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그럼 당시에 뇌물, 뭐 현물, 향응, 현금 전부 포함되겠죠. 뇌물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계셨던 건데, 검찰이 자금 흐름 추적에 실패한 걸로 됐잖아요. 이게 정말 추적을 못 하신 겁니까, 안 하신 겁니까? 그때 취재한 자료 보니까 추적 불가능으로 돼 있던데요.”
정언이 빙빙 돌리지 않고 묻자 형은이 짧게 웃는 소리를 냈다.
“저한테는 굉장히 아픈 건데,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안 주시네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둘 다죠. 대한민국에서 금융 기록 추적한다는 거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당시에 저희가 엄대진계 의원 대부분의 차명계좌 추적을 했어요. 주로 많은 게 비서관이나 보좌관 명의 계좌, 그리고 친척들 계좌. 의원실 계좌에 정치후원금 형태로 들어오는 돈은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니까, 그런 거 제외하고라도 현금 흐름 자체가 눈에 띄는 경우는 무조건 조사했죠.”
“그런데 왜…….”
정언이 채 마저 묻기도 전, 형은이 대답했다.
“가이드라인이 내려왔어요. 주요 의원들은 보호해라. 저희가 추적한 계좌가 거의 백여 개 가까이 돼요. 그런데 그 중에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받은 계좌는 딱 두 개였어요. 그게 의원직 박탈당한 비례대표 최창묵 거였죠.”
최창묵은 주요 일간지 기자 출신의 언론정보학과 교수였다. 당시 주목받는 젊은 언론인이었으나 이 사건으로 완전히 잊힌 지 오래였다.
형은이 말을 이었다.
“정계 들어오려고 상당히 애썼던 사람인데 이 일로 정치 생명 끝났어요. 그 많은 혐의 중에 인정받은 건 몇 개 없는데, 그나마도 최창묵이 다 뒤집어썼으니까. 언론에도 그 외의 자료는 제공 못 하게 위에서 다 막아 버렸죠.”
형은의 말투는 담담했으나 그렇기에 더 그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권력의 한가운데서 손발이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은의 심정을 정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고는 포기하셨죠?”
“불가능했죠. 위에서 다이렉트로 경고가 왔어요. 진행하지 말라고. 항소 가면서 그때 저희가 거의 정신적으로 고문을 당하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상고까지 갈 여력이 없었어요. 위협, 본인들은 부정을 하지만 저희가 출퇴근할 때나 심지어 가족들한테까지 그런 게 있었기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었죠.”
위협…… 정언이 그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기 무섭게 곁에서 윤이 끼어들었다.
“윤대석 씨 가족분들도 그런 얘길 하시던데요.”
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구한 수법이에요. 정치적으로, 뭐 상당히. 내가 검사인데 내 한 몸하고 가족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누구라도 끝까지 몰릴 수밖에 없어요. 내가 어떻게 되는 건 상관없다 쳐도, 가족 얘기가 나오면 힘들죠. 일반인들은 어떻겠어요.”
“어떤 방식이었습니까? 혹시 증거 갖고 계신 건 없고요?”
윤의 물음에 형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발신번호 지우고 보내는 문자라든지, 가족들한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든지, 감시당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든지 하는 식이에요. 내가 검사인데 그 발신번호 추적을 못 해요. 조회를 하면 통신사에서 알 수 없다고 답변이 온다고요. 누가 그걸 견디겠어요?”
검사들조차 수사권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형은이 말하는 윗선은 가장 꼭대기일 가능성도 있었다. 정언은 문득 에서 내보냈던 청와대 홍보수석실의 녹취록을 떠올렸다. 그 변조된 목소리가 다시 뇌리를 지나자 춥지도 않은데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당시에 증인으로 신청했던 다른 분들은 누구죠?”
“뇌물하고 향응 제공했던 하청업체 사장들이 제일 많았죠. 여성철 의원실에서 처음에 이 문제 제기한 것도 그쪽으로 내부고발자 제보 들어갔기 때문이에요. 의원실에서 전한동 부장님한테 내부고발자 명단까지 제공했는지 그건 제가 잘 모르겠어요. 저희가 별도로 드릴 수 있는 정보가 어느 선까지인지, 그건 이정수 선배하고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 제가 여기 나온 것도 선배는 아직 몰라서요.”
형은과의 대화는 카페 문을 닫을 때까지 한참 더 이어졌다. 그 대화에서 대부분의 퍼즐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온건설과 엄대진의 관계, 하청업체의 처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전달책들.
그러나 퍼즐이 맞아 들어간다고 해서 기쁜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정언은 자신이 차라리 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게 그냥 착각이라면, 우연이라면, 그저 신의 장난처럼 벌어지는 일이라면.
하지만 자신의 앞에 놓인 모든 퍼즐의 조각들은 전부 진실이었다. 이 조각들이 그리는 그림이 무엇일지 두려워지는 건 자신뿐만이 아닐 터였다.
