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76)
EP.76 나상실
두근, 두근.
낯선 소리가 고요한 방에 울려퍼진다.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을, 갓 태어난 새가 연주할 법한 작고 연약한 박동이다.
심장이 들려주는 가장 원초적인 음악.
규칙적인 리듬과 거기서 뻗어나오는 독특한 변주를 가진, 하나의 생명이 갖는 고유한 박자.
그 운율 속에서 티르칸쟈카는 눈을 떴다.
티르칸쟈카는 너무 오래 자버린 아이처럼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어둠을 바라보던 티르칸쟈카는, 곧 황망한 얼굴로 자기 몸과 얼굴을 더듬었다.
“내가… 언제 잠들었지?”
분명히 중간까지는 눈을 뜨고 있었다. 눈앞에는 그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무언가를 하는 모양이었으나, 티르칸쟈카는 그동안의 경험으로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도저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티르칸쟈카는, 가만히 누워서 그를 지켜보았다.
티르칸쟈카는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토록 긴 세월을 버틸 수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음에도 흘러가는 밤하늘을 온종일 가만히 본 적도 있고, 내키면 지하로 파고 들어가 백 년 정도 잠들곤 했다.
고작 몇 시간, 며칠 정도 사람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일이 그다지 지루하지 않기도 했고.
어느 순간, 죽은 듯이 앉아있던 그가 움직였다. 예고 없는 행동에 티르칸쟈카가 잠시 의아해하는 동안, 그의 손이 티르칸쟈카가 쥐고 있는 카드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이 카드에, 그리고 티르칸쟈카의 몸에 닿았고.
그 순간 티르칸쟈카는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잠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를 깨운 건, 몸속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규칙적인 박동.
오랜만에 귀향한 떠돌이처럼, 낯설면서도 어느 순간 자연스레 풍경에 녹아든 듯한 흔들림이었다….
“심…장?”
그걸 깨달은 순간, 티르칸쟈카는 급히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손바닥을 포갠 채 조용히 박동을 느끼던 그녀는 곧 경악에 찬 탄성을 질렀다.
“말도… 안 돼.”
심장이 뛰고 있다. 확실하게, 의심할 여지 없이.
느리지도 않다. 기계처럼 규칙적이지도 않다.
티르칸쟈카조차 잠시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자연스러웠으며, 동시에 먼 옛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리운 떨림이었다.
심장에 전기를 흘려보냈을 때처럼, 잠시 일어나다가 사그라드는 반짝임이 아니다. 이건, 분명히 그녀의 박동이었다.
예전에 뛰었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티르칸쟈카는 본능으로 그것을 알았다.
“설마. 정말로 해내다니…. 도대체 어떻게.”
티르칸쟈카는 자기 몸을 점검했다. 혈조술의 극의에 이르러 전신의 피 하나하나를 조종할 수 있는 그녀는, 심장을 망가뜨리지 않게 주의하며 흔적을 되짚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영영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1200년 동안 혈조술을 갈고 닦으며, 몸 바깥의 피까지 조종하곤 한 티르칸쟈카는 금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냈다.
그리고는 의문에 휩싸였다.
“혈조…술? 흡혈귀도 아니면서 어떻게? 나는 분명 셰이에게만 가르쳤는데….”
혈조술은 배우고자 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생전의 티르칸쟈카도 스스로 터득했고, 셰이도 몇 주 걸리지 않아서 금방 익혔으니까.
뿌리만 따지자면 혈조술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기공의 일종이었다.
다만, 아무리 혈조술을 익힌다고 한들 보통 자기 몸 안의 피를 조종하는 게 한계이다. 셰이도 그것을 알고 실혈을 멈추거나 자기 몸을 강화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티르칸쟈카처럼 재능과 우연, 그리고 경험이 합일하여 개화하지 않는 이상, 혈조술을 타인의 몸까지 뻗어가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그는 혈조술로 티르칸쟈카를 바꾸었다. 그것도.
“내가 버린 것을…. 예전, 살아남기 위해 버렸던 것들을….”
한참 전, 그저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버려야 했던 것들.
기억 한편에 밀어두고는 영겁의 세월 방치한 것들.
너무나도 오래되어 나중에는 그러한 게 있는지조차 까먹은 것들.
그 모든 것이, 가슴에 있는 한 장의 카드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서랍장 한구석에 고이 보관해두었던 낡은 일기장처럼, 추억을 담아 땅속 깊숙이 파묻은 보물상자처럼.
아득한 향수(鄕愁)가 티르칸쟈카의 가슴을 스쳤다.
눈물이 나왔다.
이 역시, 분명 티르칸쟈카가 잃어버린 것.
기쁨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며, 티르칸쟈카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되뇌었다.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정말, 해주었구나….”
