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99)
EP.99 잃어버린 유산
“위험해요.”
오른손이 뜨겁다. 손에서 흐른 피가 소매를 타고 흘렀다.
칼리스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날이 바짝 선 칼날이 그녀의 손을 꿰뚫고는, 목을 반쯤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손이 떨린다면, 목을 파고든 칼날이 그만큼 살점을 파헤치리라.
칼리스가 마법 병과였던 것이 다행이었다. 마력에 대한 감각을 익힌 덕분에 생체 단말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불길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감지했고, 취소하지는 못했지만 제때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왠지, 누군가 그녀에게 급히 경고한 덕분인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건.
실패했다면 이 칼날은 그녀의 목을 꿰뚫었을 것이다.
손바닥과 칼날이 대치했다. 칼리스는 고통으로 부들거리는 오른손에 억지로 힘을 주어 칼날을 밀어냈다. 목에 난 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어느 정도 밀어내자 뚜둑, 하고 칼날이 부러졌다.
단 한 번, 목을 단숨에 꿰뚫어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칼날은 그 예리함을 위해 내구성을 대가로 치렀다. 무기로서는 실격이지만, 자살용 도구가 굳이 다회용일 필요는 없다.
칼리스는 오른손에 박힌 칼날을 빼냈다. 유리처럼 얇은 칼날을 따라 그녀의 피가 흘러 떨어졌다. 목에 난 상처에서 흐른 피가 흘러 앞섶을 적셨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이건 죽음의 유예조차도 아니었다.
오히려 고통 없이 죽을 기회를 절로 마다한 것일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나를 버림패로….’
칼리스는 꾸러미를 받았다. 그녀가 안심하고 이 임무에 자원할 수 있었던 것은 탈출용 꾸러미의 존재가 컸다. 만일 위험한 일이 생겨도, 이것으로 도망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꾸러미는, 사실 희망의 끝에서 그녀를 삼키려고 기다리던 절망이었다.
생각이 멎는다.
배신당했다는 절망,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몸이 부서지기 전에 마음이 먼저 무너지고야 만다.
‘어디부터 잘못되었던 거지? 나는 무엇을 잘못해서….’
그 의문만이 칼리스의 뇌리에 맴돌았다.
한계까지 몰려, 의식이 흐릿해진 그녀의 귓가로…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칼리스 크리츠 중령. 큰일이네요. 나라는 당신을 의심하고 조직은 당신을 버렸어요. 심지어 이제 목숨마저 잃을 위기에 처했네요.”
그 목소리는 다정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동시에 즐거움도 묻어나왔다. 순수한 어린아이가 호기심으로 묻는 것 같기도 했다.
“3레벨은 만족스러웠나요? 4레벨은 어때 보여요? 이 모든 것을 내버리면서까지 추구할 가치가 있었나요?”
“아….”
흐릿한 시야 속에서, 칼리스 중령은 해묵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주인공이었던 어린 날의 이야기. 그녀를 반짝거리게 했던 수많은 추억.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차가운 현실이 동화를 좀먹을 때까지, 그녀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현실이 집안까지 찾아온 뒤 그녀는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났으나, 최소한 아버지의 중심은 그녀였다.
주말에 중등학교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언제나 대문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간혹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면 그녀는 익숙하게 양철 우체통을 들추었다. 그러면 빳빳한 종이에 둥근 글씨체가 적힌 편지 한 장이 아버지 대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날은 아버지도, 편지도 없었다. 대신 정복을 차려입은 두 명의 장교만이 문 앞에서 반듯이 선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사 통보였다.
마당 딸린 집, 낡았지만 고급스러운 자동마차, 금박이 붙은 칼과 특수한 군장.
추억이 담긴 모든 것들은 유산이 되었다. 만일 상속권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 재산은 전부 군국이 환수해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슬프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녀는 오직 하나의 사실만 이해했다.