영업시간이 끝난 카페를 나섰을 때는 어느덧 열 시 반이었다. 형은과 헤어지고 주차장으로 돌아온 윤과 정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차에 시동을 건 윤은 운전석에 타는 대신 주차장의 펜스를 잡고 서서 서울 시내의 야경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정언은 한 걸음 뒤에 떨어진 채 그런 윤의 뒷모습을 보았다.
“만약에 우리가 이거 방송 못 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윤이 물었다. 침묵하던 정언은 대답했다.
“이게 전부 다 없었던 일이 되는 거지.”
없었던 일, 하고 윤이 혼잣말처럼 그 말을 다시 뇌며 펜스 위에 팔을 겹쳐 얼굴을 묻었다. 밤바람에 짧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그러고 있던 윤이 고개를 들더니 몸을 돌렸다.
정언에게 조수석 문을 먼저 열어 준 윤은 차에 타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익숙하지만 제목을 알 수 없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귀에 익은 걸 보면 아마 최신 가요인 듯했다.
곧 노래가 끝나고 발랄한 디제이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으나 뭐라고 하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윤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침묵을 견디기 힘든 것 같았다. 정언 역시 그 기분이 뭔지 알고 있었다.
윤이 정언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이미 열한 시를 훌쩍 넘긴 뒤였다. 정언은 집까지 안 데려다줘도 되는데, 하고 부질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어차피 윤에게는 씨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윤이 대답 대신 잠긴 도어록을 풀었다. 안전벨트를 풀던 정언은 문득 대시보드 아래 놓인 윤의 핸드폰에서 아까부터 LED 알림이 깜빡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메시지가 들어와 있는 모양이었다. 운전하는 동안 윤은 한 번도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아까 본 해나의 메시지가 머릿속을 지나쳤다. 그 메시지를 확인했을까. 불현듯 이유 없이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확인했다면, 답은 뭐라고 했을까…….
“왜 그러세요?”
그 생각에 빠져 잠시 넋을 놓고 있었는지, 윤이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약간 좁히며 물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정언은 아, 응, 하고 얼버무리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얼른 들어가.”
반쯤 열린 조수석 창 너머로 말하자, 윤이 어두운 창 저편에서 정언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해독 불가능한 표정. 불현듯 그 얼굴을 읽고 싶어졌다. 드문 일이었다. 정언은 그런 자신을 낯설게 느꼈다.
“내일 봐요, 선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 옅은 어둠을 타고 스몄다. 순간 머릿속의 생각들이 지워지며, 대신 포항에서 윤이 우리 저녁 맛있는 거 먹어요, 하고 말하던 그 순간의 장면이 되살아났다.
아주 일상적인, 하지만 자신의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들이 윤의 목소리로 발음될 때면 정언은 문득 완전히 잊고 있었던 삶을 자각하곤 했다. 서정언 피디가 아닌, 그냥 서정언의 삶.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함께하고 헤어질 때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는 어떤 순간들.
그런 순간마다 매번 윤이 거기 있었다.
문득 그 사실을 인식한 정언은 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웃는 듯한 표정이 그 하얀 얼굴에 번졌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래, 하고 대답한 정언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정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윤의 시선이 뒤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져서였다. 지금 돌아본다면 그 순간 뭔가 변해 버릴 것 같았다.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나, 그렇기에 더 겁이 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언은 집 앞에 섰다.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 핸드폰이 없다는 걸 깨달은 정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까지는 분명히 있었는데, 아무래도 윤의 차 안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아, 진짜…….”
정신이 어지간히 없긴 한가 보다 싶었다. 정언은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윤은 이미 주차장을 나갔을 게 뻔했다. 윤의 차 안에 떨어져 있다면 내일 아침에 찾아도 되겠지, 하고 생각한 정언은 습관적으로 도어록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가 저항 없이 돌아갔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서부터 찬물을 끼얹은 듯한 냉기가 지났다.
아직 비밀번호를 단 한 글자도 입력하지 않은 채였다. 정언은 시선을 내렸다. 부드럽게 움직인 손잡이에서는 잠금장치가 걸리는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정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마치 정언을 따라오듯 현관문이 소리 없이 앞으로 약간 열렸다.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되는 그 틈으로 집 안의 어둠이 복도에 스며들었다.
그 어둠은 불길할 정도로 고요했다. 입 안이 말랐다. 인간도 동물이기에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온몸의 감각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정언은 얼어붙은 것처럼 선 채 그 문의 틈새를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복도의 센서 등이 꺼지며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집 안의 어둠이 뒤섞여 발치에서 보이지 않는 뱀처럼 휘감겼다.
위협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건 그 순간이었다. 상우와 형은의 이야기가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쳤다. 미행이나 살해 협박 같은 건 이미 여러 번 당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집은 이야기가 달랐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이것이 단순한 빈집털이인지, 정말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