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사무실로 돌아가 자리에 앉자 윤이 곁에서 말했다.
“주 소장님하고 통화했어요. 분석은 다음 주 화요일까지 가능하대요. 촬영도 그때 했으면 하시는데요. 현장 사진 감식하시려는 거 맞죠? 사진은 그쪽으로 보내 드렸어요.”
“아, 오케이. 고마워.”
“그리고 송 작가님 지금 남정건설 전무로 있었던 권정홍 씨라고, 그분 인터뷰 따러 가신대요. 오전에는 못 들어오실 것 같다고, 선배 통화중이라 전화가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어머니와 통화하는 도중에 전화했던 모양이었다. 응, 하고 대답한 정언은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 부근을 눌렀다. 상우의 인터뷰 영상을 공유 폴더로 옮겨 놓은 정언은 지혁에게 메신저로 인코딩을 부탁하고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늘 먹는 진통제 병을 꺼내 뚜껑을 열자, 200정짜리 병의 바닥에 남은 진통제가 고작 몇 알뿐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제명에 못 죽지, 하고 중얼거린 정언은 병을 거꾸로 털었다. 순간 손이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진 병에서 남은 진통제가 모조리 흩어졌다.
“미치겠네, 진짜.”
중얼거린 정언은 이마를 짚었다.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바닥을 본 윤이 고개를 들어 정언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통제예요?”
정언에게 물은 윤은 다시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진통제 병을 집어 들었다. 정언이 내가 할게, 하며 윤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새 꼼꼼하게 흩어진 알약들을 주워 모은 윤은 통 안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깔끔하게 털었는지, 통 안에는 진통제가 한 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윤이 고개를 조금 기울이더니 정언을 보았다.
“선배, 어디 안 좋으세요?”
“아냐.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래. 신경 쓰지 마.”
뭐라고 말하려던 윤이 곧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에 또 마음이 약간 불편해졌다. 정언은 애써 거기서 시선을 돌렸다. 관자놀이 부근을 몇 번 누른 정언은 곧 말을 돌렸다.
“메일 포워딩한 거 확인했어?”
“아, 네.”
윤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는 표정으로 정언을 흘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취재 수첩 내용 봤는데, 운전기사였던 이대훈 씨는 병원에 실려 왔을 때 이미 사망 상태였고 김장순 이사는 병원에 후송되고 얼마 안 지나서 사망한 것 같아요. 사망진단서만 있는 걸로 돼 있던데, 그러면 부검은 안 된 거 아니에요?”
“그럴 것 같은데. 부검했으면 부검소견서도 보냈을 테니까. 사망진단서 내용 있어?”
“둘 다 과다출혈로 사망한 걸로 기록돼 있었나 봐요.”
정언은 윤의 말을 들으며 창도가 보내 준 사진을 다시 한 번 클릭해 보았다. 아마 지금은 이 도로의 모습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정언은 사진을 주의 깊게 보았다. 조명이 거의 없는 옛날 도로였고, 사진 하단의 찍은 시각은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 무렵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대훈 씨가 일한 지 오래된 사람이었나?”
“아, 그 내용도 있었어요. 김장순 이사가 십 년 넘게 데리고 있었대요.”
정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질문을 바로 캐치한 윤이 대답했다. 정언은 미간을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를 정도라면 충돌 순간의 충격이 엄청나게 컸을 터였다. 오랜 기간을 함께한 운전기사라면 김장순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을 게 분명했다. 졸음운전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사고가 난 지역은 포항으로 들어오는 길이었기에, 평소에도 자주 이용하는 도로였을 것이다. 조명 없는 도로의 야간 운행이라면 특별히 더 주의해서 했을 것이 당연했다.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비스듬하게 처박혀 반파된 차의 옆구리에는 긁힌 흔적이 선명했다. 정언은 창도의 말을 떠올렸다. 깨져 있던 왼쪽 백라이트, 운전석 방향의 도료 이염, 부실한 초동 수사.
이미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잡아다 자백을 강요해 범인으로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하던 시대였다. 목격자도, CCTV도, 블랙박스도 없는 현장을 누군가의 입맛대로 조리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 같은 건 없었다. 단 하나의 증거라도, 반드시 진실을 가리키기 마련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 진실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던 정언은 책상 위에서 짧게 진동하는 핸드폰 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 진형은입니다. 오늘 저녁 8시, 보광동 391-10 카페 슬로우 텀.
메시지는 간단했다. 두 손을 깍지 끼어 이마에 대고 있던 정언은 그 메시지에 이따 뵙겠습니다, 하고 답을 보낸 뒤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사무실의 공기가 문득 답답했다. 그 답답함을 참아 보려고 애쓰던 정언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약간 울렁거리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옥상에 올라가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윤이 이쪽을 보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정언은 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옥상으로 올라가 텅 빈 벤치에 앉은 채 한참 몸을 숙이고 있던 정언은 문득 바닥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온 건지, 윤이 거기 서서 정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은 봉투를 든 윤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채였다.
