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95)
EP.95 모두 거짓말을 한다
당장 뛰쳐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불사자는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회귀자는 그들의 동향을 살피겠다며,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스토킹 선언을 하고는 가버렸다.
덕분에 나는 잠깐 시간이 남게 되었다.
마당 한구석에 앉아 카드 한 벌을 꺼냈다. 엄지와 검지로 덱을 살짝 휘게 눌러 쥐고는 손끝으로 긁었다.
파라락.
그러면 내 오른손에 억압당해있던 카드가 자유를 찾아 뛰쳐나갔다. 파라라락. 차례차례 뛰쳐나가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한 장마저 오른손의 폭정에서 벗어나 왼손의 품안에 고이 안겼다.
하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는 법.
지금까지는 고이 품어주었던 왼손은 이윽고 본색을 드러내어 오른손과 똑같은 괴물이 되었다. 카드 뭉치의 등골이 활처럼 휘었다. 또다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카드 뭉치는, 틈을 봐서 조금 전 떠나온 오른손에게로 되돌아갔다.
내가 그렇게 카드 한 벌을 양손으로 번갈아 움직이는 도중이었다.
“손재주가 제법이구나.”
티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새카만 양산을 어깨에 걸치고, 커다란 관 위에 다소곳이 앉은 채, 부드럽게 내 앞에 멈춰선 티르는 가볍게 내려앉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카드를 단숨에 낚아챘다. 나비처럼 팔랑이던 카드는 날개를 접고 내 손안에서 번데기처럼 숨을 죽였다.
“고작 이정도로 제법이요? 죄송한데, 이건 사탕을 훔쳐 먹고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는 다섯 살짜리 아이를 울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에요. 제 진심을 보이면 까무러칠 수도 있으시겠네요.”
능청스런 대꾸에 티르가 말아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쿡쿡 웃었다.
“다 큰 어른이 아이를 왜 울리고 그러느냐.”
“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나만 그런가?”
“너도 그러지 말거라.”
“정말요? 눈을 뒤룩뒤룩 굴리면서, 속이 다 보이는 뻔한 거짓말로 당장 보이는 위기를 모면하려는 아이를 보면, 얄미워서라도 그 거짓말을 지적하고 싶지 않아요?”
장난으로 한 물음이었는데도 티르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꼬마 아이가, 되지도 않는 속임수로 속이려고 하였을 때,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진지하게 하나하나 떠올리며 시뮬레이션을 거듭한 티르는 곧 결론을 내렸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와, 정말요?”
“그럼. 아이의 거짓말을 지적해서 얻을 것이라곤 저열한 쾌감뿐 아니겠느냐. 나이를 먹었다면 조금 더 고상하게 행동하여야지.”
오호. 저열한 쾌감. 저열한….
저열?
“어라? 그거 혹시 제 성격 나쁘다고 돌려 까시는 건가요?”
“기실, 네 성격이 순한 편은 아니지 않느냐.”
티르가 장난스레 말하며 웃었다. 나를 향한 짓궂음이 한껏 담겨있었다.
어쭈, 이제는 농담 삼아 놀릴 정도는 되었단 말이지?
좋아. 어디.
“티르. 우리 내기 하나 하죠.”
“내기?”
“네. 제가 카드를 숨길 테니, 티르가 찾아보세요.”
덱을 보지도 않고 카드를 뽑아 건넸다. 티르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것을 받아들고는 앞뒷면을 살폈다.
뒷면은 다른 카드와 다를 바 없는 규칙적인 무늬를 가졌다. 모양도 대칭적이라, 뒤집어도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었다. 앞면에는 새빨간 하트가 두 개 그려져 있었으며, 2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혹시 무언가 숨겨져 있을까, 티르는 손가락으로 카드를 문질러보기도 했으나 카드는 멀쩡했다. 티르가 카드를 이리저리 비추어 보며 말했다.
“무언가 속임수가 있는 것 같지는 않구나.”
“그 카드는 평범해요. 마술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요.”
“그럴 필요는 없다. 미리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건 나의 능력 부족이니.”
과거 지식이 베풀어지지 않는 시절, 그때는 아는 것이 힘이었으며, 모르고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 시대를 살았던 티르는 진심으로 그리 말했다.
물론 나도 진심이었다.
“아니요. 최소한 도구에 한해선 공평해야죠. 저만 아는 트릭을 가지고 내기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티르는 카드를 다시 나에게 되돌려주며 물었다.
“그래. 내기라면 필시 보상이 있어야겠지. 무엇을 걸고 내기하겠느냐?”
“소원 하나. 어때요?”
“…소원?”
‘소원이라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그렇다면.’
순간적으로 티르의 눈이 피처럼 붉어졌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친 내가 급히 덧붙였다.
“물론 서로 납득 가능한 상식적인 선에서요! 당연하게도!”
“…아아. 그렇겠지. 알겠다.”
…다행이다. 왠지 조금 전 티르의 머릿속에 나를 흡혈귀로 만들겠다는 소원이 아른거렸던 것 같은데 말이야.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곁에 있을 수 있는….
