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1
11화.
앉아 있는 재희에게 시선을 준 현진이 정언에게 먼저 커피 한 잔을 내밀며 물었다.
“얘 오늘 누구 결혼식 간대?”
“이러니까 막 하고 다녀야 돼. 보는 사람마다 나한테서 눈을 못 떼잖아.”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한 재희가 기대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진이 허리에 손을 짚으며 혀를 찼다.
“야, 지나가는 사람 눈깔 죄다 본드로 붙여도 되니까 평소에도 잘 좀 하고 다녀. 얼굴이 아깝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꾸미고 살아야지, 늙으면 그렇게 빼입어도 티가 안 나.”
“누가 들으면 환갑 진갑 다 지낸 줄 알겠네. 아직 젊고 아름다우신 한현진 작가님이 왜 그래요.”
재희가 손을 깍지 끼어 뒷머리를 받치며 빙글거렸다. 그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현진이 물었다.
“야, 강재희. 공자님이 마흔을 왜 불혹이라고 한 줄 알아?”
“왜 그랬는데요?”
캐리어에서 커피 한 잔을 더 꺼낸 현진이 재희의 손에 컵을 쥐여 주고는 입에 반강제로 빨대를 물렸다. 재희가 눈을 들어 쳐다보자, 현진이 재희의 이마를 딱 소리가 나게 때렸다.
“사람이 마흔이 딱 넘어가잖아? 그러면 너처럼 주둥이에 침도 안 바르고 반질반질한 소리 하는 놈한테 마음이 안 흔들려.”
“나 완전 진심인데.”
재희가 얻어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대꾸하자 현진이 얼굴을 구겼다.
“한 삼 년 전에 그랬으면 내가 불쌍한 연하남 하나 키운다 생각하고 너 거뒀을 텐데 이젠 누나가 기력이 없다. 주둥이 다물고 커피나 마셔.”
“듣던 중 아쉬운 소리네. 그땐 내가 아직 어려서 누나의 매력을 몰랐잖아.”
재희가 진심으로 아깝다는 얼굴을 했다. 그 즉시 물총새 물 쏘듯 현진의 타박이 돌아왔다.
“아침부터 제비같이 입고 총천연색으로 지랄하면 재미가 쏟아지지?”
“아, 난 이래서 한 작가님 너무 좋아. 미치겠어, 아주.”
정언은 배를 잡고 웃는 재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침부터 속에도 없는 농담을 해대는 걸 보니 어지간히 피곤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컨디션이 나쁠수록 부러 더 괜찮은 척하는 건 재희의 오랜 습관이었다.
“할 얘기 있다면서요. 그거나 해 봐요.”
정언의 말에 재희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딱 치더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거. 서 피디 팀에 사람 하나 충원할 건데…… 이따 회의에서 얘기하자.”
“충원? 누구를요? 공채 시즌도 아닌데?”
“지금 여기 들어올 미친 애가 있다고?”
정언과 현진은 동시에 물었다. 충원이라니 생각도 못 한 얘기였다. 재희가 손을 휘적거렸다.
“자세한 건 이따 얘기하자고. 나 진짜 너무 피곤하니까 삼십 분만 눈 좀 붙이고. 집에 괜히 갔다 왔어. 잠깐 편하게 있었더니 더 피곤하네.”
더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전, 재희가 커피를 밀어 놓고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현진의 말대로 재희가 보름 가까이 하루도 퇴근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폐지 얘기가 나왔다고 방송이 안 나가는 건 아니었다. 인력도 부족하다 보니 매주 방송 준비만으로도 1분 1초가 빠듯했다. 그사이 노조 사무실, 국장실, 법무팀, 외부 로펌 순회도 해야 했다. 말 그대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마른 편이었는데 최근에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독 도드라지는 골격이 눈에 걸렸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정언은 재희의 어깨 위로 손을 짚었다.
“선배, 숙직실 가서…….”
정언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정말 피곤했는지, 재희는 그새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혀를 찬 정언은 낡은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담요를 집어 들어 재희에게 조심스럽게 덮어 주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자리에 돌아온 정언은 화면보호기 모드가 켜진 모니터를 응시했다. 곧 다음 방송 기획안을 써야 했는데, 아직 아이템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폐지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일이 손에 잡힐 리 만무했다.
삼십 분쯤 고민하는 사이 팀원들이 하나둘씩 출근하기 시작했다. 죄다 다크서클과 피로감에 절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들 멀쩡하게 들어왔다가도, 석 달이 지나기도 전 폐인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아직 한창때인 이십 대 중후반의 작가들도 화장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몰골이었다. 아침부터 고카페인 에너지 드링크를 나눠 마시며 출근한 작가들이 정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임찬수, 최석현, 민철진, 주예준, 안호형, 막내인 우지혁까지 피디들이 모두 착석을 마친 건 건 열 시 직전이었다. 호형은 정언과 입사 동기였고, 지혁은 이제 2년 차를 갓 넘긴 막내였다.
지혁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다른 팀에 있다가 로 온 지 사오 년쯤 된 피디들이었다. 최고참인 찬수는 후배인 재희 밑에서도 불평 없이 무던한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이 아니면 오래 버티기 힘들기도 했다. 재희와 동기인 석현 아래로는 일이 년 정도씩 연차가 차이 났다.
아직 입봉 전인 지혁을 제외하고, 재희와 정언을 포함한 이 일곱 명은 수백 명의 피디들이 를 탈주하는 과정에서 남은 최정예 라인업이었다.