“무슨 일이야?”
정언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대답 대신 윤이 곁에 앉았다. 평소와는 달리 웃음기가 전혀 없는 그 옆모습이 어쩐지 낯설었다. 이 끝으로 아랫입술을 누르며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 같던 윤이 갑자기 벤치 위로 아무렇게나 늘어뜨려진 정언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윤의 행동에 눈을 조금 크게 뜬 정언은 거의 반사적으로 잡힌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윤은 다시 한 번 더 정언의 손을 감싸 쥐었다. 녹아드는 윤의 체온이 거의 델 것처럼 뜨거워, 정언은 자신의 손이 그렇게 차가웠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김 피디.”
당황한 정언은 윤을 불렀다. 윤이 머뭇거리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들고 온 작은 봉투를 정언과 자신의 사이에 두었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윤이 입을 열었다.
“계속 얼굴 안 좋으셔서 체하신 거 아닌가 싶었어요. 손 찬 거 보니까 맞나 봐요. 체하면 머리 아프니까, 혹시 몰라서요.”
열린 종이봉투 안에서 포장된 진통제와 소화제가 언뜻 비쳤다. 아마 자리를 비운 새 나가서 사 온 모양이었다. 진통제 병을 잠깐 본 게 다인데 어떻게 자신이 체했다는 것까지 알아차렸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런 것도 그냥 천성적인 다정함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걸까. 뭐라고 해야 할지 선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정언은 이마를 짚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잠깐만, 이거…….”
“선배가 무슨 얘기 하려고 하시는지 알아요.”
윤이 먼저 정언의 말을 끊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 거짓말 잘 못해요. 그날 선배가 그렇게 얘기하신 거 아무렇지도 않았다고는 안 할게요.”
순간 가슴 부근으로 짧게 지끈거리는 감각이 지났다. 윤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군다고 해서 정말 괜찮았을 리 없다는 생각이 뒤늦게 따라왔다. 누구나 타인의 상처에는 둔감하다지만, 자신이 다치기 싫다고 윤을 떠밀었다는 것을 깨닫자 부끄러움 같은 기분이 밀려들어 얼굴이 뜨거워졌다.
“선 넘었다고 생각하시면 죄송해요. 그런데 전 앞으로도 안 이럴 자신 없어요.”
그 목소리 끝은 잠긴 채였다. 정언은 눈을 들어 윤을 보았다. 흰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윤의 손끝이 떨렸다. 바람이 서늘했지만 결코 그 때문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게 뭐든 선배한테 강요하는 건 안 해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윤의 말이 충동적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생각해 왔던 것인지 가늠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그 입술 끝에서 떨어지는 단어들은 소년처럼 예민했다. 슬라이드 유리로 만들어진 것 같은 단어들은 조금만 건드리면 깨질 것 같아, 정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말을 멈췄던 윤이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저 너무 싫어하지 마세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정언은 말을 잃은 채 윤을 응시했다.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윤은 이쪽을 보지 않았다. 어쩌면 보지 못했다, 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수도 있었다. 짧은 정적이 지났다.
“감기 걸려요. 빨리 내려오세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윤이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은 몸을 돌려 비상구 문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가벼운 발소리가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벤치에 혼자 남겨진 정언은 그 소리의 잔상에 귀를 기울였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정언은 몸을 숙였다.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눈을 감은 정언은 머리를 감쌌다. 뺨이며 귀 끝으로 온통 열이 올랐다.
그러니까 저 너무 싫어하지 마세요, 하던 윤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윤을 싫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직후였다.
* * *
회의실 탁자에 걸터앉은 민혜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눈이 빨갛게 충혈된 게 아무래도 잠을 거의 못 잔 모양이었다. 윤은 앉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민혜를 올려다보았다.
“작가님, 괜찮으세요? 얼굴 너무 안 좋으신 거 같은데요.”
민혜가 그 말에 손을 내저었다.
“어젯밤에 남편하고 밤새 싸워서 그래요. 아우 진짜, 결혼하지 마. 내가 이렇게 애원할게. 음, 아니다. 김 피디는 결혼해도 돼. 근데 정언은 하지 마.”
턱을 괸 채 곁에 앉아 있던 정언이 그 말에 짐짓 정색을 했다.
“왜 김 피디는 되고 나는 안 되는데요? 사람 차별해요?”
“결혼하면 여자가 무조건 손해니까! 정언처럼 일 열심히 하고 그러는 사람은 더 안 돼. 남자들이 결혼 전에는 다 이해해 줄 것처럼 그러지? 결혼하면 다 달라져. 진짜 백이면 아흔아홉이 그래. 일하는 것도 좋지만 가정 좀 돌봐 달라고 그런다니까. 아니, 가정은 여자가 꼭 집에 있어야 돌봐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