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공공사업 쪽은 당시 입찰 담당했던 담당 공무원이 있겠네. 일단 그쪽 체크해 볼게요.”
한숨처럼 내뱉은 정언이 눈가를 꾹꾹 눌렀다. 윤은 다시 정언 쪽을 흘끔 보았다. 약을 먹고 나서도 괜찮아지지 않은 걸까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언이 눈가를 누른 채로 입을 열었다.
“이따 여덟 시에 보광동에서 진형은 검사하고 만나기로 했어요. 거기서 좀 더 자세한 얘기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쪽이 어느 정도 생각하고 만나자고 하는지를 모르니까.”
“서온 게이트 담당 검사? 무슨 불이익 당했다며, 괜찮대?”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말에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방 좌천은 피했는데 승진이 안 된다고 하는 거 같던데요.”
“정언이 만나자고 했어? 윗선에서 자른 거 우리가 다시 끄집어내면 본인한테도 부담 클 텐데?”
“전한동 부장님이 연락해 주겠다고 하셨거든요. 그쪽에서 얘기 들었다고 먼저 연락이 왔어요. 왜 만나자고 했는지는 뭐 만나 보면 알겠지. 아 참, 그 CCTV 요청한 건 어떻게 됐어요? 박규형 씨 내비게이션에 남아 있던 수도권 쪽 주소 인근 사설 CCTV 있잖아요.”
정언의 물음에 민혜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딱 쳤다.
“아, 그거 오늘 오후 중으로 보내 준다고 했어. 오는 대로 확인해서 알려 줄게.”
“체크할 거 장난 아니네, 진짜. CCTV 보고 뇌물 받는 장면 나와도 실제로 걔들이 뭘 얼마나 받았는지 자금 추적하려면…… 시방서하고 실제 자재는 언제 맞춰 보지? 얘들이 무슨 낌새 채기 전에 빨리 찾아야 되는데.”
정언이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자, 그 모습을 본 민혜가 팔짱을 끼었다.
“일단 영인 씨한테 부탁해서 문서에 있는 자재 리스트는 뽑아 놨어. 그 오상근 교수님 있잖아, 친환경 자재 관련 자문해 주기로 하신 분. 거기 리스트 보내서 물어보니까 목록상으로는 다 친환경 자재 1등급이래. 최고가 자재들이라고 하더라고. 진송신도시 스타일하우스 그게 그냥 스타일하우스가 아니고, 스타일하우스 에코프리미엄이라고 해서 친환경 공법하고 자재 사용하는 걸로 가격 올린 프리미엄 라인이더라.”
“진짜 나쁜 놈들이네요, 그럼. 돈은 돈대로 받아 놓고 실제로는 아니라는 거 아냐. 일반인들이 자재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정언이 미간을 찌푸리자 민혜가 으으, 하며 테이블 위에 몸을 뻗어 엎드렸다.
“그거 잡으려면 또 며칠 잠입해서 뻗치기 들어가야 되잖아. 자재가 한두 개가 아닌데 어디서 뭘 속이는지 알고 해. 그러기 전에 어디서 내부고발자 하나 안 떨어지나 물 떠놓고 기도 좀 해야겠다. 이번 생에 쌓은 덕으로 내세에 받을 복 좀 당겨쓰는 거 안 되나?”
“이 생에 이렇게 덕 쌓아 놓고 바라는 게 겨우 내부고발자예요?”
정언이 눈을 들어 민혜를 마주 보며 웃자 민혜가 과장된 표정으로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복이 그거라는 거 너무 슬프지 않아?”
“눈물 없이는 못 보겠는데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한 정언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일단 CCTV 들어오는 거 작가님이 확인 좀 해주시고, 내가 당시 입찰 담당한 담당 공무원 누구였는지 알아볼게요.”
그때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민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확인한 민혜가 어 잠깐만, 하며 서둘러 회의실을 나갔다. 정언은 탁자를 양손으로 짚은 채 서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내쉬는 숨에 그 마른 등이 한 번 크게 오르내리는 것이 윤의 눈에 들어왔다.
“선배, 아직도 속 안 좋으세요?”
조심스럽게 묻자 정언이 멈칫하더니 윤을 보았다. 습관적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린 정언은 곧 눈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아냐. 윤대석 씨 말고 다른 사람 누구였지? 이훈주 씨랑 고정민 씨? 미안한데 김 피디가 이거 다시 한 번 좀 알아봐. 이 사람들도 의심스러우니까. 조창식 계장 다른 연락처나 주소 알 만한 사람 누구 있는지 생각해 보고. 조창식 무조건 찾아야 돼.”
“이따 진형은 검사님 만날 때 같이 가실 거죠?”
대답 대신 윤이 되묻자 정언이 잠시 당황하는 듯한 표정을 했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윤은 정언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여덟 시 전에 알아볼 수 있는 건 최대한 알아봐 놓을게요.”
정언이 막 입을 열려던 참에 민혜가 문을 열며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지금 CCTV 영상 그쪽에서 보내 줬어. 지워진 날짜 빼고 보냈다는데 많진 않네.”
“아, 네. 일단 얼굴 나오는 부분은 다 캡처해서 체크하죠, 뭐. 모르는 사람은 현 기자한테 물어보는 걸로 하고.”
정언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자 민혜가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윤의 시선을 외면한 정언은 탁자 위에 흩어진 자료들을 모으며 말했다.
