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92)
EP.92 는 사실 왕따와 같다
『…군국에서 조사대를 파견할 예정입니다.』
골렘은 담담하게 말을 끝마쳤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새삼 고개를 갸웃했다. 군국 통신병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일개 노역자에 불과한 나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했는지 골렘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귀하의 의견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군 당국은 어디까지나 이 상황을 단순 착오로 발생하였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 조사대는 그 착오의 발생 원인을 찾기 위함입니다. 또한 귀하에게 이 사실은 전한 것은, 어디까지나 정보 제공자를 위한 간단한 상황설명에 불과합니다.』
“암요.”
『…혹여나 강조하지만, 섣부른 짓을 하지 마십시오. 군국은 이번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이번 조사대에는 장성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리스 중령은 군국의 군인. 그녀의 행동에 대한 평가 역시 군국이 할 것입니다. 중령님의 행보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더라도 귀하에 이를 바는 아니니, 가만히 있기를 권장합니다.』
알아들었다고 말하는데도 골렘은 나를 향해 몇 번이고 강조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쓸데없는 일 싫어하는 군국이 두 번이나 이야기하네.
『귀하가 진정 무저갱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군국의 지시에 따라 성실하게 복역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알았다니까, 도대체 왜 가만히 못 두어서 안달이야. 설마?
“혹시 저를 걱정하는 거예요?”
『부정! 어디까지나 상식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탈옥할 수 없는 땅에서 탈옥을 목표로 하는 것보다 열 배는 현실적이며 건설적일 테니까요!』
대답이 너무 단호해서 서운할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소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힘차게 일갈한 골렘은 호흡을 다스리며 말을 이었다.
『…칼리스 중령님께서는 고기 통조림 보급을 요청하셨습니다. 귀하는 요청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어차피 이번에는 중령님이 직접 배급하실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본관은 이만 물러갈 테니, 수고하십시오.』
“네. 대위님도 수고하세요.”
내 말이 끝난 직후 골렘이 연결을 끊었다. 투욱. 골렘의 몸이 힘없이 늘어지고, 나는 그 골렘을 식당 한구석에 반듯하게 앉혀놓았다.
몸을 일으킨 나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칼리스 중령은 완전히 고립되었어요. 그녀에겐 의지할 곳이 아무데도 없죠. 과연 궁지에 몰린 그녀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뭐야, 빤히 듣고 있으면서. 대답 안 하면 내가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는 사람 같잖아.
외면하지 못하도록 식당 한쪽 벽을 향해 소리쳤다.
“봐봐요. 골렘 하나 남겨두니까 얼마나 좋아요. 다 때려 부쉈다면 보급요청도 못 했을 거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이제 다 때려부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아시겠어요?”
건너편 벽이 신기루처럼 일렁거렸다. 은신술이 풀리고, 벽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낀 회귀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와 골렘의 대화를 다 들었음에도 회귀자는 여전히 마뜩잖은 듯이 대꾸했다.
“…골렘도 부수고, 저것도 죽이면 불안할 것도 없어.”
“장성급이 왔다잖아요. 중령을 휘까닥 죽였다가 장성급이 직접 내려오면 어쩌려고요?”
“말이 장성이지, 그들 전부가 강자는 아니야. 육장성이 아니라면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 티르칸쟈카가 있으면 훨씬 쉬워질 거고.”
오만이 아니었다. 군국의 피라미드 꼭대기, 군국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최강의 전력인 장성.
그중에서도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닌 육장성이 아니라면 누구든 이길 자신 있다고, 회귀자는 그게 상식인 것처럼 선언한 것이다.
대단하긴 한데, 문제는 따로 있다. 나는 조심스레 그 점을 지적했다.
“아시죠? 장성부터는 국가 주요인물이에요. 죽인 순간부터 군국에 찍히고, 타협에 여지가 없는 적대관계에 돌입한다고요.”
“너나 나나 이미 찍힌 몸이야. 무저갱에서 제멋대로 살아남은 우리를 가만히 둘 것 같아? 이대로 올라가도 평범한 생활은 꿈에도 못 꿀걸, 뭐가 불안해서 그래?”
쩝. 그건 그렇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공연히 투덜거렸다.
“장성 살해를 태연히 저지를 당신이 불안한데요.”
“시끄럽네. 자기에게 칼날이 향해도 태연하던 녀석이.”
“포커페이스라고요. 속으로는 얼마나 놀랐는데.”
회귀자는 내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내 변명을 티끌만큼도 믿어주지 않는 모양새였다.
“너 같은 게 잡범이라고? 그러면 군국은 엊저녁에 망했어.”
“아니, 진짠데. 대위님도 중령님도 입을 모아 말하잖아요. 저 잡범이라고.”
