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74)
EP.74 티르칸쟈카의 책 – 구약(상)
지하 무기고, 그 가장 깊은 곳. 흉한 조각이 어둠을 경배하는 마지막 방.
음산한 기운이 흐르고, 공기는 죽은 듯 멈추어있다. 바람 소리조차 하나 나지 않게 고요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아래, 고급스러운 제향나무 관을 침대 삼아 한 소녀가 누워있다. 희미한 은발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흡혈귀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 속에 다소곳이 누운 흡혈귀는, 순수한 의문을 담아 나에게 말했다.
“정말, 이걸로 되는 것이냐? 심장을 드러낼 필요는 없느냐?”
“지금은 심장을 드러낼 필요 없어요. 대신, 이걸 쥐고 계세요.”
흡혈귀의 손에 카드 한 장을 쥐여주었다. 하트 1, 카드의 문양을 확인한 흡혈귀가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필 심장이로구나. 왜, 부적이라도 되느냐?”
“아니요. 인사하세요. 앞으로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새로운 심장이 될 거예요.”
“으응?”
흡혈귀가 다시 카드를 바라보았으나, 카드에서 별다른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마저 설명했다.
“당연히 진짜 심장은 아니죠. 암시를 위해 비슷한 모양으로 준비해둔 거예요. 그거 양손에 꼭 쥐고 가슴에 모으세요.”
흡혈귀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 말에 따랐다.
한때는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말에 복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런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역시 그냥 독심술 정도만 쓰면서 사는 게 좋아.
“자아. 티르칸쟈카 교육생. 눈을 감고 숨을 편히 내쉬세요. 피가 고요히 흐르도록 몸에서 힘을 빼시고요…. 이 점은 딱히 제가 시키지 않아도 되겠지만.”
어차피 흡혈귀의 피는 고요하게 흐르니까. 나나 신경 쓰는 편이 낫겠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감이 나의 몸을 꽉 조인다. 전혀 반갑지 않지만, 내가 직접 맞이한 손님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제향나무 관 머리맡, 흡혈귀의 머리와 가장 가까운 쪽에 자리를 잡았다. 얼굴이 가깝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새빨간 눈은 여전히 붉게 빛났다.
그 눈을 마주하며 나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당신은 심장이 뛰지는 않지만, 피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심장이 필요하지 않은 셈입니다. 심장을 되찾는다고 당신이 가진 능력이 사라지지도 않을 거고요. 어찌 보면, 당신은 무용한 것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심장을 되찾기를 원하십니까?”
“…바란다.”
“어째서입니까?”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모순적인 말. 하지만 그 안에는 흡혈귀의 응어리진 소망이 담겨있었다.
“어째서입니까? 누군가가 원망스러울 때, 아무런 고통 없이 그들을 잘라내는 능력이라면 괜찮지 않습니까? 평범한 사람은 물론이고, 위정자라면 더더욱 탐을 낼 능력인데요.”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나를 시험하려 하느냐?”
흡혈귀가 짐짓 화를 내며 말했다.
“나도 인간일 적이 있었다. 비록 과거에 놔두고 왔으나, 무수한 낮과 밤이 지나도 그 시절이 나를 잡아끈다. 그 불티처럼 짧은 시간은 너무 오래되어 빛이 바랬지만,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건 그 시간이었다. 내 마음이 내 뜻대로 안 되었기에 나는 바뀔 수 있었고… 죽은 이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뀔 수 없었지.”
“그런가요.”
이미 읽은 내용이지만, 나는 모르는 척 대답했다.
흡혈귀의 목적은 피를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녀는 이미 자기 의지대로 피를 조종할 수 있으며, 원한다면 원래 있던 심장을 갈아버리고 똑같은 모양의 심장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단순히 자기 심장을 쥐어 짜는 방식으로 심장이 뛰게 할 수도 있다.
혈조술의 극에 달한 그녀는, 그녀의 신체에 한해서는 조물주나 다름이 없다….
시조 티르칸쟈카는 그게 싫었기에.
조종하는 능력으로 조종당하지 않는 것을 만들 수가 없었기에, 자꾸 타인에게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접수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바람을 이루어드리죠.”
바람은 본디 스쳐 지나가는 것이나, 가끔 이렇게 고이고 고인 바람이 있기 마련이다.
독심술을 가진 나는 마음의 창을 멋대로 열어보다가 가끔 그런 바람에 정면으로 얻어맞고는 만다.
이번에도 당해버렸고.
나는 눈을 감고는, 내면의 어둠 속으로 깊게 침잠했다.
희미한 촛불이 어둠을 밝힌다.
