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83)
EP.83 이름이 뭐예요
임시 심문은 아주 빠르고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티르가 모른 척 시선을 피하는 동안, 책상과 의자를 끌어온 셰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양손에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자. 먼저. 지금까지 영 기회가 안 생겨서 묻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셰이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직면한 그는 불안한 듯이 티르를 쳐다보았지만, 티르는 입을 꾹 닫고는 양산을 내려 시선을 가릴 뿐이었다.
독대하게 된 셰이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름은?”
셰이의 위압적인 기세에 압박을 받은 그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티르.”
“응? 나를 불렀느냐?”
티르가 양산을 살짝 올렸다. 셰이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내 질문을 잘못 알아들었나 봐.”
셰이는 다시 한번 그를 노려보며 보다 또박또박하게 물었다.
“아니, 네 이름 말이야.”
“티르….”
한 번은 실수라고 쳐도 두 번부터는 필연이다. 자기 이름을 두 번 연속 티르라고 소개하니, 티르는 의아해하며 다가왔다.
“혹 나와 이름이 같느냐? 티르? 그것 참 굉장한 우연이로구나.”
“아닐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방금 티르라는 이름을 들어서 헷갈리는 모양이야. 잠깐.”
셰이가 천앵을 쥐고는, 곧게 들고는 옆면을 앞으로 향했다.
천검기, 천경(天鏡).
신기루는 하늘에 비친 땅의 그림자. 충분히 멀리 펼쳐진 불균등한 공기는 빛을 이리저리 휘게 만든다.
압축된 공간 그 자체인 천앵이 빛을 굴절시켜 그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었다. 셰이가 거울에 비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봐! 티르 말고, 이 사람! 거울에 비친 너 말이야!”
“나…. 내, 이름.”
순간 그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 나타나는 격렬한 변화였다. 그는 고통에 물든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숨을 급격하게 들이쉬었다.
셰이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보다 못한 티르가 나섰다.
“여기까지 하자꾸나. 아무래도 마음만 너무 앞섰던 것 같다. 물어볼 게 있으면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알아내도록 하자꾸나.”
그러나 셰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봐. 분명히 기억해낼 거야. 아무리 자아를 잃었어도 이름처럼 오래되고 자주 쓰인 정보는 쉽게 잊지 않아. 평생 함께 해온 이름마저 잊을 정도면 언어도 잊겠지.”
“허나….”
“그리고 다른 기억을 찾기 위해서라도 이름을 묻는 건 필요해. 이름이란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니까.”
지식은 확신을 주고, 확신은 자신감을 만든다.
셰이의 말이 의외로 논리정연하고 자신만만했던 터라 티르는 아무 말 못하고 물러났다. 대신 그의 안녕을 바라며, 양손을 꼭 맞잡은 채 걱정하기만 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끊어질 듯한 신음이 계속되며, 티르의 마음이 도화선처럼 새까맣게 타 들어갈 때.
오랜 침묵을 깨고, 그가 힘겹게 한마디를 뱉었다.
“…휴.”
둘은 그게 생각 끝에 나온 말인지, 아니면 그냥 내뱉은 신음인지 헷갈렸다. 그 이후 신음이 멈췄다는 것을 깨달은 티르가 되물었다.
“휴, 라고 했느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그게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은 셰이가 의아해했다.
“휴? 그게 네 이름이야?”
다시 한번 이어지는 끄덕임. 셰이가 잠시 그의 얼굴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성씨는 없나? 아, 고아라고 했었지. 그래도 군국 고위직이면 성씨 정도는 만드는 편인데…. 왕국이 사라진 뒤 성씨에 큰 의미가 없어지긴 했지. 자기가 만든 이름이라 애착이 없는 걸까?’
셰이가 고민하느라 잠시 침묵하자, 티르가 조심스레 다가오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휴?”
이름이 불리자 그는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이름에 반응한 것이다.
티르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 화답했다.
“휴, 그게 네 이름이구나. 너무 늦게 알았다. 진작 알았다면 더 자주 불렀을 것을.”
한 점의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티르에 비해, 세이는 여전히 의구심을 거두지 못했다.
‘반응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자기 이름이 맞는 것 같은데. 가명은 아니겠지? 아니야. 이런 생각까지 하면 끝이 없어.’
셰이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한참 그 이름을 되짚었다. 회귀의 기억 속에서 그 비슷한 이름이라도 찾기 위해.
“휴. 휴. 휴라….”
“아는 이름이느냐?”
“잠깐만. 휴머니스트, 휴리스틱, 휴…. 설마.”
“설마?”
한참을 고민하던 셰이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들어. 딱히 비슷한 이름도 발견하지 못했고.”
티르가 맥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뭘 그리 질질 끄느냐? 모르면 처음부터 모른다고 하지.”
“더 수상하단 말이야. 내가 모르는 이름이라니? 어지간히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특히 군국 교관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을 텐데….”
셰이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말이었다.
