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93)
EP.93 내 머릿속의 지우개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모르는 것이 있다.
하나는 답을 모르는 것.
다른 하나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말만 들어서는 두 번째 미지가 훨씬 더 아득해 보이나, 의외로 그건 우리의 가까이에 있다.
기억을 되짚어 보자.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 반짝이는 어린 시절을 되새겨보면, 그 시절 분명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찬란한 추억이 있다.
그때의 자신은 세상의 중심이었고, 가장 원대한 꿈의 지배자였으며, 웅장한 서사시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그 빛나는 기억 속에 묻힌 사소함은 드러나지 않는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것들. 어느 날 아침에 마신 물 한 잔의 차가움이나 햇볕을 한껏 쬔 베갯잇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처럼, 하루를 다채롭게 하면서도 극히 기억하기 어려운 것들은 수면 아래 침잠하여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누가 언급하기 전까지 되새기려는 시도조차도 할 수 없다. 설사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날의 기억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짜 맞춘 상상일 뿐.
기억이란, 그토록 무던하면서도 무정한 심연이니.
그러니 그 누구도 나를 탓할 수 없을 거다.
아무도 짚어주지 않은 것을, 기억해내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다.
“잠깐. 셰이 씨.”
“어?”
“우리 뭔가 까먹고 있는 게 있지 않아요?”
회귀자가 인상을 팍 쓰고는 대꾸했다.
“또 그 화법이야? 똑바로 말 안 해?”
“그 화법이라니? 그게 뭔데요?”
“주어, 술어, 목적어 다 ‘뭔가’로 퉁치고 의문만 제기하는 그 빌어먹을 화법 말이야!”
뜨끔한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발뺌했다.
“억울하네요. 저도 진짜 생각이 안 나서 이러는 거예요! 최소한 이번엔!”
“자각은 있었구나, 이 자식.”
괜히 억울하게 면박을 받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장교가 ‘그들’에게 받은 꾸러미. 조력자가 필요할 때 열어보라 했던 그곳에는, 부채꼴 모양의 넓적한 이파리와 함께 [잊은 존재를 떠올려라]라고 적혀있었단 말이야.
장교는 아직 떠올리지 못했지만, 문제는 나도 그 잊은 존재가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내가 아무리 독심술사라도 뭔지도 모르는 것을 떠올릴 수는 없다.
하지만 뭔가,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단 말이지. 꽤 중요하지만 깜빡한 무언가가.
나는 애매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도대체 뭐지? 셰이 씨랑 관련이 있던 건데. 셰이 씨. 당신의 특징을 한 번 설명해주실래요?”
“너 도대체 왜 그래?”
“급해서 그래요. 빨리.”
내가 다그치자 회귀자는 팔짱을 끼고는 생각에 잠겼다.
“내 특징…?”
‘회귀…. 이건 말할 수 없고. 기연탐식자, 보물고의 주인. 템빨…. 칫. 왜 떠오르는 게 이따위야?’
자기평가는 좀 솔직하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끙끙거리며 회귀자의 특징을 하나씩 읊었다.
“인간불신, 남자가 좋아. 까칠, 외팔이공장장….”
“죽을래? 떠올리는 게 왜 그 따위야?”
“외팔이공장장? 외팔이공장장. 오른팔 살인마. 찾았다. 오른팔!”
“정말 그거라고?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놀리는 거라니?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 놀려대는 놈인 줄 아나.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회귀자를 휙 돌아보며 외쳤다.
“오른팔! 오른팔 어딨어요!”
회귀자는 얼굴을 콱 구기며 대답했다.
“네 오른쪽에 있네. 왜, 잘라서 보여줄까?”
“말장난할 때가 아니라! 불사자 라쉬! 그 오른팔! 오른팔 어딨어요?”
“…불사자?”
그제야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아차린 회귀자가 기억 한편에서 불사자를 떠올렸다.
저주에 문드러진 오른팔, 산산이 흩어진 살점, 그것을 해주하겠다며 회복약을 만들고는, 거기에 불사자의 오른팔을 담가놓은 일까지.
그러나 회귀자의 기억 속에, 회복된 오른팔을 빼낸 기억은 없었다.