이것을 되찾기 위해선 3레벨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잃은 것은 집착이 된다. 하나씩 잃어 혼자가 된 그녀에게 유산이란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에겐 재능이 있었고, 중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고등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그녀는 3레벨 시민이 되어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때 그녀가 느낀 기쁨과 안도감은 다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얻는 것보다는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유산은 칼리스의 것이었으나, 온전히 소유하지는 못했다. 그 물건을 상속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권리마저 전부 얻어내기 위해서는 4레벨에 도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욕심과 집착. 그것 때문에 칼리스는 위험한 선택을 했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비밀결사… 만물의 영장과 손을 잡은 것이다.
군국에 대한 충심을 가장하고, 만물의 영장에 몸을 담가 짐승과 수인을 증오하는 척하며, 칼리스는 차근차근 출세를 향했지만.
그녀의 모든 행동은 남은 것을 향한 집착 때문이었다.
칼리스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거창한 대의도, 대단한 충의도 없는.
“…죽기, 싫어….”
처음부터 그녀는 죽을 생각이 없었다.
목숨을 바쳐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없었다.
그냥,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서. 0레벨 노역자도 가능했던 생존이니, 3레벨인 그녀도 가능하리라 여겨서.
어쩌면, 생존 그 자체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살고 싶어요?”
칼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야 했다. 그녀는 평범했으므로.
그러자 목소리는 흐드러지게 웃으며 멀어졌다. 어둠 속에서 메아리가 치는 것 같았다.
“그토록 소중하다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라도 지켜보세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서, 목숨 말고는 전부 던져버릴 각오하고, 어떻게든 목숨 하나만 부지하여 보세요. 다만 쉽지 않을 거예요. 타인은 당신의 절절한 사정이 어떤지 모르고, 관심도 없으니까요.”
떠나기 전, 목소리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 같은, 사소한 사연에 감동하는 평범한 사람 말고는 말이죠.”
칼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목소리의 주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칼리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으나, 의문은 언제나처럼 몸을 숨겼다.
칼리스도 목소리에 대해서는 잊었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모든 것을.
구차하고, 비참할지언정.
죽음은 잠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온 회귀자는 확실하게 칼리스를 향해 다가왔다. 칼리스는 피가 흐르는 오른손을 늘어뜨리며 그녀의 죽음을 마주했다.
서늘한 살기가 그녀의 몸을 찔렀다.
“유언은?”
거슬러 올라가자. 칼리스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을까?
답은 간단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짐승의 왕이나 노역자를 건드리기 전에는, 여기 거주하던 이들은 불편해했을지언정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그 말뜻은.
“…만물의 영장은 나를 버렸다.”
저들은 만물의 영장을 알고 있다.
일개 죄수가 어떻게 군국의 가장 비밀스러운 조직을 알고 있는지 모르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고, 그걸 위해서는 만물의 영장도 팔아야 했다.
“탈출하라며 건넸던 것은, 자살용 패킷.”
감성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그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상대 역시 별다른 관심이 없을 것이다.
대신. 담담히 사실을 말하며,
칼리스는 의복 패킷을 해제했다.
의복 패킷이 역소환되자, 그녀의 가슴팍에 달려있던 훈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때 그녀가 자랑했던 훈장이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렇게 셔츠바람이 된 그녀는 곧장 무릎을 꿇고.
“살려…주세요.”
머리를 조아렸다.
이건 회귀자의 관심을 끈 게 분명했다. 아니었으면 말을 걸지도 않았을 테니.
“만물의 영장이 목숨을 구걸해? 차라리 입을 다물고 당당하게 죽어. 그게 너희가 말하는 인간의 고상함이잖아?”
자신은 고작 끄나풀이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용의가 있다….
그렇게 말하려고 하다가, 문득 상대가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칼리스는 대신 다른 주제를 꺼냈다.
“저의 ‘후원자’로부터 개의 왕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방해할 만한 존재는 없을 테니, 그냥 말 잘 듣는 개 한 마리를 끌고 오는 일이나 다름없다며.”
만물의 영장에 대한 정보가 그녀가 가진 유일한 무기.
칼리스는 머리를 조아린 채, 그녀가 아는 정보를 또박또박 털어놓았다.