이미 13번의 회귀를 겪었으며, 그중 절반 정도는 군국과 마찰을 빚었던 그녀는 유명한 군국 인사는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만일 그토록 대단한 능력을 지닌 교관이라면 이쪽에서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만일 무저갱에서 객사하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그러나 셰이의 혼잣말을 들은 티르는 잠시 눈치를 보았다. 골렘의 발언을 통해, 그가 교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다.
티르 자신은 그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셰이에게 알려도 되나 확신이 없었던 그녀는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네가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 자, 그보다.”
티르는 양산을 거두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휴.”
그가 고개를 돌려 티르를 쳐다보았다. 티르는 즐거운 듯이 그 이름을 다시 불렀다.
“휴.”
“네.”
“휴.”
아무런 용건 없이 이름만 두 번. 조금 높은 음으로 한 번, 살짝 낮게 깔아서 한 번.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니 그도 고개를 갸웃하며 부른 이의 이름을 불렀다.
“…티르.”
“후후. 이것이 네 이름이로구나, 휴.”
티르는 그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이름 부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만히 놔두면 오늘 온종일 이름을 부르느라 시간을 다 보낼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지루함을 모르는 티르가 다 즐길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셰이는 다시 이름을 부르려는 티르를 제지하고는 물었다.
“그래, 휴?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뭐라고 부를지는 알겠어. 그러면 계급은 뭐야?”
그 질문은 티르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는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그는 셰이의 질문을 받고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계…급?”
“만일 네가 진짜 교관이라면 계급이 있을 거 아니야.”
“어….”
그가 대답을 못하고 어물쩍거리자, 티르가 급히 끼어들어서는 그를 감쌌다.
“계급이라니. 그런 사소한 것이 중요하더냐? 괜히 헷갈리기만 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그렇지만, 군국에서의 위치를 알려면 계급만큼이나 중요한 것도 없잖아.”
“계급은 바뀌기 나름 아니겠느냐. 그런 불안정한 기억은 잊어버렸을 수도 있지. 그것 말고, 다른 것으로 넘어가자꾸나. 휴?”
재빨리 질문을 넘긴 티르는 셰이가 다시 묻기 전에 그를 불렀다. 그러나 무슨 질문을 할지 미리 생각해두지 않았기에, 눈앞에 떠오르는 의문을 바로 내뱉었다.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있느냐?”
세상은 상대적이라 누군가에게는 참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으나, 그건 최소한 셰이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셰이가 불만을 표했다.
“그게 무슨 질문이야? 계급보고 중요하지 않다 그러더니, 정작 더 쓸데없는 질문이잖아.”
“질문하는 사람이 너 하나는 아니잖느냐.”
“아니, 나도 따지고 보면 이름 말고는 별거 안 물어봤는데….”
“쫑알쫑알 시끄럽구나. 스승의 일에 일일이 딴지를 걸 테냐?”
“이럴 때만 스승이래….”
억지를 부려 셰이의 입을 다물게 한 뒤, 티르는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한마디 단어를 뱉어냈다.
“콩.”
“콩?”
콩이라고 하면 식당에 잔뜩 있던 통조림이었다. 티르는 기뻐했다. 최소한 그가 좋아하는 음식은 잔뜩 해줄 수 있었으니까.
그때 엉뚱한 곳에서 의문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무엇이 말이냐?”
“콩을 좋아한다는 게 말이야! 말이 안 되잖아!”
“이상하구나. 콩을 좋아하는 게 어찌하여 문제란 말이냐?”
티르가 아는 콩이란 대단히 유용한 곡식이었다.
그렇지만 셰이는 세상 모두가 콩을 싫어하는 게 상식이라도 되는 듯이 말했다.
“군국의 콩 통조림의 원재료는 군국 7대 발명품 중 하나, 심는 비료 ‘키메라 콩’이야. 휴경지에 심는 건데, 한 번 심으면 땅이 비옥해져서 내후년 농사까지 풍년이 들어.”
“풍년이라. 그러면 대단히 좋은 것이잖느냐?”
“맞아. 비료로써는 좋지, 하지만 그 콩은, 아니야. 음식으로썬 절대 아니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모양인지, 셰이가 진저리를 치며 외쳤다.
“차라리 비료가 더 나은 음식일지도 몰라. 키메라 콩을 심으면 커다란 콩이 밭에 가득 맺히는데, 알이 굵은 것에 비해 맛은 더럽게 없어. 진흙이랑 비슷한 식감에, 비릿하고 독한 향이 나고, 혀에는 잔뜩 달라붙어서 물 없이는 삼키지도 못해. 오죽하면 사흘 굶은 소도 거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사흘 굶은 소가 거른다고 하기에, 식당에 있던 통조림은 산더미였는데.
티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것에 비해, 다들 깡통 안에 든 콩을 자주 먹는 것으로 보인다만.”