“김 피디는 내가 부탁한 거 먼저 해 줘. 아, 그리고 내가 민권당 소속 국교위 의원 사무실 연락처 줄게. 이쪽으로 연락해서 라고 얘기하고 혹시 최근에 진송신도시나 서온건설 관련해서 의원실로 제보 들어온 거 있는지도 물어봐. 이태영 의원하고 양창훈 의원이 우리 쪽하고 특히 친하니까 뭐 있으면 알려 줄 거야. 사무실에서 없다고 하면 직통 번호 줄 테니까 그쪽으로 만약에 그런 거 있으면 꼭 좀 알려 달라고 해. 황형두 의원은 국교위 소속은 아닌데, 내부고발자 제보 이쪽으로 들어가는 경우 많으니까 여기도 연락 돌려 보고.”
“네. 선배 점심도 안 드셨죠? 이따 저녁에 뭐든 좀 먹고 가요.”
윤의 말에 정언이 손을 멈추더니 잠깐 침묵하다 그래, 하고 대답했다. 뜻밖에도 순순한 대답이라 약간 놀란 쪽은 도리어 윤이었다. 먼저 나가려는 듯 몸을 돌린 정언이 회의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입을 열었다.
“김 피디.”
윤이 반사적으로 눈을 들자 정언은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나 김 피디 싫어하는 거 아냐.”
마치 딜레이 걸린 키보드를 두드리듯, 그 단어들은 머릿속에 뒤늦게 입력됐다.
“네?”
“오해하지 말라고.”
짧은 정적이 지났다. 얼어붙어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윤은 선배, 하고 다급하게 정언을 불렀다. 그러나 정언은 대답 대신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회의실을 나갔다.
닫힌 문을 멍하니 보고 있던 윤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왼쪽 가슴 위를 눌러 보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심장 부근에서 맴돌았다. 오해하지 말라는 건, 어쩌면…… 이 자리에 있어도 된다는 뜻일까.
늘 같은 자리처럼 느껴지면서도, 이럴 때면 결국 멀어지는 건 아니라는 희망이 자랐다. 선을 긋고 밀어내는데도 항상 같은 자리인 거라면 밀려나는 만큼 누군가는 다가오기 때문일 터였다. 그게 자신이든, 정언이든.
언제부터 이런 사소한 기쁨에 감사하며 살았더라, 하고 생각한 윤은 잠시 탁자 위에 이마를 박았다. 심장 뛰는 소리에 귀가 멀어 버릴 것 같았다.
* * *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지만 도로가 막히기는 매한가지였다. 빨간 신호나 다름없이 정체된 도로에서 윤은 귀에 꽂은 핸즈프리에 한참이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동안 그러던 윤이 곧 종료 버튼을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다 하루 종일 통화가 안 되는데요.”
이훈주와 고정민의 가족들 이야기였다. 오후부터 계속 연락을 넣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아, 형은을 만나러 가는 길에 다시 한 번 걸어 본 것이었다.
정언은 흠, 하며 팔짱을 끼었다.
“일부러 안 받는 건가? 양쪽 다 전화가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지?”
“번호 바꿨을 수도 있고, 모르는 번호라 안 받을 수도 있고…… 진짜 우연일 수도 있죠, 뭐. 내일 다시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윤의 대답에 정언은 미간을 누르며 그래, 하고 대답했다. 윤이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옆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오후 내내 거의 5분도 쉬지 못하고 어딘가에 전화를 돌린 탓인 듯했다. 정언은 그런 윤을 흘끔 보고는 물었다.
“황형두 의원실에서 연락 준다고 했다며, 아직 별 얘기 없었어?”
“네. 의원님이 오늘 지방에 지역 아동도서관 개관 행사 내려갔다고, 거기 갔다 와서 연락 준다고 하더라고요.”
“조창식 계장 쪽은?”
“장해나 씨가 사무실에서 같이 일한 직원한테 물어봐서 주소 알려 주겠다고 했어요. 정 안 되면 경일용역 찾아가서 드러누워 볼까 싶기도 하고요.”
윤이 앞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 바람에 잠깐 그 말을 해석하지 못한 정언은 곧 얼굴을 확 구기며 되물었다.
“제정신이야?”
윤이 대답 대신 웃었다. 정언은 뭐라고 한 소리 하려다 입을 다물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는 이마를 가리는 편이라 눈에 띌 일이 없기는 했지만, 윤의 이마 한쪽에 희미하게 남은 상흔을 불현듯 떠올릴 때면 매번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턱을 괴며 낮은 한숨을 쉰 정언은 눈가를 두어 번 문질렀다. 남의 속도 모르고 윤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손경일 다시 안 만날 수가 없잖아요. 일이 여기까지 왔는데. 예전부터 박규형 씨처럼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거기 계속 손경일이 엮여 있다는 거 확실하지 않아요?”
“그래서, 손경일이 살인범인 거 아니까 더 용기가 나?”
“선배가 이런 말 하고 제가 말려야 되는데 반대니까 이상한데요.”
농담 같은 말이었으나 문득 속이 뜨끔했다. 창밖을 보고 있던 정언은 화제를 돌렸다.
“나 내일 당시 입찰 담당 공무원 일 때문에 경북도청 쪽에 내려가 봐야 될 것 같아. 김 피디는 같이 갈 필요 없으니까 여기 있고. 의원실에서 연락 오거나 뭐 중요한 정보 있으면 그거 좀 알아봐 줘. 일찍 내려갔다가 아마 저녁 전에는 서울 도착할 거야. 사무실 다시 들어올 거니까 별일 없으면 먼저 들어가고, 전할 거 있으면 메시지 남겨 놓고.”
“혼자 가셔도 돼요?”
금방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정언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따로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이야,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