어쨌건. 티르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어디, 해보도록 하거라.”
“큭큭큭. 좋습니다. 어디, 신세대의 손기술 앞에서 입을 떡 벌리고 놀랄 준비나 하시라고요.”
“너야말로 내가 너무 쉽게 맞추더라도 상심하지 말거라. 상대가 너무 나빴을 뿐이니.”
“그 말, 똑같이 돌려드리겠습니다. 사기당한 기분이 들어도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남은 카드 뭉치를 땅에 내려놓고는, 양손을 활짝 펴서 손안에 아무것도 숨겨놓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확인한 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나는 오직 두 손가락만 움직여 하트 둘을 집어 들었다.
“자아. 갑니다.”
“그래. 해보거라.”
티르의 눈이 한층 붉게 빛났다. 내 사소한 행동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안력을 돋운 것이다.
기대에 부응해주지. 나는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카드가 빙글빙글 돌면서 왼손과 오른손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술에 취한 나비처럼, 혹은 돌개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카드가 어지러이 움직이는 것을 보던 티르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생각보다, 너무 잘 보이는구나.’
붉은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떨리는 게 아니라, 내 카드를 쫓는 것이다. 흔들려도, 갑자기 시야 바깥으로 뻗어나갔다가 돌아와도, 손등 뒤에 숨어 잠깐 보이지 않더라도.
꿰뚫어 보는 듯한 붉은 눈은 내 카드를 시시각각으로 따라왔다.
‘분명 현란하기는 하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 보이는구나. 그리 빠르지도 않고, 어지럽지만 움직임은 단순하니.’
“…큭!”
나는 초조한 신음을 흘렸다. 손가락이 긴장으로 떨리며, 중간중간 카드를 놓칠 뻔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간신히 다시 잡고는 카드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순간적으로 양손을 교차한 뒤,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카드를 손아귀 속에 숨기고는 쭉 내밀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외쳤다.
“짠! 어디 있게요?”
“아….”
티르는 작게 탄식했다. 붉은 눈동자가 슬쩍 나를 올려다보았다가, 내 왼손을 흘긋거렸다.
그녀는 대단히 곤란한 표정이었는데, 그건 카드를 놓쳐서가 아니라… 도리어 너무 완벽하게 포착하였기 때문이었다.
‘휴에게는 미안하지만… 전부 다 보였다. 양손을 교차하면서 숨기는 척, 왼손 소매에 집어넣는 것을.’
흡혈귀는 눈마저도 혈기로 조종할 수 있다. 혈조술의 보조 아래 빠르게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는, 평범한 눈이라면 따라가지 못하고 놓쳐버렸을 현란한 움직임마저도 끝까지 추적했다.
티르는 내가 무안해할까 봐 차마 답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안력을 돋지 말았어야 했을까. 소원이라는 말에 유혹되어 너무 진지하게 임했구나….’
“크크. 조금 어려웠죠? 괜찮아요. 실망하지 마세요. 노안에는 장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세상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꼽기도 하니, 어디, 세상이 만만찮다는 것을 보여줄까.’
마음을 바꾸는 데는 한 마디면 충분했다. 발끈한 티르가 손가락으로 내 왼손을 가리켰다.
“왼손을 꺼내보거라.”
“왼손! 왼손이라고 하셨죠? 무르기 없기입니다! 자, 과연! 왼손일까요? 확인 들어갑니다! 짠, 짜라잔, 짜란, 짠.”
나는 즉시 왼손을 펼쳤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티르도 예상한 대로, 왼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런! 안타깝네요! 왼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아! 카드는 오른손에 있었나 보네요! 자아. 틀리셨으니 내기는 제가 승리….”
“아니, 왼손 소매 말이다.”
“헉!”
티르가 내 소매를 정확히 짚었고,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외, 외, 왼손 소매라니요? 그게 뭐죠?”
“여기, 보이지 않느냐.”
티르는 친절하게도 내 왼손을 콱 붙잡고는, 그 팔을 비틀어 소매가 다 보이도록 했다. 소매 저편에는 카드 한 장이 어렴풋이 보였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 도박판에서 걸렸다면 곧장 망치를 찾아야 할 만한 상황에서.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봐봐요. 얕은 거짓말. 짚지 않고는 못 배기겠죠?”
뭐, 이유는 많다.
세상의 쓴맛을 알려주겠답시고, 아니면 하는 행동이 같잖아서, 혹은 저열한 욕구에 의해, 단순히 손해 보는 게 싫어서.
붙이면 붙이기 나름이지만, 어쨌든 눈앞에서 거짓을 목격하면 밝히고 싶기 마련이다. 그건 누구나 가진 본능에 가깝다.
티르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 그 말을 하려고 내기를 한 것이느냐?”
“비슷해요. 티르, 제가 얼마나 우스웠나요? 빤히 보는데 뻔뻔하게 숨기고, 그래놓고 뻗대며 모르는 척하면. 이리 콱 잡아서 보여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죠?”
아니라고는 말 못 할 것이다. 지금 티르의 행동이 딱 그랬으니까.
