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정언은 반드시 이기는 패를 가지고 게임에 뛰어드는 타입이었다. 그들이 어떤 수를 쓰든 정언이 여기까지 온 이상 이 판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정언은 똑똑하고 집요하고 겁이 없었다. 그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쥐에게 필요한 모든 미덕이었다.
상대방이 필승의 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될 때, 승부를 뒤집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재희는 그들의 수법을 잘 알고 있었다. 가짜 패를 만드는 것, 패를 빼앗는 것, 그리고…… 상대를 제거하는 것. 어떤 방법으로든, 그 순간 모든 게임은 무효로 돌아간다.
머릿속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굳은 듯 서 있던 재희는 다음 순간 책상 위에서 날카롭게 울리는 핸드폰의 벨소리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핸드폰의 액정을 확인하자 ‘이성옥 작가’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재희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빨라진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전화를 받았다.
“어, 이 작가. 왜?”
가능한 한 침착하게 묻자 성옥의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피디님, 진짜 죄송해요. 제가 지금 한 작가님 차 타고 가는 중이라서, 제가 사무실로 다시 가야 되는데…… 정말 죄송해요. 얼마 전에 차세진 의원실에서 뭐 보내 주신 거 있었는데 제가 정신이 없어서요. 피디님 바로 갖다 드렸어야 되는데 어떡해요. 진짜 너무 죄송해요. 지금 생각이 나서요. 내일 말씀드리면 또 잊어버릴 거 같아서, 저기, 피디님. 제 책상 책꽂이 왼쪽 끝에 서류 봉투 있거든요. 아직 사무실 계시면 그거 꼭 확인해 보시라고요. 죄송해요.』
재희는 석고대죄라도 할 기세로 말끝마다 죄송해요, 하는 성옥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되게 죄송한 거 알겠어. 찾아서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네, 피디님. 내일 뵈어요.』
먼저 전화를 끊은 재희는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복잡한 생각들을 떨어 버리고는 성옥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캐릭터 스티커며 조그만 인형, 화분 따위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종이들로 복작대는 책상을 내려다본 재희는 피식 웃었다.
손을 뻗어 성옥이 말한 책꽂이 가장자리 부근을 뒤적이자, 국회 로고가 찍힌 서류 봉투가 꽂힌 것이 눈에 들어왔다. 봉투에는 ‘차세진 의원실’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지난번 세진을 만났을 때 자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편지가 있다며, 사무실로 보낼 테니 한 번 읽어나 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마 그때 말한 편지인 듯했다.
자리로 돌아간 재희는 칼로 봉투 위를 그어 안의 내용물을 털어 보았다. 흰 봉투에 든 편지 몇 통이 책상 위로 쏟아졌다. 두어 통은 개봉이 된 상태였고, 나머지는 그대로 봉해진 채였다.
의자에 앉은 재희는 봉투 하나를 들어 앞면을 보았다. 발신인의 주소가 눈에 들어왔다.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양화로 107, 우편번호 12655. 어쩐지 낯이 익은 주소였다.
눈으로 두어 번 주소를 되풀이해 읽어 본 재희는 곧 미간을 좁혔다. 여주교도소 주소였다. 보낸 곳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교도소명을 쓰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교도소에서 보내오는 편지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느낌이 이상했다. 아까 민혜와의 대화 탓일 거라고 생각한 재희는 봉투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발신인의 이름은 허주경으로 되어 있었다. 허주경. 뇌어 본 이름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했다.
재희는 개봉되어 있는 편지를 먼저 꺼냈다. 교도소 내부에서 판매하는 평범한 규격봉투와 편지지였다. 무심히 편지를 펼쳐 잠시 읽어 내려가던 재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을 멈추며 눈을 약간 크게 떴다.
편지를 한쪽 손에 쥔 채 굳어 있다가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든 재희는 바로 성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채 두 번을 가기도 전에 성옥의 놀란 목소리가 돌아왔다.
『네, 피디님.』
“이 작가, 혹시 전에 여주에서 우리 사무실로 편지 온 적 있어?”
앞뒤 생략하고 묻는 재희의 말에 성옥이 잠시 머뭇거렸다. 재희는 핸드폰을 고쳐 쥐며 성옥을 다그쳤다.
“잘 생각해 봐. 몇 번 온 적 있었을 거야. 기억나?”
『어, 저기,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요. 제가 내용은 다 안 보니까 잘 모르겠어요.』
성옥이 당황하며 대답하자 재희는 바로 다시 물었다.
“우리 사무실로 편지 오는 거 내용 확인 누가 해?”
『혜주 언니도 보고, 희림 언니도 보고…… 송 작가님이랑 한 작가님도 다 보시는데, 왜요?』
“아직 차 안이지? 한 작가님 옆에 있으면 좀 바꿔 봐.”
성옥이 뭐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현진이 전화를 받았다.
