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86)
EP.86 안배
“아지야. 밥 먹자!”
잠시 숨 막힐 듯한 고요가 일었다. 회귀자도, 티르도. 느닷없는 나의 외침에 나를 빤히 보았다.
동전이 뒤집히는 것처럼, 반대쪽에서 숨죽이고 있던 자아가 떠오른다. 불씨만 남았던 촛불에 불이 붙었다. 세상이 환히 밝아지고,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는 기분이 든다.
정신을 되찾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외쳤다.
“우와아아. 큰일 날 뻔했다! 이대로 죽을 뻔했어!”
강물에 빠져서 하류까지 떠밀려갔다가 간신히 강둑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물에 흠뻑 젖은 듯한 피로감이 내 몸을 덮쳤다.
제기랄. 조금만 읽으려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 방심하는 바람에 너무 많이 넘어갔다. 그 탓에 기억에 휩쓸려 자아가 꺼질 뻔했어.
후우. 보험을 들어놨으니 망정이지. 평소에 술 담배 게을리 안 하고 열심히 빨아 제낀 보람이 있다. 혹여나 안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어라. 뭐지. 담배는 다 탔는데.
“그런데 제가 정확히 뭐로 정신을 차린 거예요?”
감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티르는, 내 질문에 다시 한번 종을 울렸다.
딸랑딸랑, 하고 종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아지에게 밥을 먹일 때면 울리곤 했던 차임벨. 개의 왕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해 내가 고안해낸, 일종의 심리적인 덫이다.
그 종소리를 듣자, 안쪽에서 뭔가 갑갑한 것이 솟아오른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아지의 이름을 불렀다.
“아지야!”
“멍!”
타이밍 좋게도 아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나에게 다가온 아지는, 큼직한 호의를 의아한 얼굴로 바꾸며 두리번거렸다.
“멍? 밥은?”
아, 그러니까…. 감옥에 갇히고 몇 주 동안 안 피웠던 마력초 대신, 그동안 매끼 마다 울려댔던 종소리가….
아….
“멍! 밥! 멍? 밥? …밥, 어디?”
“미안, 사실 그런 건 없어. 심심해서 장난 좀 쳐봤어.”
“왈왈! 왈왈왈!”
“뭐? 별로 싫지 않다고? 역시, 나를 좋아하는구나?”
“이제 싫어! 냄새 나!”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뻗었으나, 냄새를 맡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나가는 아지.
나는 쓰다듬으려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제 쓸모도 없는데, 이왕 그만 둔 김에 담배나 끊을까.”
어쨌건, 모로 가도 목적지로만 가면 된다. 과정이야 뭐든 결과만 좋으면 됐지, 암.
부지런히 산 보람이 있다. 아지를 길들이려고 매일 종을 울리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자아를 잃고 자신을 12세기 전에 살았던 한 명의 소녀가 된 것처럼 굴었을 테니까.
…개를 조련하기 위해 만든 종이 도리어 나를 조교한 느낌이라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한숨을 돌린 뒤 고개를 들었다.
좁은 방 안에는 회귀자와 티르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은 상이했는데, 티르 쪽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으나 회귀자는 남은 의문을 다 털어버릴 생각밖에 없었다.
“자, 다들. 제가 의식이 없는 동안 저를 보살피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나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다른 한쪽 팔은 넓게 벌린 뒤 우아하게 인사하는 척하며.
기습적으로 고개를 처들고는 외쳤다.
“…라고 할 줄 알았습니까!”
혹시나 저들이 적반하장으로 구는 일을 막기 위해 미리 선수를 쳤다.
원근법은 인간의 마음에도 존재하는 법이라, 예전에 입은 커다란 은혜보다 최근에 베푼 자그만 친절을 더 크게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여기엔 준 것보다 받은 것을 쉽게 잊는 인간의 이기심도 조금 있지만.
하지만 나에겐 어림도 없다. 옛날에 해결사 역할을 하며 추심까지 해본 몸이다. 못 받은 빚, 설사 그것이 마음의 빚이라고 해도, 박박 긁어서 얻어내고야 만다.