그야 당연하다. 회귀자는 회복약에 팔만 담가놓고는 까맣게 잊었으니까!
회귀자가 탄식했다.
“아. 깜빡했다.”
“깜빡? 그걸 어떻게 깜빡 잊어버릴 수가 있어요!”
내가 기막혀서 소리치자, 회귀자도 당혹스러운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소극적으로 대꾸했다.
“그, 그게. 치료해주려고 회복약에 담가놓았는데 말이야. 오른팔이 자꾸 펄떡펄떡 날뛰면 깜빡하고 싶어지잖아.”
“재주도 좋네요! 그 오른팔 수틀리면 두 손가락으로 걸어와서 툭툭 때리고 그러지 않아요? 어떻게 그걸 깜빡해?”
“아니, 저주가 안 풀렸는데도 자꾸 회복약이 든 수조에서 나오려고 하길래….”
“하길래?”
눈동자만 돌아가는 꼴이 사고 치고 모른 척하는 아지를 닮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사슬에 묶어서 가라앉혀놓았어.”
“가라앉혀요?”
나도 안 한 짓을. 행동이 과격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럽겠다.
“뭐, 좋아요. 그럴 수 있다고 쳐요. 그래도 오다가다 봤을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게. 회복약 냄새가 지독해서 구석진 방에 갖다놨거든. 냄새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그 방에 결계도 쳐놓고….”
“저기, 그거 저주 해제 맞아요? 그냥 봉인술이잖아요?”
어처구니가 없네. 나도 어지간히 무계획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지만, 회귀자는 있던 계획도 집어던지는 인종이었다.
내가 티르의 심장을 되살리던 사흘 동안, 회귀자는 거기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불사자는 방치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회귀자를 바라보았다.
“…셰이 씨. 혹시 라쉬 씨 싫어해요?”
“어, 사실,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흠.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취향이 없는 건 아니라는 뜻인가.”
“자꾸 그딴 말 강조하지 마! 그냥 깜빡한 것뿐이거든!”
‘너무 안 보이는 곳에 가둬 넣긴 했어…. 펄떡거리는 오른팔만 그때 봤던 끔찍한 시체 골렘이 아직도 아른거리는 것 같아서. 그 이후에는 티르칸쟈카의 심장에 대한 일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반성하자. 너무 시야가 좁았어.’
반성을 하기는 하네. 그래도 아직 인간의 마음은 남아있는 모양이구나.
그래, 뭐 어떠냐. 사람이 좀 깜빡할 수도 있지. 절대 나도 깜빡해서 그런 건 아니라….
“잠깐! 그보다! 불사자의 팔을 써먹은 건 너잖아! 너도 조금은 기억하고 있어야지!”
…취소다. 이 녀석은 반성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인성파탄자다.
물론 나도 잊어버리긴 했다. 임모탈 라이트 암의 주인으로서 아주 조금, 내 책임도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말이야.
“저는 셰이 씨와는 상황이 다르죠.”
“무슨 변명을 하려고? 어차피 까먹은 건 똑같잖아!”
“저는 그때 티르의 심장을 살리려다가, 정작 저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고 죽을 뻔했는데요? 그 와중에 시커먼 남정네 오른팔까지 기억하라고요?”
“…그게.”
“심지어 나는 기억을 잃을 것까지 고려해서 쪽지도 남겼는데. 멀쩡히 제 정신을 갖고 있던 셰이 씨는요?”
“……….”
“할 말이 있으면 해 봐요. 셰이 씨. 오늘 당신의 양심, 그 무게를 재봐야겠네요. 딱 천앵 무게만큼 나올 것 같아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회귀자는 팔짱을 끼곤 쓸데없이 무게를 잡다, 자연스레 몸을 돌려 바깥을 가리켰다. 대답을 회피한 것이다.
“오른팔은 저쪽 구석에 있는 노역자 숙소에 봉인해두었어. 뭐, 급한 일 있는 건 아니지?”
“한참 늦긴 했지만, 일단 가보죠.”
나는 회귀자가 가리키는 대로 향했다.