“다만 예상과는 달리 방해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필요하였지요. 개의 왕에게 사슬을 건 것은, 그것이 개의 왕을 다스릴 방법이라는 전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머리를 조아린 것이 다행이었다. 조금 전, 그녀의 머리 위쪽으로 거대한 참격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순간 천앵의 궤적이 비틀렸다. 단숨에 죽이려던 회귀자는 의외의 정보를 듣고는 순간 마음을 바꾸었다.
“웃기네. 고작 사슬 따위로 개의 왕을 다스릴 수 있을 리 없잖아. 인간에 대한 실망감만 키울 뿐이야… 개가 인간에게 실망하면 어떤 결과가 되는지도 모르는 채.”
“짐승의 왕이라도 각각 다스리는 법이 있어요. 그중 저는 개의 왕을 다스리는 법을 전해듣고 왔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던 회귀자는 이내 불만에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치잇. 왜 진짜인 것 같지? 들소의 왕에게 코뚜레를 뚫는 미친놈들이라면…. 다른 방법을 떠올렸을 수도….”
흥미를 끌었다. 잠깐의 유예가 생겼다.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 칼리스를 들뜨게 했다. 이제 쐐기를 박을 차례였다.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얻은 가설이 하나 있었다. 어쩌면, 만물의 영장에게 가장 치명적일지도 모르는 비밀.
그것을 팔아넘긴다.
“저는 버림말입니다. 그런 저에게도, 만물의 영장은 흔쾌히 세계수의 잎을 건넸습니다. 그것 말고도, 군국에서 비밀스럽게 조직을 운용하면서 자금 흐름이 들키지 않을 리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에겐 다른 수입원이 있고, 그건 아마….”
“아. 그건 알아. 그놈들은 몰래 세계수를 재배하고 있으니까.”
기껏해야 세계수의 수호자들과 연관이 있다, 정도의 정보를 말하려던 칼리스는 경악하며 입을 다물었다.
세계수를 사적으로 재배한다니. 세계가 뒤집힐 만한 거대한 일인데.
그보다.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릴 만한 충격적인 정보를 태연하게 내뱉는, 이 존재는 도대체.
그 존재는 태연하게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물었다.
“뭐, 됐어. 그보다. 그 후원자가 누구인데?”
“…모든 연락은 익명으로, 은유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즉, 모른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추측하건대, 저보다 두 계급 이상 높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후원자’가 탄탈로스의 교관으로 임하기 전, 미리 안전을 확인하는 역할로… 리트머스로 이곳에 왔기 때문입니다.”
“교관이라고. 진짜 교관.”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목소리. 칼리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살기는 그녀를 향한 게 아니었다.
회귀자는 질린 듯이 말했다.
“끄나풀, 끄나풀, 끄나풀…. 이것들은 질리지도 않나.”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죽일까, 살릴까. 회귀자의 계산 속에서 저울추가 흔들린다.
초조한 시간이 흐른다. 선고를 기다리는 동안 공기가 무게를 더해간다. 이제 칼리스는 감히 고개를 들 생각조차 못하고는,
이 침묵의 장막을 뚫고 오른팔이 난입했다.
“하아앗! 오른팔이여!”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오른팔이 창문틀을 꽉 쥐었다. 양철로 만들어진 창문틀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우그라들었다. 그것을 뒤따라 불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를 끌어당겨라!!”
미리 매달린 오른팔을 향해, 불사자의 거체가 날아왔다. 창문을 부수고 난입한 불사자는 땅을 구르며 외쳤다.
“내가 왔다!”
불사자는 고개를 들고 좌우를 살폈다. 오른쪽에는 칼리스가 무릎을 꿇고 있고, 반대편에는 회귀자가 보이지 않는 칼을 만지작거리며 사색에 잠겨있었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 내가 좀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바꾼 모양이로군! 잘했다, 소년!”
불사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들 사이에 몸을 디밀었다.