티르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완전히 당했구나. 허나, 너는 아이가 아니지 않느냐.”
“티르에 비하면 아이나 마찬가지죠. 인간의 수명을 아주 넉넉하게 잡아 100살이라고 잡았을 때, 스물넷인 저는 티르칸쟈카 나이 비교대입법을 쓰면 고작 두 살배기 아이에 지나지 않는걸요. 응애.”
나를 째릿 노려본 티르는 새침하게 입을 삐죽이고는 내 소매에 들어있던 카드를 빼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확실히, 나도 내 말만큼 고상하지는 못했던 모양이구나. 인정하마. 어쨌든, 카드를 어디 숨겼는지 발견하였으니 이 내기는 나의 승리….”
그렇게 말하며 티르가 카드를 뒤집었을 때였다.
앞면을 확인한 티르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어?”
새하얀 바탕에 두 개 그려진 하트는 어디 가고, 그곳에는 누군가 새로이 그린 듯한 근엄한 여왕이 꽃을 들고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트 퀸.
그 카드는, 분명 내가 집었던 카드와는 다른 것이었다.
홀린 듯 바라보던 티르가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아직까지 말아 쥔 오른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까 미처 못했던 말, 다시 해볼게요. 오른손에 있었나 보네요! 짜잔!”
입으로 효과음을 내며 나는 오른손을 폈다. 티르가 찾아야 했던 하트 2는 오른손 손아귀 안에 둥그렇게 말려있었다.
당혹스럽게 자기 손과 내 손의 카드를 번갈아보는 티르. 아직까지 혼란을 느끼는 중인 그녀를 향해, 나는 고상한 쾌감을 느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뭐, 그것을 극복해야 마술사라고 불릴 수 있겠지만요.”
티르는 황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 어떻게 한 것이냐?”
“안 가르쳐 줘요. 트릭을 세상에 공개하는 건 마술사가 해선 안 될 일이니까요.”
피가 쏠리면 시야가 좁아진다. 이것은 티르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
어디서 올지 모르는 포식자를 발견하기 위해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 피식자는, 대신 코앞에 무언가가 다가와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 목표로 삼은 사냥감 하나를 끝까지 쫓아가기 위해 두 눈을 앞쪽으로 향한 포식자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머리 뒤쪽을 볼 수 없다는 페널티를 안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포식자인 인간. 그런 인간의 피를 먹이로 삼는 포식자 중의 포식자 티르는 두 눈에 혈기를 집중하여 내 카드를 쫓았다. 나조차도 그녀의 눈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할 정도로 그 능력은 뛰어났다.
그래서 처음부터 속였다.
하트 여왕이 친히 그림자의 여왕을 유인하는 사이, 하트 2는 느긋하게 내 손등에 숨어있다가 느지막이 나타났을 뿐이다.
“남을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속임수를 간파했다고 뻗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뭐, 이것도 대부분 독심술 덕분이지만, 그거야 뭐.
이미 독심술이 나고 내가 독심술이다. 평생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분리할 수가 있을까.
애초에, 타인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면, 그들이 깊숙이 감추어둔 속임수도 알아차리지도 못하겠지.
“대단…하구나. 솔직히, 아직도 어떻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구나. 분명 따라가고 있다 생각했거늘.”
양손을 꼭 붙잡고 감탄하는 티르. 이곳 사람들은 리액션이 솔직해서 좋다.
우쭐해진 나는 코밑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하하. 제 소원을 어떻게 들어줄까 생각하고 있으세요.”
“그런데 말이다, 휴.”
“네?”
조심스레 고개를 든 티르는 손에 쥐고 있는 하트 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하트 두 개가 그려진 것은 아니다만…. 이 역시 카드를 숨긴 것은 숨긴 것 아니더냐?”
“어?”
“그렇다면, 내기는 내가 이긴 것이렷다.”
“어라?”
가만히 있어 보자.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카드를 숨길 테니 찾아보라고 하였지, 분명. 이게 두 개가 그려진 카드는 아니나 숨긴 것은 숨긴 것. 그렇다면 나는 숨긴 카드를 찾기는 하였으니. 그렇다면….’
오잉? 그렇네?
“제가 왜 그렇게 말했죠?”
“그것을 왜 나에게 묻는 것이냐?”
그러게. 뭐지?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나?
찬찬히 조건을 상기하던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어.”
“그러면, 네가 나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에이. 그래도 시조의 자존심이 있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으면서 이런 거로 소원을 말하려고요?”
끄덕.
티르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티르의 눈은 다시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뭐, 상관없나. 고상한 척하는 티르가 이상한 소원을 말하진 않겠지. 그러면 바로 컷이다.
그때, 감옥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카드를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소원은 나중에 들을게요. 마침 기다리던 사람이 왔네요.”
그 직후 감옥에서 불사자와 장교가 나타났다. 불사자는 한끼 거나하게 차려먹고는 배를 쓰다듬는 중이었고, 장교는 그런 불사자를 앞세워서 마당으로 나왔다.
좋아. 칼리스 중령은, 과연 자기 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을지.
준비는 끝났다. 이제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