잠, 깐. 설마.’
드디어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이래서 세대차이가 무섭다니까.
나는 더 정확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흡혈귀에게 물었다.
“그러면 에르테 백작이라는 분은 어떻게 되죠?”
“그는 핀레이의 혈주가 아니더냐?”
흡혈귀는 뛰지 않는 심장을 가졌다. 1200년 전, 그 혼돈과 암흑의 시기에 흡혈귀는 태어났다. 사람으로 한 번, 그리고 흡혈귀로 한 번.
시조는 자기가 만들어낸 이들의 운명을 동정한다. 태양을 마주하지 못하며, 인간에게 경멸받는 이들을 동정한다.
그러나 동정심이 죄를 덜어주는 일은 없다. 벌도 감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라져야겠지. 발다미르가 아쉬워하겠구나.”
싸늘한 선언.
그 안에 배인 냉정함을 느낀 핀레이가 몸을 떨었다.
‘안, 돼.’
핀레이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입이 닫혀 있으니, 어디까지나 마음속으로만.
‘아무리 시조라고 해도, 아인을 그리 마음껏 죽일 수는 없어! 그분은 적혈공의 공신이니까! 내, 어디까지나 내 독단인데! 나의 혈주를…!’
부정하고.
‘어떻게 얼굴도 비추지 않았던 시조가! 공국의 공신을 멋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냐!’
분노하고.
‘제발! 이건 내 독단이야. 혈족은 아무런 죄도 없어’
애걸한다.
그러나 그 애절한 생각은 오직 나에게만 전해졌을 뿐이다.
나는 그의 곁에 쪼그려 앉아서 말했다.
“핀레이. 당신은 답을 알고 있었어요. 거짓말을 꾸밀 때, 이 모든 건 혈주와 혈족을 위해서라고 자위했죠.”
타인을 위하는 마음, 그건 참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유로 자주 사용하는데,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치고는 의외로 자주 방치한다는 거.
그러니까, 혈주를 위한다는 말은 그냥 심리적인 도구일 뿐이다. 톱이나 망치같은.
“그런데 왜, 들켰을 때 혈주와 혈족이 어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미처 생각을 못 했나? 너무 끔찍한 미래라, 생각하기를 거부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딱히 중요하지 않았던 걸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핀레이의 진심은.
“왜냐면 나는 시조를 조종할 수 있는 개쩌는 흡혈귀니까. 잠시나마 신이 되었으니까. 혈족 따위는 생각지도 못했겠지.”
몸이 떨린다. 핀레이의 눈에 공포가 감돈다. 팔다리는 다 떨어져서 없는데,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정신이 나에게로 손을 내밀고 있다. 그의 환상 속에서 필사적으로 떨리는 손이 뻗어 나간다. 그 손이 나의 손을 잡고는 애걸한다.
‘안 돼! 안, 안 돼! 안 된다고!’
“안녕히 가세요, 핀레이. 당신의 사랑은, 경애는, 충성심은 잠깐 깜빡하는 종류의 감정이었어요. 뭐, 어쩔 수 없죠. 사람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걸 머리에서 지워버리는 아주 좋은 능력이 있으니까요.”
‘아. 나는.’
“그래도 당신은 아무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루었네요. 권속 주제에 시조를 조종해보다니. 분명 역사에 길이 남긴 할 거예요. 당신의 혈족은 남지 못하겠지만.”
‘단순히 눈이 멀었던 건가.’
“보내주시죠, 티르칸쟈카.”
그리고 핀레이의 생각이 멈췄다.
흡혈귀가 남은 권능을 거둬가는 것으로, 삶의 연장은 오늘 만기를 맞이했다.
나는 핀레이의 눈을 감겨주었다. 별 의미는 없었다. 그의 육신은 곧 먼지처럼 부스러졌기에.
그래도, 끝에 가서야 간신히 솔직해진 영혼에게. 나는 작게 애도를 표했다.
침묵이 흘렀다. 허공에서 빛나던 유사 태양의 빛도 사그라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때 아닌 장례가 끝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움직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던 흡혈귀가 말을 걸어왔다.
“핀레이의 혈족에 대한 처벌은 천천히 내리겠다. 당장 지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지 않느냐.”
처벌?
알 게 뭐야, 그거.
나는 딱히 핀레이의 혈족을 다 죽여버리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냥, 그가 자신의 본심을 알아주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 그런데 티르칸쟈카 교육생. 혹시 그거 아세요?”
나는 연좌제 같은 거 반대하는 쪽이라고.
“연좌제는 최근에 폐지되었어요.”
“뭣?”
“요즘은 죄 지었다고 가족까지 처벌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공동 책임으로 돈을 갚는 경우는 있어도.”
흡혈귀는 대단히 크게 놀랐다. 다른 기술이야 늘 접해보는 것이면서도, 도덕관의 변화는 흡혈귀 입장에서 쉽사리 인정하기 힘든 부분이었던 것이다.
새삼 새로운 지식을 접한 흡혈귀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래서야 죄를 어떻게 벌하며, 핀레이처럼 제 꼬리를 자르듯 도망치면 어찌 책임을 물 것이냐?”
눈을 반짝이며 표하는 순수한 의문.
하나하나 대답했다간 또 몇 날 며칠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대충 대답했다.
“제가 폐지한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