“그래! 쉽게 죽는 이들의 죽음은 쉽지 않아야 하지. 짧게 피는 꽃이 아름다운 법. 오직 한 철만 피어난다고 해도 그 가치마저 짧지는 않으니! 제때 질 때까지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상록수의 미덕이 아닌가!”
흔들리는 저울추에 약간의 귀찮음이 얹어졌다.
계산이 끝났다.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자와 전투를 더 이어나가기 귀찮았던 회귀자는 천앵을 거두며 팔짱을 꼈다.
“…쓸데없는 참견이야. 이딴 것 살려둔다고 누가 알아줄 거 같아? 신도 사람 하나 죽어나가는 것엔 관심 없을걸.”
“내가 알아주지! 소년의 고결한 결정에 탄복하며, 대신 내 몸을 열일곱 토막을 낸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책임을 물 방법이 없다는 게 정확하지만 말이야! 하하하!”
회귀자는 그 허물없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칼리스를 향해 엄중한 경고를 남겼다.
“저건 네가 알아서 잘 감시해. 쓸데없는 짓을 했다간… 아니, 혼자 다니는 모습이라도 보였다간 문답무용으로 죽여버릴 테니까.”
“물론이오! 꼭 붙어다니도록 하겠소.”
그렇게 칼리스의 죽음은 발걸음을 돌려 걸어나갔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칼리스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몸에 힘이 풀렸다. 식은땀이 그녀의 셔츠를 흠뻑 적셨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탈력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갔나? 갔소? 갔지?”
연신 회귀자가 사라진 방향을 힐끔이던 불사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후우. 난폭한 꼬마였소! 힘만 무식하게 강해서는, 태연히 내 몸을 도륙내지 뭐요! 내가 불사자가 아니었다면 열다섯 번은 죽였을 거요!”
“나….”
“고맙다는 인사는 됐소! 친구 좋다는 게 뭐겠소. 정 마음에 빚이 남는다면, 서로 한 번씩 구해준 셈으로 치시오!”
분명 그는 호인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칼리스는 목숨을 건지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해야 하는데, 그만한 여유를 가지기에 칼리스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칼리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어.”
직무 정지 처분을 받았다. 칼리스는 가혹한 조사단 앞에 서서 행적을 하나하나 파헤쳐질 것이다. 그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흠결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다. 만일 만물의 영장이 그녀의 배신을 눈치챌 경우, 자살당하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
어쩌면 누구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갈지도 모른다.
“체면도, 지위도, 임무도, 아버지의 유산도, 전부.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칼리스는 지금 모든 것을 잃은 셈이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가 아득바득 쌓아왔던 모든 것을.
“하지만 목숨은 건졌지 않소!”
불사자가 칼리스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들겼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떨리는 몸을 꽉 붙잡았다.
“지금 살아남았으면 된 것이오! 모든 것을 잃어도, 뒤는 나름대로 채워나가면 되는 것 아니겠소. 중령은 젊소! 시간은 충분하니, 지금까지 쌓았던 재산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을 채울 수 있을 거요!”
“하지만….”
힘없는 칼리스의 목소리는 불사자의 힘찬 목소리에 덮어졌다.
“무엇보다, 중령에겐 가장 중요한 유산이 남지 않았소! 중령의 아버지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다름이 아닌 중령일 테니까!”
칼리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왈칵 흘렀다. 자각하지도 못한 채 눈물을 흘리던 칼리스는,
피도 눈물도 없는 군국. 그 가혹한 나라의 장교는, 나라를 닮아 눈물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메말라버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칼리스는 이제 장교가 아니었다. 그녀에겐 꿈틀거리는 피도, 뜨거운 눈물도 모두 가지고 있었으니까.
한 권의 책은 끝나지 않았다.
끝을 준비하지 않았기에 더 이어나갈 여백을 남겨두었고, 이야기를 마저 쓰기 위해 예비해둔 모든 것을 활용했다.
이제 예기치 않은 사고가 들이닥치지만 않는다면, 이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타나겠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회귀자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저갱의 위, 저 아득히 먼 어둠을 바라보며 회귀자는 남색 눈을 번뜩였다.
‘침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