“굳이 나까지 속이려고 들 필요 없어. 어쩌면 우리는 동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아지와 티르칸쟈카만 생각해도, 이 녀석을 살려야 할 이유가 충분해. 아마 다음 회차에서도 특별한 변수가 아니면 이 녀석을 살려가겠지. 가능하면 이번 회차에 진의를 알고 싶은데.’
말로 해도 믿을 분위기가 아니네.
하지만 굳이 정정해줄 필요 있을까? 이번 회차는 물론, 다음 회차 생존권까지 획득했는데. 고마워해라, 다음 회차의 나. 내가 나를 위해 이렇게 고생했다.
어쨌건 목숨을 건진 셈이니 이만 넘어가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돼.”
다만, 마음이 넓은 나와는 달리 성격 깐깐한 회귀자는 마음속 의문을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회귀자는 궁금한 점을 나에게 물었다.
“저 중령을 굳이 살려둘 필요가 있어?”
“방금 에이비 대위가 설명했잖아요. 장성이 온다니까요.”
“아니, 나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너는 처음부터 중령을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어. 중령을 도우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죽이겠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생각도 않은 느낌이야.”
가끔 회귀자는 이상한 곳에서 생각이 튄다.
그게 외부장착형 13회차 사고회로 때문인지, 아니면 천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헛다리를 짚는 와중에 한둘은 의외로 날카롭게 핵심을 찌르곤 한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이라고나 할까.
내가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음에도 회귀자는 여전히 날카롭게 나를 캐물었다.
“어째서야? 설마 그쪽이 취향이야?”
“하하.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러면?”
“하아. 그게.”
그게 말이야. 내가 틈틈이 장교의 마음을 읽으면서 느낀 건데.
참, 인간의 마음은 재미있더라고.
“궁금하지 않아요, 셰이 씨?”
“뭐가.”
장교의 목표는 4레벨 시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장교가 되었으며, 은밀히 접근한 비밀결사 ‘만물의 영장’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행보는 순탄했다. 그들의 지원을 받아서 훈장도 두 개나 받았고, 중령까지 초고속 승진을 이루었다. 제법 유명세도 얻어서 군국에서도 알아보는 이가 나왔다.
그때, 마침 ‘만물의 영장’으로부터 떨어진 명령.
실수인 척, 탄탈로스에 잠입하여 정보를 얻어내라.
무저갱 탄탈로스. 그곳은 감히 다가가서는 안 될 마경이었으나…. 탈옥 사건 이후 위험도가 크게 줄었고, 무엇보다 먼저 내려보낸 노역자가 태연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일개 잡범조차 살아남는데, 군국의 엘리트인 그녀가 무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장교는 그들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들어왔다.
그러나.
“고립무원의 땅. 타인의 도움을 전혀 기댈 수 없는 무저갱. 중령이면 나름 높은 위치까지 올랐는데, 아무런 지원도 없이 홀로 이곳에 떨어졌어요. 사방에서 닦달하는데 아무것도 해낸 게 없어. 심지어 적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이들에게까지 적대받고 있어요.”
위험인물, 셰이는 여전히 날 선 태도를 보인다.
개의 왕은 이미 노역자와 깊은 인연을 쌓아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 노역자를 어떻게 해야겠는데, 사람에게 무관심해야 할 시조가 왠지 노역자를 한껏 감싼다.
장교는 빈틈을 찾기 위해 온종일 나를 감시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시선을 모른척하며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럴수록 장교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가망이 보이지 않는 임무. 손톱만 물어뜯으며 나오지 않는 대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고립된 무저갱에서 저절로 방법이 튀어나올 리 없다.
장교도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굴러온 돌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말 한마디 나눌 사람도 없고, 시간은 얼마나 가는지 모르겠고. 목표 달성은 점점 요원해지는데 끝은 다가오고. 자기 목숨은 날파리와 다를 바 없고.”
장교가 틈을 보아 아지에게 접근하더라도, 내가 종을 울리면 아지는 곧장 나에게 달려온다.
건물 안에 있더라도,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를 지날 때면 음산한 시선이 느껴진다. 티르가 그녀를 경계하는 탓이다.
심지어 눈앞의 회귀자는 중령을 볼 때마다 살기를 폴폴 풍긴다. 중령쯤 되면 갈무리하지 않은 살기 정도는 느낄 수 있고, 덕분에 하루에도 몇 번 죽음을 경험하는 중이다.
“어쩌면 여기서 죽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기억되지도 못하고 희미한 촛불처럼 스러지는 게 아닐까. 계획이 틀어진 그들이 자신을 버리는 게 아닐까 고민되는 지금.”
목표는 4레벨 시민.
4레벨이 되려는 이유는, 자기가 가진 것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그러나 정작 그녀에겐 가족도, 배우자도 없다. 여기서 죽었다간 모든 게 물거품이라는 뜻.
