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87)
EP.87 안배…?
군국 뒷골목, 그곳은 어설픈 자는 살아남지 못하는 비정한 구역. 그곳의 터줏대감인 내가 순순히 군국에 굴복할 것 같나?
자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티르의 심장을 살린 건, 다 이때를 위해서였다!
“티르! 당신의 힘을 보여줘요!”
흡혈귀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다고 한들, 자기 심장을 되살린 이를 외면하진 않겠지. 나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자 티르는 나를 따라 일어서서는, 나보다 반 발짝 앞에 섰다.
“그래. 그의 말대로다.”
새까만 양산이 내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 티르가 양산을 살짝 들어 올려 내게 기댄 것이다. 양산을 통해 자기 뜻을 알린 티르가 장교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곳에서 선언하겠다. 휴의 몸에 작은 상처라도 난다면, 그 몸에서 피가 한 방울이라도 흘러나온다면…. 너와, 너의 나라에 그의 백만 배의 혈채를 거두어가겠다.”
경고란, 그 경고의 현실성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법이다.
이 세상 모든 인류를 죽여버리겠다고 윽박질러보았자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다. 허풍인 게 당연하며, 설사 그럴 의지가 있어도 실패할 것이니까.
그런데 만일, 누구 하나를 지목해서 너만은 반드시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지목당한 이는 밤에 잠을 푹 못 잘 것이다.
그렇기에 시조의 경고는 모두에게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티르에겐 그럴 능력이 있기에.
장교조차 그 기백에 질렸다.
“…그는 잡범이다. 시조, 당신은 고작 잡범 하나를 위해 군국을 척질 생각인가?”
“병사여, 내 너에게 묻노라. 너는 고작 잡범 하나를 죄인으로 남기기 위해 나라와 갈등을 빚을 각오는 되었는가?”
“나라…?”
장교가 주춤할 때, 방안을 잠식했던 연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회색빛 흐릿한 담배 연기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더니, 흡혈귀의 기운에 닿은 순간 새카맣게 물들어갔다.
흡혈귀의 시조, 그녀의 힘은 극에 달한 혈조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수 세기 동안 천신의 신도와 싸워가며, 혈기가 빛에 그을리고 육신이 열기에 타올랐다. 상대방의 몸에서 피를 끌어낼 때마다, 수없이 많은 권속이 새카맣게 타서 스러졌다.
마(魔)에 몸을 바치더라도 그저 살고자 했던 이들은 고통스런 단말마만 남기고 소멸했다. 그들이 남긴 메아리를, 시조는 전부 짊어졌고.
어느 순간, 그녀는 어둠을 다루게 되었다.
빛이 외면한 그림자를.
어둠이 방을 가득 채웠다. 탄탈로스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티르의 오연한 목소리만이 어둠을 타고 들려왔다.
“나는 시조 티르칸쟈카. 세계를 삼킬 괴물이자, 그림자의 여왕이며, 모든 흡혈귀의 시작이다. 내가 곧 흡혈귀이며, 땅 위를 활보하는 흡혈귀는 나의 수족이니. 다시 묻노라, 군국의 병사여. 일개 병사인 너에게 그만한 힘이, 권한이, 각오가 있는가?”
“윽…!”
난다 긴다 하는 군국의 장교조차 그 힘에 감히 맞서지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나름 기력을 짜내고 있음에도, 단지 티르의 존재력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와중, 티르의 양산 아래에 있는 나는 그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죄수를 가두어야 할 탄탈로스가 겁에 질려 떠는 와중에도 나는 멀쩡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상하다.
뭔가, 뭔가 무거운데.
나를 비호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 정도가 좀. 나는 해치지 못하게 엄중히 경고하는 선에서 끝날 줄 알았단 말이야.
“…알겠습, 아니, 알았다. 참고… 하도록 하지.”
장교는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몸을 돌렸다. 누가 봐도 도망이었지만, 그나마 끝까지 가오를 잃지 않은 게 가상하다.
장교가 달아나자, 사방을 가득 메웠던 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요동치던 기운이 잠잠해지고 방 안에는 나와 티르만이 남았다.
잠깐의 정적. 고요하게 문밖으로 노려보던 티르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금 어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휴.”
“네?”
갑자기 내 이름은 왜.
내가 대답하자, 티르는 만족스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후후. 이 이름으로도 돌아보는구나. 그래, 네 원래 이름이 휴즈인 것이냐?”
“네. 휴즈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있거든요.”
“나는 휴라고 부르는 쪽이 더 좋다.”
“왜요?”
우물쭈물, 잠시 대답을 망설인 티르는, 내 품에서 양산을 빼앗아 든 뒤 툭 내뱉었다.