“저는 티르에게 심장을 선물하려다가 이 꼴이 된 겁니다. 여러분을 위해 희생한 거라고요! 그 여파로 쓰러졌으면 당연히 여러분이 저를 돌봐야죠! 이건 상식입니다, 상식! 노동자를 고용할 때 식대를 제공하는 것과 비슷한, 필요 비용이라고요! 기억하세요!”
“물론이다. 어찌 잊겠느냐. 네가 나를 위해 그토록 커다란 대가를 감수해야 했다는 것을, 나는 계속 기억할 것이다.”
티르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라. 왜 이리 순순하지. 말을 이따위로 했으면 부처도 한 대 때리고 싶어해야 정상일 텐데.
“걱정 말거라. 정신을 차렸어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몸과 마음을 다해 너를 보호할 터이다.”
“네? 어, 아니, 그럴 필요까진.”
“괜찮다. 네가 준 것에 비하면, 내가 줄 것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우니까.”
…뭔가 살짝 이상한데. 내가 예상한 것보다 마음이, 음, 살짝 무겁다. 말을 더하기가 무서울 정도로.
더 물었다간 뭔가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할 것 같아,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다들, 제가 정신을 잃었을 때 뭐 이상한 짓은 안 했죠?”
티르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고개를 휙 돌렸고, 회귀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둘 다 반응이 좀 이상한데.
회귀자야 내가 정신이 없을 때 별의별 것을 다 확인하려고 했을 거다. 솔직히 그건 내 예상 안의 일.
그런데 티르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빤히 노려보는데, 티르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회귀자를 가리키며 일러바쳤다.
“셰이, 셰이가 너를 심문했다.”
눈앞에서 밀고 당한 회귀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티르칸쟈카? 너도 협력했잖아!”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심문이 더 이어지기 전에 멈추기도 했고.”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생각이라도 읽고 싶지만, 아직 독심술을 쓰기에는 자아가 좀 침침하다. 제대로 읽으려면 몇 분은 더 걸릴 거다.
그래도 내 의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도대체 티르는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밀고까지 하는 걸까….
일단 나중에 묻고. 나는 죄목이 정해진 회귀자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셰이 교육생, 하늘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 쪽지 내용을 읽었으면서도 대놓고 무시해요? 당신에겐 약속의 소중함이라는 게 없는 겁니까!”
“지는 이중 쪽지 만들어놓고는….”
“군국에서 하루 이틀 살아 봐? 속았어도 고개를 끄덕인 이상 최소한의 이행 의무는 있는 거야! 계약서는 꼼꼼히 확인해야지! 그리고!”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불만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려는 요량으로 온 힘을 다해 침대를 내리쳤다. 그러자 괜히 옆에 앉은 티르의 몸이 들썩였다.
침대도 만든 나라를 닮아서 그런지 딱딱하구나. 얼얼한 주먹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소리쳤다.
“내 입장도 생각해봐요. 댁이 얼마나 못 미더웠으면 그랬을까! 솔직히 이중 쪽지에 적힌 내용 별거 아니었잖아! 심신미약이 된 사람 건드리지 말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그런데 그 별거 아닌 부탁도 거절할까 봐 이중 쪽지로 소소한 재미와 강조 효과를 넣었는데 우습게 무시했어!”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내가 약해진 틈을 타 정보를 빼내려고 한 혐의는 여전하니까.
회귀자는 말을 슬쩍 흘렸다.
“…그래. 내가 성급했어. 인정할게. 하지만 너도 할 말은 없을 텐데?”
뭐지?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이 당당한 표정.
회귀자는 내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이름, 휴즈. 맞지?”
“어? 그건 제 시민등록상 이름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뭐야.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이름을 다 캐내기라도 했나?
내 물음에, 회귀자는 점점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0레벨 시민, 탄탈로스의 노역자, 휴즈. 대단해. 처음부터 깜짝 속았지 뭐야. 쓸데없는 짓을 해준 덕분에 나는 뱅 돌아가게 되었잖아.”
“뭐, 뭐야? 어떻게 그걸?!”
독심술! 앗. 아직 안 돌아왔어!