참 모순적이지 않은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다니.
“그 밑바닥의 상황에서, 그녀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과연 삶의 끝에 달한 그녀가, 모순의 끝에서는 어떤 것을 선택할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게 너무나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보려고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회귀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일을 벌였다고? 이만큼 비효율적인 일을?”
“꼭 그것 때문은 아니고. 어쨌든 산 사람을 죽일 수는 없잖아요. 이왕 살리는 김에.”
내가 독심술사라서 아는데, 진솔한 대답은 결국 그 상황에 처해야 나온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도 정작 칼날이 눈앞에 다가오면 도망치곤 한다.
분명 내가 읽었을 때는 한 점의 거짓이 없었는데도 그렇다. 자기 자신조차 속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한 줄 적히는 대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장면이 직접 눈앞에 다가올 때, 말로는 모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진심이 진실로 나온다.
나는 그것을 보고 싶을 뿐.
“…정말.”
회귀자는 내 말을 차분히 곱씹고는, 의외로 마음에 들어하며 덧붙였다.
“아마 추측하건대. 너는 정말 나쁜 놈이었을 거야.”
“잡범이라니까요.”
“흥. 그렇겠지. 어쨌든, 네 말과는 별개로 확실히… 시도할 가치는 있어.”
‘중령은 여자. 그러니까 불사자가 말한 그 교관이 아니야. 아마 끄나풀이겠지. 당장 심문하고 처리하는 것보다, 이대로 놔두는 게 진상을 더 확실하게 캐낼 수는 있어…. 그런 사소한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 말에 설득당한 회귀자는 중령을 향한 살기를 거두었다.
손에 꼭 쥐고 있던 천앵을 다시 머리맡에 올려놓고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깊게 생각에 잠겼다.
‘이런 느긋한 빌드업은 버리는 회차에선 안 하려고 했는데….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거. 계획을 바꾸어볼까.’
그 생각을 읽은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은 했는데, 이거 버리는 회차였냐?
제발 그러지 마. 마음 읽고 있는 독심술사 불안해한다고.
어쨌건.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너머에 있는 장교를 향해 의문을 던지며.
체크메이트에 달한 장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칼리스 중령은 그녀가 가지고 온 혁대를 풀었다.
과거, 의복 패킷이 상용화되고 약간 지난 뒤. 주 사용처를 잃어버린 가죽은 옷 대신 장신구나 소모품으로 자주 사용되고는 했다.
지갑이나 주머니, 혁대, 가방, 장신구 등등.
사치를 끔찍하게 여기는 군국이나, 나라 곳곳에 존재하던 가죽 재고를 처리하겠다는데 막을 이유는 없다. 그것을 다 내버리는 것이 더욱 큰 손실이니까.
따라서 아주 잠깐 가죽 붐이 일었고, 모종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꽤 유행했었다. 반짝하는 사치품이 그렇듯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나오기도 했다.
칼리스 중령의 혁대 역시 수십 개의 바리에이션이 뜨고 진 끝에, 나름 독특한 쓰임새로 살아남은 제품이었다.
왼쪽 허리춤이 기묘하게 부풀어오른 혁대. 칼리스 중령이 그 틈으로 손가락을 걸자, 가죽 틈으로 교묘하게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칼리스 중령은 그곳에서 세 개의 꾸러미를 꺼냈다.
‘그분이 건넨 세 개의 꾸러미.’
내용물은 그녀도 모른다. ‘만물의 영장’은 그 상황이 닥치기 전에는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강조했으니까. 그래서 칼리스도 가능하면 아끼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하나는 연락용. 다른 하나는 탈출용.’
연락용은 아직 때가 아니다. 이것은 보류.
탈출용은 아무런 희망도 없을 때, 무저갱에서 탈출해야 할 때 쓰라고 건넨 것이다. 이것 역시 보류….
‘굳이 보류해야 할까?’
칼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탈출용 꾸러미에 손을 뻗다,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눈치채고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들이쉬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 아직 아니야.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벌써 마음 약해지면 안 돼.’
간신히 마음을 추스린 칼리스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탈출용 주머니를 깊숙이 밀어넣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그리고 마지막 하나… 이건 조력이 필요할 때.’
무엇이 담긴지는 모른다.
다만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아야 더욱 부풀어오르는 법.
칼리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가죽 꾸러미를 꺼냈다.
군국 깊숙이에 뿌리를 뻗어 놓은 비밀결사, 만물의 영장. 그들이 남긴 비장의 한 수인 만큼, 판도를 뒤집을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며.
‘제발. 이 난관을 헤칠 무언가가 담겨있기를…!’
절실한 바람을 담아, 칼리스 중령은 꾸러미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