“…그야, 네 입으로 직접 들었으니까. 왜, 짧아서 좋지 않느냐.”
“아아.”
무겁다. 다시 느끼지만, 저울 눈이 망가질 정도로 무겁다.
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미래를 알 수는 없다. 바뀐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품어갈 지는 미지의 영역이다.
호구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감정이 이리 무거워졌을 줄이야. 12세기 동안 막힌 혈이 뚫려서 그런가.
“어때. 도움이 되었느냐?”
“물론, 차고 넘치게요.”
그렇다고 나쁠 건 없다. 눈앞의 대상은 흡혈귀의 시조, 역사서에나 간간이 등장했던 대재앙. 걸어 다니는 군단인 그녀가 내 뒷배를 봐준다면야 나야 좋지.
그렇게 생각할 때, 티르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 그 병사가 있어서 괴롭다면, 나에게 고하거라. 고작 병사 하나 정도야 시체도 남기지 않고 없앨 수 있다.”
그게 좀 무겁다고 해도… 말이지. 하하.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흐렸다.
“에이. 어떻게 사람을 함부로 죽여요? 큰일 날 소리. 살고 싶어 하는 사람 함부로 죽이는 거 아니에요.”
티르가 의아해해서 물었다.
“그러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죽여도 무방하다는 뜻이냐?”
“뭐,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래도 굳이 죽여야겠냐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할 것이며, 설사 있다고 한들 죽고 싶은 이와 살고 싶은 이를 어찌 구분하겠느냐?”
“아무도 못 하죠, 보통은.”
“그러면 쓸모 없지 않느냐.”
“하하, 그런가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티르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짓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는 상냥하구나.”
“와! 엄마가 사라진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에요!”
“…고아라고 하지 않았더냐?”
“네!”
해맑게 대답하는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는 티르. 그녀는 양산을 다시 어깨에 걸치고는 중얼거렸다.
“알겠다. 죽이지 말라는 뜻이겠지. 당장 네 손에 커다란 힘이 주어져도, 너를 압제하던 이에게 휘두를 기회가 생겨도, 딱히 그러려고 하지 않는구나.”
“나를 죽이려고 든 것도 아닌데요, 뭐.”
“저 뻣뻣한 태도를 보아하니, 쉽게 굽힐 것 같지 않구나. 언제고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있다.”
“사람 미래는 모르는 거예요. 그럴 가능성이 좀 있다고 미리 죽여버리면 어떻게 해요? 그게 야만이지.”
격렬한 조현병 환자가 아닌 이상에야, 나에 대한 살의 정도는 미리 읽을 수 있다. 그때 가서 처리해도 늦지 않는다.
그리고… 장교에게서 알아낼 것도 있으니까. 벌써 죽일 수는 없지.
그 이야기는 잠시 치우고, 마침 둘이 남은 김에 나는 티르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저 의식을 잃은 사이 아무것도 안했어요? 정말 저한테 숨기는 거 없어요?”
“무, 물론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하겠느냐?!”
아까의 여유로운 태도는 어디 가고, 되려 목소리를 높이는 티르.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듯하지만, 어림도 없다.
‘후우. 들키지 않아 다행이구나. 그걸 들켰다면….’
이제 슬슬 독심술이 돌아오는 무렵이다. 어디,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나 읽어볼까.
나는 티르의 기억을 거슬러 읽어들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티르는 내 방에서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있었다. 자아가 흐려진 나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채비할 때였다.
나를 일으키려던 티르는, 잠시 내 손을 보고는 동작을 멈췄다.
무슨 일인지, 한참 내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티르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물건을 훔치려는 어린아이나 할 법한, 잘못을 저지르기 직전에 보여주는 수상한 태도. 뒷골목에서 이런 태도를 보였다간 나도 한몫 달라며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래봤자 손짓 한 번에 다 나가떨어지겠지만.
어쨌든, 그토록 안절부절못하며 나의 손을 빤히 바라보던 티르는, 결심한 듯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방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찼다. 시조의 권능이었다. 그림자를 다루는 지고한 권능으로 세상의 눈을 가린 티르는, 텅 빈 내 손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 내가 그 자극에 반응했다.
“…누구세요?”
“쉬. 나다.”
“티르?”
“그래. 티르다. 잠깐만 그대로 있거라.”
나를 조용히 시킨 티르는 조심조심 나의 손을 가슴께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콩닥. 콩닥. 콩닥.
내 손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티르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었다. 아마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티르의 몸이 전기 마사지를 기억해버린 것도 있고, 심장에 박은 카드가 반응하는 것도 있을 거다.
어쨌건, 티르에게 내 손은 자석이나, 난로, 혹은 마약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인류의 얄팍한 역사로는 감히 비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콩닥에서 콩으로, 콩에서 쿵으로.