어쩔 수 없다. 잠깐 평범한 이들처럼 행동하는 수밖에. 나는 양팔을 들어 항변했다.
“이, 이건 사생활 침해예요! 개인정보 유출이에요! 도대체 누구예요? 제 시민등록명을 낱낱이 까발린 사람이!”
“본관이다.”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문밖을 보니, 낯선 사람이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군국 장교나 쓰는 커다란 정모에, 그에 맞추어 칼처럼 자른 단발을 가진 여자였다. 빳빳한 제복과, 그 가슴 위로 자랑스레 걸린 훈장이 돋보인다.
장교가 위압적인 자세로 말했다.
“이곳에 있었군. 노역자.”
장교네. 심지어 제복을 입은. 군국의 엘리트인 장교가 왜 이곳에.
어라? 교관으로 왔나?
교…관?
교관이 왜 벌써!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챈 순간, 나는 화들짝 뛰어오르며 손가락으로 장교를 가리켰다.
“와아앗! 셰이 교육생! 뭐해요? 빨리 저 사람 팔 잘라요!”
대부분은 내 말뜻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중에서 오직 회귀자만이, 자기 이야기인 줄은 알고 얼굴을 팍 구길 뿐이었다.
회귀자가 싸늘한 태도로 대꾸했다.
“…네 팔도 안 잘랐는데 왜?”
“안 자르긴! 말은 똑바로 해야지! 자르려다가 실패한 거잖아요! 결과의 평등말고 기회의 평등! 저 팔에게도 평등하게 자기 어깻죽지와 이별할 기회를 주세요!”
“싫어. 흥미가 사라졌어.”
“뭐야. 지금까지 팔 자르고 그랬던 게 흥미본위였어? 남의 팔 자르는 게 그리 가벼운 문제야?! 차라리 평등하게 의무감으로 잘라!”
회귀자는 심드렁한 태도로 대꾸한 뒤, 장교가 안에 들어오도록 비켜주기까지 했다. 장교를 살짝 흘겨보긴 했지만 팔을 자르진 않고 스쳐 지나갔다.
방에 들어온 장교는 눈만 슬쩍 흘겨서 방 내부를 살폈다. 트집이라도 잡으려는 듯한 태도에 나는 겁먹은 학생처럼 움찔거렸다.
“탄탈로스 꼴이 엉망이더군. 며칠 동안 방치하기라도 했나?”
“아니, 저. 잃어버린 기억 좀 줍느라고.”
“그러면서 감독관을 향해 삿대질하고, 팔을 자르라는 망발을 하다니.”
소시민 근성에 찌든 나는 장교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장교는 그런 내 태도를 보고 자신만만해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생각으로는 약간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마 자기보다 약한 유일한 존재를 보고는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호출이다. 노역자. 당장 교관실로 오도록.”
“큭…!”
일반 시민은 장교의 명령에는 반항할 수 없다.
장교는 소속 시설의 노동자를 향한 명령권을 가지며, 불복종할 경우 직권으로 처벌할 권한을 지닌다.
심지어 상대는 탄탈로스의 총책임자로 온 교관. 이 무저갱에서 나를 즉결처분해도 아무도 탓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큭큭큭큭큭!”
하지만 내가 고개를 숙인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한 페이크. 다물은 이 사이로 웃음이 흘러나온다.
장교의 표정이 굳었다.
“뭐가 웃기지?”
“하하하! 너희가 올 때까지 아무런 대비도 없이 가만히 있었을 것 같냐!”
군국은 언제나 예비를 준비한다.
새로운 노역자든, 아니면 교관이든.
골렘이 나에게 경고를 보냈을 때부터, 아마 군국은 나 말고도 이곳을 관리할 사람을 물색했을 것이다.
…그 장교가 이토록 빨리 온 건 예상외지만.
“이럴 줄 알고 안배해놓았지! 어디 나를 건드려 봐! 혼쭐을 내주겠어!”
“네가?”
무슨 무의미한 소리를. 내가 혼내봐야 무서워하지도 않을 거잖아.
나는 벌떡 일어나서는, 내 곁에 선 티르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니! 나 말고, 티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