“그야 그 어마어마한 양의 키메라 콩은 군국에서 취합한 뒤 배급하니까! 그나마 통조림으로 만들어서 맛이 백 배는 나아진 거야. 아니었으면 군국은 이미 몇 번 뒤집혔어. 그건 대단한 발명이지만, 음식으로썬 고문이니까!”
“…그래서 지금껏 너만 콩 통조림을 먹지 않는 것이냐?”
“어? 그러긴 했는데.”
티르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셰이를 나무랐다.
“나도 알지 못했으니 할 말은 아니다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셰이, 너는 먹을 것을 가지고도 나누지 않았느냐?”
“어라?”
다시 말해, 다른 이들이 콩을 먹던 도중 혼자만 맛난 것을 먹었냐는 추궁이었다.
눈을 끔뻑이던 셰이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아니야. 나는 아지에겐 같이 먹자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어! 단지, 내 아이템은 향신료나 소금을 강하게 쓴 음식이라 아지에겐 안 맞았을 뿐이야!”
“그러면 휴에게는 한 번도 제안하지 않았으렷다.”
“어? 응….”
소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셰이. 티르의 시선이 한층 차가워졌다. 셰이는 찔끔 겁을 먹고는 몸을 움츠렸다.
작게 한숨을 내쉰 티르는 걸쳤던 양산을 내려놓고는 그 앞에 섰다.
“그만하자꾸나. 마음이 아픈 이에게서 대답을 캐내다니. 애초에 이래서는 안 되었다.”
“어? 아직 그의 능력을 물어보는 것도 안 끝났는데….”
“쪽지의 내용을 잊었느냐? 그의 상태가 이상해져도 건드리지 말라고 강조하지 않았느냐. 평소에도 음식을 나누지 않을 만큼 서먹했는데, 어떤 자격으로 대답을 바라겠느냐?”
“그러긴 했는데, 그걸 굳이 따를 필요가….”
“신뢰의 문제이잖느냐. 네 손에 쥐여준 쪽지마저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그를 보겠느냐? 앞으로도 가면을 쓰고 그를 마주할 것이냐?”
티르의 말은 정론이었다.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다만, 셰이도 할 말이 있었다. 셰이는 드물게도 티르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 녀석이야말로 가면을 쓰고 있잖아!”
느닷없이 지목당한 그가 눈을 끔뻑이는 동안, 셰이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토해내듯 외쳤다.
“그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제대로 속 터놓고 이야기해준 적 있어? 나는 오늘 그가 말하기 전까지, 그의 이름조차 몰랐어! 솔직히 말해 봐. 정 네 말대로라면, 서로 가면도 쓰지 않고 얼굴을 보려면! 처음부터 그 말해주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셰이.”
“거기다 지금 그는 뭔가를 숨기고 있단 말이야! 그걸 해결하면 좀 마음이 편해질 거 같은데! 궁금해하면 쫓아내지를 않나, 물어보면 비밀이라고 하지를 않나, 좀 캐물으려고 하니 기억을 잃었다지 않나.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셰이도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몇 번 다투기도 하고, 놀림당하고, 같이 협력해서 싸우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제법 정도 들었다.
그러나 미래를 보고 온 자에게, 장막 너머를 엿본 자에게…, 현재란 도화선이 사방에 가득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고.
그라는 이름의 그는 군국의 교관이기에, 셰이는 언제나 그를 경계하면서 지내야 했다. 어쩌면 그는 이 모든 종말의 조각들을 타락시킨 장본인일 수도 있었으니까.
“의심받기 싫으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알려주던가! 자기가 온갖 의문스러운 짓은 다 해놓고…! 나도, 믿고 싶다고!”
“믿고 싶다면 이렇게 캐묻기보단, 차근차근 다가가서 신뢰를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
“의미 없어! 어차피…!”
‘되돌아갈 테니까.’
셰이는 뒷말을 삼켰다.
티르는 새삼 셰이를 다시 보았다. 비록 겉모습은 티르와 크게 차이는 없으나…. 그 몸은 한참 어린 나이.
어리다는 생각을 몇 번 했지만, 셰이는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어렸다.
마음을 가라앉힌 티르는, 한결 차분해진 태도로 셰이를 타일렀다.
“서로 말하기 힘든 것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잖느냐. 쪽지에 적힌 내용을 보건대, 그는 자기 자신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았다. 잠시 기다려주지 않겠느냐?”
“…흥. 됐어. 어차피 지금 알아낸 것들, 아무런 신뢰성이 없어. 자기 이름을 티르라 부르지 않나,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콩이라고 하질 않나.”
셰이는 몸을 휙 돌렸다.
“나는 이만 갈게. 나머지는 알아서 해.”
셰이의 몸이 저 방 안으로 사라지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거세게 닫혔다.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알아낸 것이라고는, ‘휴’라는 이름 하나뿐. 겸사겸사 콩을 좋아한다는 사실마저도.
티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으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뇌리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휴. 너는, 어째서 처음부터 그러한 거짓말을 한 것이냐?”
티르는 ‘휴’를 향해 그리 물었다.
당연히,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