『뭐야, 강재희. 너 때문에 지금 차도 갓길 세웠어. 왜, 무슨 일인데?』
“작가님, 혹시 여주교도소에서 온 편지 읽어 본 적 있어요? 고의로 교통사고 내서 사람 죽인 살인범이 보낸 건데, 자기한테 교사한 사람이 있다고.”
『너 자다가 꿈 꿨어? 무슨 봉창을 그렇게 두드려?』
다짜고짜 묻는 재희에게 현진이 황당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재희는 미간을 누르며 대답했다.
“아니, 나 지금 엄청 심각해. 본 적 있어요, 없어요?”
『그렇게 말하니까 기억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런 게 한두 통 와야지. 내 책상 서랍 제일 아래쪽 한 번 봐봐. 제보 편지 온 건 거기 넣어 놓으니까.』
“알았어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은 재희는 바로 현진의 책상으로 가서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일 아래 서랍을 빼어 아예 바닥에 다 뒤집어 놓은 재희는 무릎을 접고 앉아 어림잡아도 수백 통은 되어 보이는 편지봉투 사이를 헤집었다.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양화로 107에서 온 편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찾아낸 편지 몇 통의 발신인은 모두 허주경이었고, 방금 자신이 본 것과 같은 규격 봉투로 보낸 것이었다.
서랍 안에 다시 나머지 편지들을 쓸어 넣고 닫은 재희는 찾아낸 편지를 쥐고 몸을 일으켰다. 비슷한 내용의 편지가 너무 많다 보니 아마 자신의 선까지 올라오지도 않은 듯했다.
가벼운 두통이 밀려들었다. 책상을 짚고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재희는 긴 숨을 뱉었다. 재희가 읽은 편지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저는 현재 살인죄로 12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인 허주경이라고 합니다. 제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루하루 고인과 유족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저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싶어 펜을 듭니다.
저는 힘없는 하청업체 사장입니다. 살인을 사주하는 힘 앞에서 저는 무력했습니다. 서온건설 회계 과장 고정민 씨를 살해한 것은 절대로 저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절대로 질 수 없는 단 하나의 패.
그들이 모든 판을 무효로 돌리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만 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안경을 집어 쓴 재희는 그 편지들을 한 통 한 통 읽기 시작했다. 긴 밤이 지나는 사이 재희는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 *
사무실에 들어선 정언은 안을 둘러보았다. 텅 빈 사무실은 고요했다. 아침부터 짙게 내려앉은 안개가 창밖의 풍경을 온통 흐리고 있었다. 회색 필터를 덧씌운 듯 도시의 윤곽이 아슴하게 멀어졌다. 아직 다들 출근하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그렇다 해도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건 드문 일이었다.
자리에 앉은 정언은 의자에 기대 몸을 조금 뒤로 젖혔다. 잠이 오지 않아 간만에 새벽부터 일어나 뛰고 온 덕분인지 카페인이 들어가기 전부터도 정신은 멀쩡했다. 다만 오는 길에 아침 대신 대충 쑤셔 넣은 식빵 한 조각이 얹힌 건지 속이 약간 답답했다.
가슴 부근을 두어 번 툭툭 두드리고는 컴퓨터의 전원을 켠 정언은 무심코 재희의 자리를 보았다. 책상 위 스탠드가 켜진 채였다. 또 밤샘하고 노조 사무실에라도 내려가 있는 건가 생각하는데,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충민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 서정언. 일찍 출근했네.”
“아, 네. 선배님은 집에 안 들어가셨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정언이 묻자 충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일이 좀 있어서. 강재희 어디 갔냐?”
“노조 사무실에 없어요?”
정언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충민이 무슨 소리 하냐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숙직실에도 없던데. 전화도 안 받아서 사무실에서 자나 싶어서 올라왔더니 여기도 없어?”
“그래요?”
“이 새끼 어디서 갑자기 졸도하고 그런 거 아냐?”
충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자기가 말해 놓고도 놀랐는지 표정이 굳어진 충민이 정언에게 말했다.
“강재희한테 전화 좀 해봐. 내가 찾아볼 테니까.”
네, 하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 충민이 후다닥 사라졌다. 정언은 이마를 짚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주소록에서 막 재희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손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에 선명하게 재희의 이름이 뜬 것을 본 순간 정언은 즉시 전화를 받았다.
“지금 어디예요?”
다급한 정언의 물음에 잠깐 사이를 두고 피곤한 듯 잠긴 재희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혹시 누가 나 찾으면 취재 갔다고 얘기해. 문자 남긴다는 걸 깜빡했어.』
“안 그래도 지금 충민 선배가…….”
『알아. 선배한테는 내가 얘기할 테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말고.』
경찰서나 병원에서 전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졌다. 미간을 누르고 있던 정언은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그래서 어디냐고요. 왜 새벽같이 어딜 가는데 말을 안 해서 사람들 걱정을 시켜요? 선배 어디서 쓰러진 거 아니냐고 충민 선배가 아주 대경실색을 하고 갔는데, 지금.”
『여주 가는 중이야.』
재희의 대답에 정언은 눈썹을 좁히며 재희에게 되물었다.
“어딜 간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