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눈앞에서 평소와 전혀 다른 정언을 본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정언이 공연히 심장 부근을 꾹꾹 눌러 보는 윤 쪽으로 잠깐 시선을 주었다.
형사가 재차 물었다.
“생각나는 사람은 전혀 없으시다는 거죠?”
윤은 정언이 그 말에 잠깐 주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윤에게는 분명 망설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정언은 곧 그런 적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모르겠네요.”
“없어진 것도 없다고 하시니까 이상하긴 한데, 가져갈 게 없었으면 뭐…… 최근에 이 지역에서 빈집털이 신고가 자주 접수되긴 했거든요. 그러면 이게 막 피디님 집을 일부러 노리고, 그런 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요?”
형사가 걱정하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우선 저희가 건물하고 인근 CCTV랑 현장 분석 진행하겠습니다. 이쪽에 당분간 순찰 강화하고요.”
“부탁드립니다. 여기 건물에 여자분들이 많이 사시는 걸로 아는데 걱정되네요. 경비실 쪽에 입주민들 주의하라고 공문 협조 요청해 주실 수 있나요?”
“아, 네. 그런 거야 당연히 해 드리죠. 놀라셨을 텐데 일단 뭐 사람 안 다친 거 다행이다 생각하시고, 이런 놈들은 CCTV 돌려 보면 금방 잡히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네, 하고 대답한 정언이 형사에게 자기 명함을 꺼내 주었다. 정언의 명함을 받아 든 형사가 무심코 그것을 보다 어, 하며 고개를 들었다.
“시사보도국 이거 혹시 팀 아닙니까? 저 지난번에 저기, 그 미제 살인사건 그것 때문에 여기 안호형 피디님이라고 그분 만났었는데.”
“아, 네. 안 피디 저랑 같이 일하고 있어요.”
정언의 대답에 형사가 감동받은 표정을 하며 정언의 명함을 셔츠 포켓에 집어넣었다.
“이야, 저 엄청 열심히 보거든요. 이거 참, 경찰 집에 도둑 드는 법 없다는데 피디님 집 터는 간 큰 새끼가 누군가 모르겠네요. 아무튼 저희가 빨리 조사하고, 결과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사이 현장 사진을 몇 장 더 찍은 감식반이 장비를 정리했다. 형사와 몇 마디를 더 나눈 정언은 경찰들이 완전히 철수하자 윤을 돌아보았다.
“시간 너무 늦었네. 김 피디, 그만 들어가.”
“선배는요?”
“침대만 대충 치우고 자면 돼.”
“여기서요?”
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친구 집이나, 어디 잠깐 가 계실 데 없어요? 오늘은 진짜 안 될 것 같은데요.”
집 상태가 문제가 아니었다. 정언이 이 꼴이 난 집에서 잠을 잘 생각을 한다는 게 더 문제였다. 정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뭐 설마 한 번 온 놈이 두 번 올 것도 아니고.”
윤은 다시 한 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치울 시간도 없는 정언의 스케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소한 며칠 정도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현장 보존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한숨을 쉰 윤은 우선 바닥에 넘어진 책장을 들어 도로 세워 놓았다.
깜짝 놀란 정언이 윤을 만류했다.
“아냐, 그냥 둬. 내가 하면 돼.”
“둘이 하면 금방 해요. 선배 혼자서 이걸 다 어떻게 치워요.”
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떨어진 책부터 우선 주워 모아 꽂기 시작했다. 정언이 결국 한숨을 쉬며 옷장을 열어 엉망으로 어질러진 옷들을 걸었다. 책장을 정리하고 깨진 그릇 조각들을 쓸어 모은 윤은 바닥을 꼼꼼하게 닦았다.
떨어진 물건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망가진 것들을 모아 버리며 그럭저럭 정리가 마무리된 건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윤이 마지막으로 창을 닫자, 그사이 도어록 건전지를 다시 끼우고 비밀번호를 바꾸며 문을 여닫아 본 정언이 보기 드물게 민망한 얼굴을 했다.
“김 피디한테 완전 민폐네, 이거.”
“지금 저 커피 엄청 마시고 싶은데 한 잔 주시면 넘어가 드릴게요.”
풀썩 소리가 나게 소파에 앉으며 웃자, 잠시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정언이 포기한 듯 찬장에서 머그컵을 꺼냈다. 그 난리통에 찬장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였다.
캡슐 하나를 내린 정언은 윤에게 컵을 건네주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이나 말이 없는 정언에게 시선을 주었다.
“선배, 괜찮아요?”
잠깐 멈칫하던 정언이 곧 응, 하고 대답했다. 윤은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순간 정언을 품으로 끌어당겼을 때의 그 서늘함이 되살아났다. 그때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했다.
떨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던 정언의 얼굴을 본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던 것이다. 정언이 자신을 밀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직후였다. 그러나 정언은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정언이 왜 그랬는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언에게 누군가가 필요한 순간 자신이 거기 있었던 걸로 충분했다.