잊힌 이들의 책이 빼곡히 꽂힌 초라한 도서관에는, 사서를 위해 예비한 작은 촛불이 있다. 눈앞 한 페이지나 비출 법한 아련한 촛불. 이건 책과 책을 지키는 이를 구분하는 작은 빛이며, 사서가 관리인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
초를 들어올렸다.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듯 연약하고 흐릿하다. 한 줄기 바람이 불면 바로 꺼져버릴 듯 가녀린 불꽃.
그에 비해, 눈앞에 있는 책은 두껍고 무겁다. 백과사전도 이토록 방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권이면서도 서사시를 엮은 듯한 서적. 이 조그만 초로 다 읽으려면 이러한 초가 몇십 개는 더 필요할 것이다….
하나,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을 하기 위해선 사서는 필요치 않다.
내려다보는 것으로는 책에 쓰인 글자만 읽을 수 있을 뿐. 그렇기에 객관적이나…
그래서야 종이에 밴 냉기와, 아련한 향기와, 눌린 자국과, 여백에 두고 싶었던 것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잠깐 사서를 그만두기로 했다.
촛불을 향해 입바람을 불었다.
훅, 불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세상에는 어둠이 있었다.
달조차도 고개를 돌려 버린 그믐날. 세상에는 빛 한 점 없다.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집안으로 숨어들며,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양손을 모은 채 그것이 물러가기만을 기도한다.
그런 칠흑 같은 밤에, 한 부녀가 달구지를 끌고 어둑한 밤길을 걷고 있다.
밤길을 걷는 이들은 둘 중 하나다.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을 위협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급하거나.
아니면 어둠이 그들의 모습과 더불어, 죄를 가려주기를 바라거나.
이들은 후자였다.
“티르, 미안하다. 네가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아버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소녀는 얼굴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며 해맑게 웃었다.
“괜찮아요. 밤 산책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걸요. 알다시피, 저는 밤하늘 올려다보는 걸 좋아하잖아요.”
그러나 그 미소가 자신이 아닌 아버지를 위해서라는 것을, 소녀와 아버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죄책감에 흐려진 얼굴로 말없이 달구지를 끌었다.
나무 달구지는 부드럽고 미끄럽게 나아갔다. 혹여나 소리가 날까, 가죽으로 바퀴를 씌우고 삐걱거리는 축에 기름칠을 잔뜩 했기 때문이다.
새어나가는 소리마저도 감추려는 의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에, 그들은 이토록 조심스레 움직이는 걸까.
그 답은 달구지 안에 있다.
흔들거리는 달구지, 모포 하나로 뒤덮은 그 안쪽에는.
저번 주에 매장한 시체 한 구가 늘어져 있었다.
생명을 잃은 시신은 대지모신의 품에서 안식을 얻는다.
따라서 그 안식을 방해하는 것은 대단히 사악한 행위로 여겨졌다.
그마저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파낸 시체를 훼손하는 것은? 이를 데 없다. 돌팔매나 화형처럼, 모두의 본보기가 되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
그러나 죄악은 언제나 저지르는 자가 있는 법.
“티르. 보렴. 피가 흐르는 길은 이렇게 나 있단다.”
아버지가 칼로 시체를 벗겨냈다. 고기를 다루는 것과는 상이한, 그렇기에 더욱 끔찍하고 역겨운 방식으로.
피부부터 근육까지 한 겹 한 겹 걷어낸다. 몸을 빈틈없이 싸맨 가죽을 벗겨내면, 끈적한 막이 그 뒤를 따른다. 칼로 막을 자르고 잡아 찢어야 진짜 시작이다.
근막이 붙은 뼈를 억지로 잡아 뜯으면 죽은 피가 고인 내장이 그들을 반긴다. 이것들은 부패해있거나 상해 있기에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 조심스레 잘라 밖에 떼어 내거나 한쪽으로 밀어두며 점점 몸 깊숙이 들어선다.
그리고 드러난 심장과, 핏줄.
아버지는 기다란 막대로 핏줄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곳은 심장이다. 우리 몸의 근원이자, 피를 깨끗하게 만들어내는 곳이지. 모든 피는 이곳에서 시작한단다. 심장이 뛸 때, 피가 출발하여 전신을 돈단다. 심장에서 나가는 피는 안쪽에, 그리고 몸을 한 바퀴 돌아오는 피는 바깥쪽에. 그렇게 몸은 커다란 고리를 이루며 순환하는 거란다.”
이미 수십 번 들은 내용이었으나, 아버지는 꼭 새로운 시체를 뒤적일 때마다 강조하곤 했다.
아비가 말한 내용을 당장이라도 달달 외울 수도 있었지만 소녀는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중간 과정을 잘 모르겠단다…. 아무래도 들어오는 피가 잠시 내장에 고였다가 빠지는 것 같은데, 이미 죽은 몸에서는 확인하기 어렵구나. 네 도움이 필요하다, 티르.”