노역자 숙소에는 수십 개의 몰개성한 문이 복도에 늘어져 있었다. 몇 개 부서져 있기도, 몇 개는 문이 아예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그러한 파괴행위도 별다른 개성이 되지는 못했다. 사방에 폭력의 흔적이 가득했던 탓이다. 이곳 어딘가에 물건을 숨기면 아지 정도 되지 않는 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쪽이야.”
회귀자는 그 중 끄트머리 방의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한 발 내디딘 순간 후끈한 열기가 나를 덮쳤다.
약초의 독한 향이 내 코를 찔렀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뿌연 연기 너머, 침대 위에 네모난 수조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 그 안을 확인했다.
네모난 수조 속에는 말갛게 끓어오르는 회복약과, 사슬에 묶인 채 푹 가라앉아 있는 불사자의 오른팔이 있었다. 모양새만 보면 고대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보였다.
말없이 회귀자를 돌아보니, 자기도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피했다.
나는 수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방치한 거예요?”
“…응. 저주만 빼내면 돼서, 내가 건드릴 필요 없으니까.”
“보니까 저주는 다 풀린 것 같은데.”
“그래… 보이네.”
“왜 안 꺼내줬어요?”
“깜빡…했어.”
“어휴, 이 빡통.”
“뭐?!”
이럴 때는 참 반응이 날카로워. 나는 수조 전체를 친친 동여맨 사슬을 풀어냈다. 쇠사슬을 한 바퀴 한 바퀴 풀어낼 때마다 펄떡거리는 오른팔이 점점 움직임을 더해갔다.
“잠깐만 기다려라, 오른팔아. 내가 너에게 자유를….”
그렇게 풀어내려는 순간, 사슬이 느슨해진 틈을 타 오른팔이 튀어올렸다. 불사자의 오른팔은 잉어처럼 수면을 차며 솟구쳐서는 내 콧잔등을 때렸다.
“꾸엑!”
내가 잠시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려앉은 오른팔은 거꾸로 서더니 두 손가락으로 바닥을 달려갔다.
나는 얼얼한 콧잔등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셰이 씨! 잡아요!”
“응?”
그러나 회귀자는 이미 오른팔을 피해 비켜난 상태였다. 눈 깜짝할 사이 오른팔은 방에서 벗어나 복도를 달려가고 말았다.
내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회귀자를 탓했다.
“그걸 보고만 있어요?!”
“좀 징그러워서…. 그나저나 왜? 어차피 저 오른팔은 주인 찾으러 갈 거 아니야. 불사자를 되살릴 생각 아니었어?”
“살릴 생각이었어요! 그녀가 나서기 전에요!”
“응? 무슨 말이야?”
“설명할 시간 없어요! 지금 라쉬 씨의 몸뚱아리는 어디 있죠?”
“교육실 캐비닛 안에.”
“왜 또 그런 곳에 넣어놨대! 아무리 봐도 시체를 은닉하려는 모양새잖아!”
나는 즉각 교육실로 달려갔고, 회귀자는 영문도 모른 채 내 뒤를 따랐다. 우리 둘은 오른팔의 손가락자국을 따라 복도를 내달렸다.
한달음에 달려간 우리가 교육실에 들어갔을 때 발견한 것은, 마침 꾸러미를 손에 들고 캐비닛 앞에 서 있던 장교와,
삼각치기로 벽을 짚고 하늘을 날아, 불사자에게로 날아가는 오른팔이었다.
“세상에. 오른팔이 하늘을 난다.”
저 정도 컨트롤을 가진 오른팔이면 3원반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사이.
오른팔이 불사자의 어깻죽지에 딱 달라붙었다. 회귀자의 특제 회복약의 힘을 잔뜩 흡수한 오른팔은 잔뜩 머금은 정기를 불사자에게 전했다.
마치 커다란 주사기를 어깻죽지에 박아넣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퉁퉁 불어 오른 오른팔이 크게 수축할 때마다, 그 안에 흠뻑 담겨있던 정기가 불사자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불사자의 육체가 그 기운을 받아들였고, 정기가 핏줄을 따라 퍼지며 불사자의 몸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사자가 눈을 번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