물론 본인들 스스로는 도망갈 타이밍을 못 잡으면 이 꼴이 난다며 자조하는 라인업이기도 했다. 시보국이 엉망이 되기 시작한 뒤로는 더 그랬다. 촬영 보조, 예고편 편집, 테이프 반납 같은 조연출 업무까지 직접 해야 하는 상황이니 어쩌다 이 꼴이 됐나 싶은 건 당연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출근한 석현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세이프를 외쳤다. 열 시 정각이었다. 석현의 말이 신호라도 된 양, 죽은 듯 엎드려 있던 재희가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 삼십 분째였다. 알람도 안 맞췄는데 그 상태로 딱 삼십 분을 자고 일어난다는 건 언제 봐도 초인적인 의지력이었다.
“회의실 들어와.”
재희는 얼음이 반쯤 녹은 커피를 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였다. 속으로 혀를 찬 정언은 재희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섰다. 팀원들이 하나둘 따라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눈으로 인원수를 확인한 재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일단 스케줄부터 파악합시다. 주 피디가 다음 주 방송이지? 어느 정도까지 됐어?”
예준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다이어리를 펜 끝으로 짚어 가며 대답했다.
“취재는 거의 마무리됐고요, 다음 주 월요일쯤 가편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월요일? 원래 주말에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추가 인터뷰 딸 게 있는데 인터뷰랑 스케줄 조율이 힘들어서요. 그쪽에서 주말에나 가능하다고 해서…….”
예준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눈이 피로한지, 재희가 들고 들어온 안경을 쓰고는 눈가를 몇 번 누르며 자기 다이어리에 일정을 체크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 오전까지 내가 일단 볼 수 있게 해 줘. 그리고 안 피디, 시청자 게시판에 저번 주 방송 얘기 올라온 거 봤어? 자막 실수 있었다던데.”
호형이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아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네, 확인했습니다.”
“바쁜 거 아는데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큰 오류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사소한 실수도 쌓이면 나중에 크게 터져. 내가 더 꼼꼼하게 봐야 되는데 상황이 그렇게 안 되잖아.”
“죄송합니다.”
호형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이자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죄송할 건 없고. 내가 종편 때 확인 못 한 것도 잘못이니까. 일단 수정하고, 지금 VOD 서비스 올라간 것까지 전부 수정본 나가게 해. 게시판에 수정 내역 공지도 올려 주고. 임 선배하고 최 피디, 서 피디는 아이템 정했어? 이번 주 안에 기획안 체크한다고 했잖아.”
찬수가 펜 뚜껑으로 눈썹 위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생각한 건 몇 개 있는데, 위에서 까일까 봐 뭘 함부로 못 하겠어. 기제국에서 촬영 들어간 거 캔슬시켰다는 소리 듣고 나니까 겁나 죽겠다, 야.”
재희는 손을 깍지 끼어 입가에 대며 잠시 침묵했다. 짧은 한숨을 뱉은 재희가 찬수를 마주 보았다.
“그러면 일단 아이템 몇 개 뽑아 놓고 우리끼리 얘기를 좀 해 보죠. 나도 아직 못 정했으니까, 각자 뽑아 온 아이템 중에 괜찮은 거 골라서 가져가면 어때요?”
듣고 있던 현진이 갑자기 생각난 듯 툭 내뱉었다.
“기제국 얘기 하니까 생각났는데 그거 재밌을 느낌 아니냐? 위에서 신도시 다큐 그렇게 질겁하는 거 보니까 뭐 있는 것 같지 않아?”
찬수는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얼굴로 펄쩍 뛰었다.
“어우, 나도 그거 봤는데 난 무서워서 못 하겠더라.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목 날아가면 어떡하라고. 한 작가야 독신이지만 나는 애가 둘이야, 둘. 큰애는 중학교 간다고 돈 들어가는 게 말도 못 하는데 벌써 잘리면 뭐 해먹고 살아.”
찬수의 한탄에 현진이 측은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이래서 에는 결혼 못 한 애들만 와야 된다니까. 사람이 지킬 게 없어야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부인 지켜야지, 애들 지켜야지, 그럼 한국 사회는 결혼 못 해서 나라에 보탬 안 되는 애들이 지켜야지 뭐 어떡하냐. 야, 강재희. 너는 나라에 보탬도 안 되면서 임찬수 가정 지킬 수 있는 자리 좀 알아봐 주지 여태 뭐했어?”
회의실에 왁 웃음이 터졌다. 찬수가 현진에게 눈을 흘겼다. 잠깐 팀원들을 따라 웃던 정언은 몸을 숙여 곁에 앉은 지혁에게 속삭였다.
“우 피디, 혹시 그 사내 게시판 올라왔다는 글 봤어?”
“네.”
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언은 지혁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그거 누가 쓴 거야? 내용이 뭔데? 기제국 다큐 캔슬된 거 관련이라며?”
“그게요…….”
지혁이 막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회의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재희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사람이 잠시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섰다.
정언은 잠깐만, 하고 지혁의 말을 끊으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젊은 남자였다. 해사하다는 말이 딱 어울릴 법한 잘생긴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훌쩍 큰 키에 댄디한 스타일은 덤이었다. 아나운서국이라면 모를까, 시보국에서는 어지간하면 보기 힘든 부류였다.
작가들이 즉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짧은 순간 무언의 감탄이 오갔다. 그것을 알아챈 정언은 픽 웃으며 다시 남자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십 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에는 아직 소년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초면인데 왜 그런지 모를 노릇이었다. 연예인 누구를 닮아서 그런가 싶었으나, 정언이 아는 연예인은 한 손에 겨우 꼽을 정도였다.
정언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재희가 파란색 PP 박스를 품에 꼭 안고 선 남자를 가리켰다.
“이쪽은 오늘부터 우리 팀에서 일하게 될 김윤 피디. 인사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