당연히, 의문은 많았다.
어째서 그러한 추억을,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릴 수밖에 없던 몸의 기억을 알아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한 장에 카드에 담아 티르칸쟈카에게 새겨넣을 수 있었는지.
알려주지도 않은 혈조술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전부 궁금했으나… 그건 부차적인 것이었기에.
“고맙다. 이 은혜를, 내가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말만 하려무나.”
글썽거리는 눈물. 한때 잊어버렸던 그것을 눈가에 맺고는, 티르칸쟈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주겠다. 말해다오.”
그는 피곤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대로 잠들게 해주고 싶지만, 변변한 침대 하나 없는 이곳에서는 그리 잘 자지 못하리라. 티르칸쟈카는 그를 깨울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그의 어깨에 닿는다. 그에 반응하여, 그는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가 티르칸쟈카와 마주했다.
“…세요.”
티르칸쟈카는 어떤 요구가 나오더라도 흔쾌히 수락할 생각으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가 그녀에게 준 것은, 그 정도로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누구…세요?”
그러나.
애틋함도 잠시.
그 입에서 나온 말에는 티르칸쟈카조차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셰이는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하 무기고를 감시 중이었다.
교관이 티르칸쟈카와 무슨 의식을 치르겠다고 말한 지 벌써 사흘이었다. 그날 이후, 저 굳건한 강철 문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안쪽에서는 조그만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고, 내부가 통짜 강철이라서 꿰뚫어 볼 수도 없었다. 그저 바깥에서 언제 문이 열리나 기다려야 했을 뿐.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설마 엄한 짓은 아니겠지…?’
셰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한 생각이다. 애초에 흡혈귀는 흡혈욕구나 혈주를 향한 경애 말고는 아무런 욕구를 느끼지 못할뿐더러, 그도 지금껏 의심스러운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비약이다.
하지만, 솔직히 셰이가 의심이 많아진 데에는 교관의 책임도 꽤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의식을 하길래 저토록 의뭉스럽게 군다는 말인가.
‘치잇…! 사흘이나 갈 거면 설명이라도 좀 더 자세히 해주고 가라는 말이야! 나는 궁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이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수가 없어 괜히 그를 탓하고 있을 때쯤.
“멍멍!”
아지가 입에 공을 문 채로 다가왔다. 회귀자가 마당에 자리 잡고 문을 지켜보는 동안, 심심했던 아지는 그걸 놀이의 전조로 여기고 셰이에게 공놀이를 요구하고는 했다.
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셰이도, 그러한 요청이 올 때마다 응해주었고.
다만, 놀아주는 과정과 결과는 평소 그가 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공을 쥔 셰이가 다른 손으로 천앵을 들어올렸다.
“천검기, 순풍.”
“멍?”
아지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셰이가 천앵을 휘둘러 공을 날려 보냈다. 바람을 두른 공은 스스로 솟구치거나 떨어지면서 마당을 종횡무진 날아다녔다.
그렇게 잠시간 여유를 얻은 셰이가 다시 닫힌 문을 노려볼 때였다.
아지가 공을 쫓을 생각도 하지 않고 주저앉더니 셰이의 발밑을 탁탁 두드렸다. 셰이의 시선이 다시 아지에게로 향했다.
“아지? 왜?”
그러자 아지가 못내 불만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멍! 너, 안 놀아! 나만 놀아!”
“어?”
“멍멍! 멍멍멍! 너, 재미 없어!”
“아니, 아니, 잠깐.”
불만이 어지간히 쌓이고 쌓인 모양이다. 지금껏 알아서 놀다가 슬쩍 사라지곤 하던 아지는, 이번에는 단단히 벼른 듯 셰이를 향해 쉴 새 없이 짖었다.
인간에게는 한없이 호의적인 개의 왕.
그 왕의 불만에 직면하자 셰이는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아니야, 나는. 그, 조금 쉽게 하려고.”
“멍멍머멍!”
인간에게 호의적인 개의 왕이라고 너무 쉽게 본 걸까?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셰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공을 불러들였다.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온 공이 셰이의 손에 붙잡혔다.
“알았어. 지금부터는 잡기술 쓰지 않고 손으로 던질게. 그럼 만족하니?”
“왈! 아냐! 왈왈!”
아지가 크게 한 번 짖고는 셰이에게서 몸을 홱 돌렸다. 그 착하다는 개의 왕에게 거부당한 셰이는 멍청하게 그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셰이가 자기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으으. 잘 모르겠어. 도대체 그 녀석은 어떻게 아지와 그리 잘 지낸 거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셰이도 은근히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산재한 여러 의문을 해결해줄 사람도,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할 사람도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조금은 정이 들었을 수도 있고.
그때였다.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