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
1화.
온 에어 24
01.
출근 준비를 마친 윤은 TV 위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한참이나 여유가 있었다. 윤은 식탁 위에 놓인 에너지 바를 하나 까서 입에 물었다. 현관에 앉아 느긋하게 스니커즈 끈을 묶는 것까지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윤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른 시간의 전화가 반가울 일은 그다지 없었기에 순간, 온갖 상상이 뇌리를 스쳤다.
오태훈.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훈은 윤의 대학 동기이자 회사 동료였다. 윤은 YBS 교양국에서, 태훈은 기획제작국에서 다큐멘터리 피디로 일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대기업에 다니다 온 윤과는 달리 스트레이트로 입사해, 기수로 따지자면 한참 선배였다.
같은 건물에 있기는 했어도 태훈은 주로 다큐멘터리 제작팀에서 일하는 통에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이 전화도 몇 달 만의 연락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한 걸 보니 누구 부고라도 있나 싶어, 윤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태훈아. 오랜만이다. 새벽부터 웬 전화야?”
『인마, 지금이 몇 신데 새벽이야.』
돌아온 대답에 윤은 끈을 묶던 손을 멈췄다. 태훈의 말투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아냐, 일은 무슨…… 요새 살 만하냐?』
윤이 걱정스럽게 묻자 태훈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난 엄청 살 만하니까 너나 잘 해, 너나. 왜, 무슨 일인데.”
『그냥 생각나서. 혹시 저녁에 시간 있으면 술이나 한잔할래?』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었다. 태훈은 절대 이렇게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는 성격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로 캐묻는다고 대답할 것 같지가 않아, 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호응했다.
“그래, 그러지 뭐. 어디서 볼까?”
『오랜만에 호수네 가자.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가 있는 걸로.』
호수네는 대학 때부터 태훈과 다니던 윤의 집 근처 단골 가게였다. 윤이 알았어, 하고 대답하자 이따 보자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차 키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주차장으로 내려간 윤은 시동을 걸었다. 늘 같은 출근길이었으나 아침부터 시작된 심란함이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은 왜 아침부터 그래서, 하며 공연히 태훈을 탓한 윤은 초조하게 손끝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태훈의 별명은 돌부처였다. 좋아도 좋은 티 안 내고, 싫어도 싫은 티 안 내는 성격 때문이었다. 다큐멘터리 피디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힘든 척 한 번을 한 적이 없었다. 태훈을 잘 알기에 그 짧은 통화가 더더욱 마음에 걸렸다.
내내 그 생각에 빠져 있던 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는지, 정문의 주차장 입구를 방금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직후였다. 괜히 건물을 한 바퀴 더 돌아야 했다. 윤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후문 근처로 접어들자, 도로에 일렬로 선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민단체 이름이 적힌 띠를 두른 사람들이 아침부터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공영방송 언론탄압 중지하라’라든가, ‘어용 이사진은 부당해고 해명하라’ 같은 문구들이 적힌 피켓이 눈에 띄었다.
YBS는 KTBC, IBS를 포함한 공영방송 3사 중 최강 시사 강국이었다. 시사 프로그램 피디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1지망으로 꼽는 곳이 바로 YBS였다.
메인 뉴스인 는 뉴스 시청률 1위 자리를 단 한 번도 뺏긴 적이 없는 부동의 원톱이었다. 설문조사에서 매년 시청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방송으로 꼽히는 탐사보도 프로그램 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나 , 등도 YBS 시사보도국이 자랑하는 프로그램들이었다.
그런데 작년 중순 이후부터 시보국 내부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시보국에 검열이 들어온다든가, 정부에 부정적인 발언을 하는 인물들에게 불이익이 간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이유는 뻔했다. 극우 보수에 과도한 친기업적 성향을 드러내는 현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YBS 시보국의 타깃이었다. 시보국에서 김영근 대통령을 포함한 청와대와 여당 인사들을 부르는 코드네임은 ‘양파망’이었다. 온갖 부정부패가 까도 까도 끝이 없다는 이유였다.