“……아까는 미안했어.”
침묵을 깨고 정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요, 하고 물으려던 윤은 정언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자신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것 때문이 분명했다.
“그게 왜 미안한 일이에요?”
되물은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하지 않는 게 아니라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윤은 쉽게 알아차렸다. 윤은 커피를 조금 더 마셨다. 익숙한 씁쓸함이 입 안을 감았다. 한숨처럼 웃은 윤은 정언을 마주 보았다.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미안하다고 하실 거예요?”
“김 피디.”
“하필 저한테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면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저 아니라 다른 누구였어도 똑같이 미안하신 거면 그건 그럴 필요 없는 거니까 선배도 잊어버리시고요. 제가 어디 가서 소문이라도 낼까 봐 그러세요?”
농담처럼 내뱉은 마지막 말은 미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정언이 얼굴을 들어 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김 피디는 지금 이게 나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똑같이 했을 거 같아?”
의도를 확신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머릿속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윤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았다.
“그게 왜 궁금하신 건데요.”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야?”
윤은 순간 멈칫했다. 이런 식으로 묻는 건 정언답지 않았다. 언제나 선을 넘으려는 쪽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언 쪽이 그 선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일까. 사이를 둔 윤은 정언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말했다.
“아뇨. 대답할까요? 네. 다른 사람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고 배웠으니까. 그런데 선배 지금 이 얘기 하시는 거 아니잖아요. 제가 선배한테 하는 행동 남들한테 하는 거랑 다르니까, 그거 알고 있냐고 물어보시는 거 아니에요.”
어린애처럼 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처 받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해도, 고통을 막으려는 건 본능이었다.
윤은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정언의 시선을 맞받았다. 가독 불가능한 얼굴. 표정이 많지 않은 그 얼굴은 윤에게 때로 수면 밑의 세계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선배도 이유 아니까 저한테 선 넘지 말라고 하신 거잖아요. 제가 그거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정언이 말을 끊었다. 평소였다면 여기서 멈췄을 테지만 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얘기했지만 전 앞으로도 안 이럴 자신 없어요. 그리고 저한테 진짜 미안하신 거면 이런 걸로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세요. 전 선배가 이럴 때 혼자 있는 거 싫고, 지금 여기 제가 있는 거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런 생각 안 해요. 대답 된 거예요?”
정적이 지났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까지 셀 수 있을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기꺼이 불편함을 택하겠다고 마음먹고도 이런 순간이면 후회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만약 아무것도 아닌 척을 했더라면, 지금을 견디는 일이 조금 더 쉬워졌을까. 영원히 답을 알 수 없을 물음이었다.
윤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남은 커피를 마셨다. 어차피 정언의 대답은 정해져 있을 터였다. 그만 가는 게 좋겠다고. 속이 답답해졌다. 어느새 온기가 사라진 컵을 탁자 위에 다시 내려놓았을 때, 정언이 입을 열었다.
“김 피디가 다칠까 봐 걱정됐어.”
그건 예상한 대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언은 바닥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멈칫한 윤은 저도 모르게 눈을 들었다. 정언이 말을 이었다.
“여기 있어 줘서 고맙고. 이 말 하고 싶었어. 기분 상하게 할 생각 아니었어. 그랬다면 미안해.”
정언은 그저 인사치레로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담담한 말투였으나 그게 진심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머릿속이 일시에 정지한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낮은 한숨을 쉰 정언이 윤을 마주 보았다.
“윤대석 씨 사고 당시 CCTV 영상 아마 에서 받은 자료 중에 있을 거 같은데 한 번 찾아봐. 없으면 진 검사님한테 연락해 보고, 영상 받으면 그거 법영상분석연구소 보내서 추가 감식 좀 부탁해 줘. 부검 소견서하고 윤대석 씨한테 약 처방했다는 병원하고 약국 어딘지도 알아보고. 시간 너무 늦었으니까 그만 가. 내일 경북도청 갔다 오면서 연락할게.”
순식간에 거기 존재하는 건 다시 평소의 정언이었다. 윤은 언제나 순간의 기억에 마음이 붙들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주 보던 눈동자, 웃는 얼굴, 나지막한 목소리, 마치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찰나에 기억되는 그 반짝임.
윤은 정언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했다. 때로는 쉽게 읽을 수 없는 그 표정조차도 이 감정을 되돌리지 못하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을까.
“혼자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윤이 묻자 정언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라고 하면 어쩔 건데.”
“제가…….”
같이 있겠다고 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무심결에 말하던 윤이 입을 다물자 정언이 피식 웃었다.
“됐어. 얼른 가.”
정언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 얼굴에서 애써 눈을 떼며 몸을 일으키자 정언이 따라 일어났다. 현관을 나서려는 윤의 등 뒤에서 정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따라왔다.
“조심해서 들어가.”
얇은 다정함. 미미하지만 확실히 느껴지는 그 감각에 윤은 저도 모르게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거기 약간의 불안감이 스며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윤은 그 까닭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