“알았어요.”
소녀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안쪽에서 새빨간 핏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여 몸속 깊숙이 숨었던 핏물들. 딱딱하게 굳었던 혈액이 소녀의 부름을 받아 잠에서 깨어나 서서히 움직인다.
소녀는 피를 끌어올리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쪽으로 밀어넣으면 될까요?”
“부탁한다. 늘 고맙구나, 티르.”
흙장난하던 제 나이대의 아이들과 달리, 치료사인 아버지와 함께 무덤과 시체를 파헤치곤 했던 소녀는 기이한 힘을 얻었다.
피를 조종하는 능력.
기껏해야 까진 상처의 피를 멎게 하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이는 그의 아버지가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다.
딸이 자신의 범죄에 함께하는 것을 꺼렸던 아버지는 그날 이후 소녀가 일을 돕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능력은 특별했고,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녀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아버지를 도왔다.
“이 길을 따라, 이대로 피를 흘려보내면 되는 거죠?”
“그래. 네가 피를 밀어 넣으면, 내가 내장에 피가 고이는지 보마.”
꽤 유능한 치료사였던 아버지는, 어느 날을 계기로 점점 발전하는 치료사가 되었다. 어찌나 용하다고 소문이 났는지 건너 마을에서도 알음알음 찾아올 정도였다.
그는 순식간에 마을의 자랑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내심 그를 자랑스레 여겼다.
“…네 어머니가 죽었던 건, 허파에 피가 가득 고였기 때문이란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빠져나가야 할 피의 통로가 망가져 있었지. 이 껍데기가 꼭 성긴 삼베처럼 구멍이 나 있었단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소개할 때면, 불행한 병으로 아내를 잃고 나서 그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였다는 이야기를 빠뜨리질 않았다.
지병이 있던 아내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 이후 각성한 치료사. 얼마나 알기 쉽고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티르, 만일 우리에게 다친 피의 통로를 찾아내고, 그것을 치료할 능력이 생긴다면…. 우리는 병을 정복할 수 있단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를 계속 봐온 소녀는 알고 있었다.
그 각성은, 시체들의 산 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네 어머니를 죽인 병을…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 있어.”
그리 말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기이한 광기와 열망이 뒤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치료사였다.
의원이라 하기도 뭣하다. 직업에 맞추어 일을 정하기보다는 주어진 일에 맞추어 살아가던 이 시절, 마을에는 굉장히 복합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한두 명쯤 있기 마련이었다.
티르의 아버지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귀족 출신이나 그다지 유복하지 않은 가문의 칠남이었던 그는, 가문에서 물려받은 건 반반한 외모와 고급스러운 언변 그리고 책 몇 권 분량의 지식이 가진 전부였다. 거친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정확히 설명한 순서대로 유용했다.
떠돌다가 어느 마을의 여인과 눈이 맞았고, 정이 들었으며, 그대로 결혼하여 정착했다.
그는 아이들의 선생이기도 했으며, 치료사이기도 했고,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교섭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가 마을에 녹아드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오랜 지병이 있었다. 아이를 낳은 이후 병색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책 몇 권에서 얻은 지식도 그녀를 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슬픔의 시간은 다가오기만 할뿐 멀어지지를 않았다.
어느 날, 차가운 눈이 내리던 밤. 소녀의 어머니는 소복이 쌓인 눈 위에 붉은 피를 흩뿌렸다. 세찬 바람이 아버지의 비통한 외침을 가려주었다.
그때부터였다. 아버지가 시체에 손을 대게 된 것은.
처음에 아버지는 소녀 몰래 행동했다. 그러나 억척스럽게 집안을 꾸려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연스레 그 일을 이어맡게 된 소녀는 금방 아버지의 일탈을 눈치챘다.
당연하게도, 처음에는 소녀도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시체를 해부하고 해체하는 모습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러나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버지를 저버릴 수는 없었기에, 소녀는 꾹 참고는 곁을 지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녀는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
아직 어려서였을까, 아니면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배워서였을까. 그때부터였다.
소녀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는, 시체를 해부하는 기행을 저지른다는 것 말고는, 대단히 훌륭한 어른이었다. 다친 사람을 보살피고 낫게 했으며 뭇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누구보다도 많은 시체를 만졌으나, 정작 아버지가 누구를 죽인 건 없었다. 환자를 구하면 구했지.
시체를 파헤치는 건 중죄다. 악마의 종자로 낙인찍혀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이미 죽은 육신, 어차피 짐승이 뜯어먹거나 벌레나 곰팡이가 갉아 먹을 것. 그걸 아버지가 사용해서 죽어갈 사람을 살린다면.
어느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즈음, 소녀는 피를 다루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협력자를 넘어, 대등한 동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