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0
10화.
진수가 또 때릴 것 같아, 윤은 후다닥 몸을 뒤로 뺐다. 얻어맞은 등짝이 화닥거렸다. 그렇게 때리고도 속이 안 풀렸는지 진수가 자기 가슴을 팡팡 쳤다. 내가 못 산다, 하며 한탄하던 진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기 팀이야, 인마! 오태훈이 그거 다음 개편 때 폐지한다는 소리는 안 하디? 너 몇 달 있지도 않을 팀에 박아 놓는 이유 모르겠어? 야 이 새끼야, 너 출세는 끝났어. 저 새끼들한테 밉보이면 계속 이런 식으로 폐지할 프로, 파일럿이나 돌리다 지방 발령 내서 처박는다고! 당장 자리 펑크 나는 건 둘째 치고 앞길 창창한 새끼가 이게 뭐냐? 응?”
진수가 펄펄 뛰며 의자에 앉은 윤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첫 문장 이후의 모든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라고? 아무래도 뭘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윤은 얼빠진 표정으로 진수를 쳐다보았다.
“시사보도국 3부가 뭐라고요?”
“라고!”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목소리로 진수가 고함을 쳤다. 없던 고혈압이 생긴 양 갑자기 뒷골이 확 당겼다. ? 라니?
물론 윤도 의 애청자였다. 뉴스에서 피디들이 매년 상을 받는 걸 볼 때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저런 언론인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결코 그런 사람이 되어서 그런 프로그램을 찍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은 진수에게 항변했다.
“부장님, 이건 아니잖아요! 아니, 제가 왜 거길 가요!”
“그럼 누가 가! 게시판에 글 쓴 건 넌데!”
진수가 빽 소리를 지르며 맞받아쳤다. 맞는 말이었다. 게시판에 글을 쓴 건 자신이었다. 할 말을 잃은 윤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밀물처럼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만조 때도 모르고 서 있다가 갑자기 바닷물이 목까지 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게 말이 돼요?”
울기 직전의 얼굴로 하소연을 하자 진수가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 새끼가 왜 이제 와서 이래, 하는 표정이었다.
“인마, 지금 이게 말이 안 되는 걸 누가 몰라.”
그건 그랬다. 애초에 자신이 게시판에 그런 글을 쓴 건 YBS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편성까지 받은 프로그램을 취소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됐고, 사내 게시판에 글 하나 쓴 걸로 인사위에 회부된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물론 가장 말이 안 되는 건 자신이 하루아침에 에서 로 굴러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넋을 잃고 서 있는 윤을 본 진수가 한숨을 쉬었다.
“가서 짐 싸라. 뭐 어떡하냐. 일이 이렇게 된 걸.”
이게 꿈이라면 누가 세게 한 번 꼬집어 줬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진수에게 맞을 만큼 맞아 아직도 따끔거리는 등은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진수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포기한 투로 내뱉었다.
“아, 진짜 이 개새끼들. 거기다 갖다 처박는 속이 뻔한데 좌천은 아니라서 항의도 못 하겠고…… 야, 어떻게든 다시 데려와 줄 테니까 가서 한 반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 말 잘 듣고. 너는 인마, 거기 가 있으면 일주일도 안 돼서 최진수 부장님이 참 좋은 분이었지 할 거다. 강재희 걔가 나처럼 물렁물렁한 사람이 아냐. 제발 가서 얌전히 알아서 잘 기어. 여기서처럼 사고 치지 말고. 너 거기서도 사고 치면 진짜 모가지야, 모가지.”
진수가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왜 미리부터 겁을 주냐고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YBS에서 의 강재희 피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독한 워커홀릭에 원칙주의자, 수틀리면 국장의 멱살도 잡을 놈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윤은 그런 소문에 큰 관심이 없었다. 살아생전 한 번도 만날 일 없을 줄 알았던 탓이었다. 눈앞이 막막해졌다. 죽을 걸 알면서도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속으로 생각한 윤은 얼굴을 감쌌다. 나가려던 진수가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빨리 안 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픈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윤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싶어 팔 안쪽을 꼬집어 본 건 덤이었다. 하지만 얼얼한 아픔에 한 번 더 울적해질 뿐이었다.
* * *
막 사무실로 들어선 정언은 안을 둘러보았다. 보통 출근이 가장 빠른 건 정언이었는데, 밤샘을 한 건지 한현진 작가가 빈 커피 컵을 줄 세운 채 앉아 있었다. 현진이 정언을 보더니 졸려 죽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는, 슬슬 떡이 질 기미가 보이는 머리를 뒤로 질끈 묶었다.
“작가님, 선배 어디 갔어요?”
정언의 물음에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한 현진은 턱을 괴며 나른하게 대답했다.
“강재희? 아까 잠깐 집에 가서 씻고 온다고 들어갔어. 샤워하다 안 죽었나 모르겠다. 걔 보름 내내 날밤 깠잖아.”
“집에 가긴 갔어요? 웬일?”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은 정언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재희는 집에 들어가는 날이 더 드문 편이었다. 사람들이 농담으로 재희에게 넌 숙직실에 월세 내고 살라고 할 정도였다. 폐지 얘기가 나온 이후로 거의 하루도 집에 안 갔는데, 오늘은 들어갔다니 웬일인가 싶었다.