를 위시한 프로그램들은 돌아가며 ‘양파망’ 속의 양파들을 까 댔다. 양파들이 양파즙이 되도록 두들겨 패는 시보국이 정부의 눈 밖에 난 건 당연했다. 감히 정부 돈 받아 처먹는 개들이 주인도 모르고 덤빈다며 VIP가 대노했다는 말이 공공연했다.
교양국 소속인 윤은 자세한 내부 사정까지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작년에 YBS 대주주인 바른언론진흥회 소속 이사들이 갑자기 여당 인사들로 대거 교체되면서, 시보국에서 갑자기 해직되거나 다른 부서로 전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바람이 살을 에는데도 저렇게 부지런히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럴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던 윤은 잠시 피켓과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에게 멍하니 눈을 주었다.
가벼운 충돌음과 함께 귀를 찢는 경적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건 다음 순간이었다. 화들짝 놀라 시선을 앞으로 돌린 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충돌 사고였다. 한눈을 판 사이 신호가 바뀐 걸 보지 못하고, 후문의 주차장 출구로 막 나오던 차를 들이받은 것이다.
세게 받은 건 아니었지만 가슴이 덜컥했다. 미친놈, 하고 중얼거린 윤은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자신이 받은 차는 검은색 SUV였다. 앞창에 붙은 직원용 YBS 정기주차 스티커가 선명했다. 다행히 세게 받은 건 아닌 듯했으나, 아침부터 일진이 영 좋지 않았다.
제발 부장님이나 국장님 차만 아니었으면 싶었다. 다행히도 윤과 거의 동시에 내린 상대편 운전자는 뜻밖에도 젊은 여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 블랙인 패션에 선글라스, 입에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기껏해야 이십 대 후반이나 됐을까. 그러나 깡마른 체구와 칼 같은 단발,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영혼까지 털릴 것 같은 느낌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 귀에 꽂으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영하의 날씨보다 더 싸늘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윤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운전 똑바로 안 합니까?”
낮은 목소리에 자를 대고 그은 듯 정확한 발음이 고막에 꽂혔다. 아나운서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발성은 덤이었다.
“그게…….”
오너드라이버 경력 8년에 무사고를 자랑하는 윤이었다. 하지만 방금은 전방 주시 태만에 신호 위반인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저절로 운전도 똑바로 못하는 놈이 된 기분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와중 이상하게도 여자에게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윤이 기억을 되짚는 사이 미간을 찌푸린 여자가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정신이 돌아온 윤은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일단 보험사 부르시면…….”
“시간 없습니다. 명함 주세요.”
여자가 윤의 말을 끊었다. 운전 못하는 놈이 된 기분에, 바쁜 분의 일정을 방해한 놈이 된 기분이 추가됐다. 약간 울고 싶어진 윤은 황급히 차 안의 가방을 뒤져 명함을 찾았다. 여자는 윤이 내민 명함을 보지도 않고는 바로 재킷 포켓에 밀어 넣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연락드리죠. 차 뒤로 좀 빼 주시고요.”
“아, 네!”
윤이 서둘러 차를 후진시키자 운전석에 타 문을 쾅 닫은 여자가 순식간에 주차장 입구를 빠져나갔다. 카레이서 부럽지 않은 솜씨였다. 지나가는 차를 슬쩍 보니 크게 박은 것 같지 않았지만, 어쨌든 보험료 오를 각오는 해야 할 듯싶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윤은 건물을 반 바퀴나 마저 돌아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교양국으로 올라간 윤은 팻말이 붙은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입사 동기인 다인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무실로 들어서는 윤에게 손을 흔들다 말고 멈칫했다.
“아침부터 왜 죽상이야?”
“출근하다 접촉 사고 났어.”
사정을 설명하자 다인이 측은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냐는 호통도 잊지 않았다. 시위하는 사람들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유독 오늘따라 왜 그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윤은 이게 다 아침부터 전화한 오태훈 때문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