수면을 흔드는 작은 파문은 어느덧 전신을 통째로 울리는 북소리가 되어 퍼졌다. 박동이 어찌나 큰지, 내 손에도 진동이 전해질 정도였다.
그런 방식으로 되찾은 생의 증거를 만끽하던 티르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이만큼 가까워진 것으로도 이런데, 만일 조금 더 가까이 닿으면….”
이미 거의 닿아있는데, 뭘 더? 어떻게 더 가까워진다는 말인가?
아.
티르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번뜩였다.
“가만히 있거라, 휴.”
그 당시 자아가 없던 나는 조금 경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는, 한 번 더 주위의 눈치를 본 뒤, 가슴에 손가락을 올려 아래로 그었다.
아, 잠깐만. 설마.
티르의 손가락은 가슴 살가죽을 가르고 안을 드러냈다.
심장이 뛰고 있더라도 혈조술은 어디 가지 않는다. 가슴을 갈라도 여전히, 예전보다는 공을 들여야 하기는 했지만, 티르의 피는 흘러나오지 않고 그녀의 안만 맴돌았다.
그렇게 활짝 벌려진 가슴 안쪽으로, 내 손이 티르의 심장에 더 가까이….
“하으….”
그즈음, 나는 생각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
원래 중요 인물의 약점 같은 걸 읽으면…. 그걸 써먹어서 뭘 뜯어낼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나는 생전 처음으로 이 거대한 비밀을 가슴 속에 묻기로 했다.
세상에는 드러나서는 안 될 비밀도 있는 법이니까.
‘그는 군국 출신이 아니야. 즉, 탄탈로스를 몰락하게 만든 교관과 그는 서로 다른 인물이야! 쳇, 헷갈리게 하기는!’
어둑한 방에서 음침한 생각이 흘러나온다.
‘그래. 아무리 군국이라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아지나 티르칸쟈카를 타락시킬 수 있을 리 없어. 그들은 극도의 통제주의자. 차라리 그것을 빌미로 협박을 했으면 했지, 폭주시켜서 밖으로 내보내는 건 군국의 방식이 아니야. 그들이 원하는 바도 아니고.’
천앵의 칼날을 비스듬히 민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티가 일며 공간과 공간이 마찰힌다.
천앵은 두께 없는 검. 따라서 무한히 예리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벨 수 있다…고 하나, 꼭 그렇지는 않다. 매서운 바람은 가끔 뼈를 시리게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창인 것은 아니니.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그야…. 정확히는, 군국이 그를 죽여서 나머지가 폭주한 거겠지.’
만일 쓰는 자의 기량이 부족하다면, 칼을 이루는 공간이 흐트러지는 걸 기공으로 붙잡지 않는다면 천앵은 그냥 자루만 남은 칼이 될 뿐이다.
역으로, 사용자의 기량만 충분하다면, 세상에서 무엇보다 강력한 검.
회귀자는 어둠으로 물든 공간에서 칼날을 갈았다. 그동안 조금씩 소모되었던 공간에 예기가 돌아온다.
어둠 속에서 칼날과 함께 정신을 날카롭게 갈며, 셰이는 생각을 되뇌었다.
‘…평범한 노역자라는 건 정말 예상 밖인데. 나는 교관을 사칭하는 죄수인 줄 알았어. 그런데 고작 노역자? 아니면, 이마저도 속임수…? 군국 행정부조차도 속일 수 있는? 혹은, 휴즈라는 이름의 노역자와 바꿔치기한 걸까?’
그렇게 나오는 결론이 헛다리라는 것은 애석한 일이었으나, 어쨌건 회귀자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아직 그의 정체도, 목적도 불명이지만…. 아지와 티르칸쟈카를 매혹해서 뭘 하려고 한 건지는 아직 모르지만.’
연마가 끝났다. 회귀자는 허공에 천앵을 한번 휘둘렀다. 바람의 틈조차도 비집는 검은 어둠 속에서 고요했다.
‘그래도 괜찮아. 아직도 신뢰하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그의 죽음이 비극의 트리거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살리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면 돼.’
틱. 저울눈이 기울어진다. 작지만 비가역적으로.
한 소녀의 마음에서 내려진 이 판단은 사소했으나 동시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앞으로 존재하는 모든 미래에서, 어떤 존재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성과는 얻었어. 이제.’
이전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으면 된다.
이전보다 한 가지 더 알아갔으면 된다.
어차피 회귀자의 앞을 기다리는 건, 수십 번 더 죽더라도 결코 목표에 닿지 못할 고행의 길.
회귀자는 성취감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천앵을 꼭 쥐었다.
‘마음껏 죽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