“지가 보기에도 지 꼴이 말이 아니었나 봐. 그 새끼는 대체 왜 집이 코앞인데 시간 아깝다고 꼭 여기서 자냐. 그렇게 시간 아끼다 일찍 죽으면 아낀 의미가 뭐가 있어.”
현진은 절대로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실없이 웃은 정언은 컴퓨터를 켜며 의자에 등을 묻었다.
“이따 열 시에 아이템 회의하기로 한 건 그냥 진행한대요?”
정언이 묻자 현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몇 달은 더 남았는데, 뭐. 당장 폐지할 것도 아닌데 방송 안 하냐, 그럼.”
“노조에서 뭐라고 얘기 있었대요?”
자세를 고쳐 앉은 정언은 현진을 마주 보았다. 현진이 글쎄, 하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아직인 거 같아. 근데 우리만 난리인 게 아니고 기제국도 뭐 뒤집어졌다고 그러던데? 촬영 시작한 다큐를 엎으라고 그랬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는 현진의 말에 정언은 멈칫했다. 촬영이 들어갔다면 예산과 편성 업무가 이미 끝났다는 뜻이었다.
“촬영 들어간 걸 그만 찍으라고 그랬다고요?”
정언이 귀를 의심하며 되물은 말에 현진이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그 직원들 보는 사내 게시판 있잖아. 거기 누가 글 올렸다던데, 뭐라고 썼는지는 못 봤어. 암튼 기제국에서 신도시 개발 때문에 쫓겨나는 원주민들 가지고 3부작 다큐 찍기로 했다더라고. 근데 그걸 예산도 다 받고 편성 내놓고 촬영 시작했다가 윗대가리들이 찍지 말라고 지랄해서 캔슬했대. 나도 얘기만 들었어.”
“돈 주고 편성까지 했는데? 완전 미친 새끼들 아냐, 그거? 왜요?”
듣던 중 가장 황당한 소리였다. 정언이 목소리를 높이자 현진이 혀를 찼다.
“신도시 사업에 초 치니까 윗대가리들 기분이 상했다 그거지, 뭐. 이 새끼들 이거 다 파 봐야 되는데…… 어, 강재희한테 신도시 사업하고 윗대가리들이 무슨 관계있나 한 번 파 보자고 할까?”
현진이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정언은 헛웃음을 뱉고는 대꾸했다.
“안 그래도 물어뜯을 것만 찾고 있을 텐데 이따 한 번 얘기해 봐요.”
“고생길이 훤하다, 훤해.”
생각만 해도 기가 빠진다는 얼굴을 한 현진이 옷 위를 더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도 없네. 내려갔다 와야겠다. 커피 마실래? 사다 줄게.”
“저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요.”
“트리플 샷?”
정언은 대답 대신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현진이 허공에서 정언을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몸에 좋은 것 좀 먹고 살아. 젊은것들이 나보다는 오래 살아야지, 어떻게 된 게 죄다 단명할 연놈들밖에 없어.”
끌탕을 한 현진이 지갑을 집어 들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정언은 그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텅 빈 사무실에서 등받이를 뒤로 밀며 고개를 젖혀 흰 천장을 올려다보던 정언은 잠시 눈을 감았다.
폐지 이야기도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 참이었다. 그런데 기제국에서까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퍼뜩 현진이 말한 사내 게시판 글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언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급히 인터넷 창을 켰을 때였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현진이 이렇게 빨리 온 건가 싶어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정언은 멈칫했다. 재희였다.
“일찍 출근했네.”
재희가 인사를 건넸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데다 아직 머리도 덜 마른 채였으나 간만에 멀끔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흰 셔츠에 재킷까지 갖춘 포멀한 차림이라, 정언은 재희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침부터 어디 가려고 그렇게 빼입고 왔어요?”
“왜, 새삼 반하겠어?”
되물은 재희가 질색하는 정언의 표정에 웃는 소리를 냈다. 재희는 재킷을 벗어 걸쳐 놓고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국장님 호출.”
“이 시간에?”
선경이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호출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재희가 아직 물기 어린 머리를 털며 의자에 기댔다.
“그래서 무슨 일 났나 했잖아. 머리도 못 말리고 튀어간 거 봐라.”
“국장님이 대단하긴 대단하네. 전화 한 통 하자마자 선배가 그러고 튀어가고. 왜 부르셨는데요? 뭐 좋은 소식 있어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반 농담으로 묻자 재희가 픽 웃었다.
“좋은 소식이 뭐 있겠어. 그냥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는 거지. 국장님은 일단 이 건은 노조 손 떠났다고 보시는 것 같더라고. 일단 사장님하고 본인이 하실 수 있는 건 최대한 폐지 기한 늦추는 거래. 레임덕 상태고 연말에 대선 있잖아. 이렇게 막 나가는 거 오래 못 할 거다 그거야. 버티면 한 번쯤은 반격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게 되겠어요? 기제국에서 촬영 들어간 다큐도 캔슬했다면서. 위에서도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정언의 말에 재희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한 작가님이 그러던데요. 게시판에 무슨 글 올라왔다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또 서 피디한테 할 얘기 있는데…… 미치겠네, 진짜.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
재희는 아, 하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때마침 현진이 로비 카페의 테이크아웃 캐리어를 들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