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여주. 운전 중이니까 갔다 와서 얘기할게.』
“아니, 선배…….”
채 뭐라고 하기도 전 전화가 끊어졌다. 왜 사람 말을 끝까지 안 들어, 하고 투덜거린 정언은 끊긴 전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주, 여주, 하고 입 안으로 두어 번 뇌어 보았으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재희가 갑자기 거기 가야 할 까닭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정언은 혀를 차고는 재희의 자리에 켜져 있던 스탠드를 껐다. 그때 사무실로 들어오던 현진이 정언을 보더니 손을 들어 보였다.
“일찍 왔네? 근데 왜 거기 있어?”
“아, 선배가 갑자기 취재 나갔다고 그래서요. 스탠드 켜 놓고 갔길래 끈 거예요.”
정언의 대답에 현진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강재희가 취재를 갔다고? 취재할 게 없는데 무슨 취재를 어디로 가?”
“여주에 갔다던데요. 작가님도 몰라요?”
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진이 모르는 재희의 취재 스케줄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었다. 현진이 전혀 모르는 걸 보니 미리 얘기도 하지 않은 듯했다.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현진이 흠, 하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어젯밤에 뜬금없이 전화해서 여주에서 무슨 편지 온 거 없냐고 찾던데 그것 때문인가?”
“편지요?”
“아니, 모르겠어. 퇴근하는데 갑자기 전화하더니 편지 얘기를 막 하더라고. 거기 뭐가 있나?”
현진이 혼잣말처럼 자문했으나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잠시 생각하던 정언은 곧 에이, 하며 더 고뇌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얘기해 줄 만한 내용이었다면 이미 통화할 때 말해 줬을 것이 뻔했다. 하여튼 이 도깨비 같은 인간, 하고 중얼거린 정언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새 켜진 모니터 하단에서 메일 알림창이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또 어디서 온 메일인가 싶어 클릭하자 보낸 사람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박창도.
국장의 얼굴이 머릿속을 번뜩 지나갔다. ‘서정언 피디님께’라고 적힌 메일을 열자 안에는 간략한 내용 몇 줄이 쓰여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지난번 방문하신 후 예전 취재 수첩에서 김장순 이사 사고 현장 사진 몇 장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혹여 도움이 되실까 하여 사진과 당시 취재 수첩을 스캔해 보냅니다. 항상 건강 주의하십시오. 박창도 드림.
간결한 내용이었다.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짧은 답장을 보낸 정언은 바로 첨부된 파일을 다운받아 열어 보았다. 인화한 지 오래된 필름 사진을 스캔한 것이라 선예도가 떨어지기는 했으나, 현장의 상황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사진 속에서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자동차와 도로 위에 남은 스키드 마크,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 유리 조각 따위를 한참이나 유심히 보고 있던 정언은 등 뒤에서 들리는 안녕하세요, 하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윤이었다.
윤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정언의 책상 한쪽에 살짝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늘 마시는 로비 카페의 벤티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출근하면서 커피 사러 갔다가 생각나서 물어봤더니 선배 아직 안 오셨다고 그래서요.”
파티션 너머에서 윤이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그 세심함이 작은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잠시 멈칫하던 정언은 애써 여상하게 아 고마워, 하고 대답하고는 방금 받은 창도의 메일을 윤과 민혜, 재희의 주소로 보낸 뒤 입을 열었다.
“우리 만났던 국장님이 메일 보낸 게 있어서 포워딩했으니까 확인해 봐. 그리고 내가 지금 전화번호 하나 줄 건데, 법영상분석연구소 주성안 소장님 번호거든. 그쪽에 전화해서 교통사고 현장 사진 감식 좀 부탁드릴 건데 언제까지 가능한지, 촬영은 언제 가능할지 스케줄 한 번만 확인 좀 해 줘.”
정언은 포스트잇 한 장을 떼어 전화번호를 적어서는 윤에게 건넸다. 윤이 네, 하며 정언의 손에서 포스트잇을 가져갔다. 짧은 한숨을 뱉은 정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늘 그렇듯 마시기 무섭게 정신이 번쩍 드는 트리플 샷의 위력이 몸으로 느껴졌다.
거절하기 어렵게 구는 것도 천성일까,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차가운 컵 표면을 만지작거리다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윤이 자신을 의식하는 것보다는 평소처럼 행동하는 게 나았지만, 자신이 윤을 밀어내면서 이런 식으로 계속 뭔가를 받는 입장이 되는 건 마음에 걸렸다.
고개를 두어 번 흔든 정언은 몸을 돌려 가방에서 메모리카드를 꺼냈다. 상우의 인터뷰 영상을 빼기 위해 카드를 리더기에 꽂기 무섭게 핸드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또 재희인가 싶어 무심코 액정에 흘끔 시선을 준 정언은 ‘최효명 여사’라는 이름을 확인한 순간 어, 하며 멈칫했다. 어머니였다. 정언은 바로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을 나서며 전화를 받았다.
“여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엄마가 딸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하는 게 어쩐 일이야?』
정언이 물은 말에 효명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정언은 비상구로 나가 문을 닫으며 웃었다.
“엄마가 방송국 피디보다 바쁘니까 그렇지. 웬일? 가게 안 열었어?”
『가게를 왜 안 열어, 열었지. 오늘따라 문 열자마자 바빠 죽는 줄 알았어. 이제 겨우 한숨 돌리니까 뉴스 나오길래 너 생각나서 걸어 봤지.』
“텔레비전 안 보면 내 생각 안 나고?”
짐짓 토라지는 척을 하는 정언에게 효명이 하이고, 하며 깔깔거렸다.
『사돈 남 말 한다. 엄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화 한 통 안 하는 게. 아니, 누굴 닮아서 그렇게 매정해?』
“엄마도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면 연락 안 하잖아. 내가 그 쿨한 최효명 여사님 닮았겠죠, 누굴 닮았겠습니까. 원래 밭 도둑질은 못 한다며.”
『아빠랑 붕어빵인 주제에 어디서 씨 도둑질해 온 것처럼 말하지 마, 이것아. 시집도 안 간 게 무슨 망측한 소리를 하고 있어.』
정색을 한 효명이 곧 목소리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너희 팀은 괜찮아? 요새 뭐 YBS 시끌시끌하다고 삼촌이 계속 그러던데. 뉴스에서도 청와대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정언이 너 괜히 뭐 또 위험한 거 하는 건 아니지?』
“뭐야, 새삼.”
속이 뜨끔했으나 애써 말을 돌리자 효명이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기자 남편에 피디 딸을 뒀나 몰라.』
“그러게 누가 데모하다 가게 뛰어 들어온 남자랑 결혼하랬나? 딱 봐도 그런 남자 만나면 인생이 피곤할 거 몰랐어?”
정언이 놀리듯 되묻자 효명이 으이구, 하며 나무라는 소리를 냈다.
효명과 현국이 처음 만난 건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때의 신촌이었다고 했다. 시위를 하던 현국이 사복 경찰에게 쫓기다 뛰어 들어온 곳이 외할아버지의 빵집이었던 것이다.
다 구워진 빵을 진열대에 놓고 있던 효명은 거지꼴로 들이닥쳐 잠시만 숨겨 달라고 애원하는 현국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그때 현국을 제빵실에 숨겨 준 건 외할아버지였다.
무사히 돌아간 현국은 그다음 날부터 빵집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단팥빵이나 소라빵 따위가 백 원, 이백 원 하던 시절이었다. 누가 봐도 고학생 꼴을 하고서는 하루에 몇 천 원씩 빵을 사 대는 남자가 멀쩡해 보일 리 만무했다.
그러기를 몇 주째, 계산을 하던 효명이 빵 엄청 좋아하나 봐요? 하고 묻자 얼굴이 빨개진 현국은 그쪽을 좋아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현국이 살아 있던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너는 맨날 위험하고 무섭고 그런 것만 하고. 내가 매주 방송 보면서 간이 다 떨려요. 아니, 피디도 남들 다 하는 그런 거 하면 안 돼? 어떤 피디처럼 연예인 만나서 결혼도 하고 그럼 좀 좋아?』
“바랄 걸 바라세요. 아빠랑 결혼해 놓고 아직도 떨릴 간이 남았어? 그럼 엄청 건강한 건데 다행이네.”
정언이 부러 농담처럼 대꾸한 말에 효명이 버럭 화를 냈다.
『넌 지금 엄마랑 장난하니?』
“장난할 시간 없고요, 엄마니까 YBS에서 제일 바쁜 내가 특별히 시간 쪼개 통화하는 거야. 나 서현국, 최효명 딸입니다, 여사님. 걱정 안 해도 돼.”
『못 살아, 정말. 안 바쁠 때 엄마 좀 보러 와. 삼촌도 너 보고 싶대. 엄마가 딸 보려면 텔레비전 틀어 놓고 언제 나오나 물 떠서 제사 지내는 게 말이 되니? 얼굴도 잊어버리겠어.』
“알았어, 알았어. 엄마, 나 들어가 봐야 돼. 나중에 다시 전화해.”
『그래. 밥 잘 먹고 다녀, 알았어? 어머, 손님 왔다. 끊을게.』
효명이 전화를 끊었다. 잠시 핸드폰 너머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언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벌써 몇 달 전이었다. 예전에는 신촌 부근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간혹 가게에 들르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그럴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언제 한 번 가긴 가야 되는데, 하며 생각한 정언은 눈썹 위를 문질렀다.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핸드폰이 다시 한 번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자 처음 보는 번호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정언은 비상구의 문손잡이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 남부지검 진형은입니다. 전한동 부장님한테 이야기 들었습니다.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세요.
정언은 손잡이를 놓고 다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서너 번 갔을 때 건너편에서 진형은 검사입니다, 하는 대답이 들렸다.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정언은 한 번 더 번호를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서정언 피디입니다. 전한동 부장님한테 연락 받으셨다고요?”
『아, 네. 서온 게이트 관련해서 취재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조용조용한 말투였다. 듣는 것만으로는 이런 사람이 그렇게 큰 사건의 담당 검사였다고는 절대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언은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퇴근 후에, 되도록 조용한 곳에서 뵈었으면 하는데요.』
“그러면 검사님께서 가능하신 날짜하고 시간, 장소 정해서 다시 연락 주시겠습니까? 제가 스케줄 맞추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따 연락드릴게요.』
네, 하고 대답하자 전화가 끊어졌다.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네, 하고 중얼거린 정언은 허공에 한숨을 뱉었다. 오늘따라 뭐가 이렇게 출근하자마자 난리인지 모를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