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세요, 네?”
다짐을 두는 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정언이 팔짱을 끼었다.
“내가 할 말 같은데. 김 피디도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아냐.”
정언이 윤의 등을 떠밀어 문 밖으로 내보냈다. 내일 봐요, 하고 복도에서 인사를 건네자 정언이 대답 대신 눈짓을 했다. 당연히 먼저 문이 닫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문을 반쯤 연 채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정언에게 약간 당황한 윤이 눈을 깜빡였다.
“저 갈 거예요.”
“알아.”
“왜 안 들어가세요?”
“그냥.”
정언은 짧게 대답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윤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자신이 코너를 돌아 들어가고 나서야 멀리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정언이 자신의 뒷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윤은 그 자리에 멈췄다.
다칠까 봐 걱정됐다고, 여기 있어 줘서 고맙다고, 기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그 말들이 ‘어떤 인간적인 부분’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도, 마치 먼저 이쪽으로 발을 딛는 것처럼 보이던 그 찰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건 윤은 잠시 헤드레스트에 뒷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만약에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보지 못했다면, 망설이다 때마침 들어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 뛰어가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윤은 그 우연들을 떠올렸다. 여러 개의 우연이 교차되는 순간은 늘 필연적인 것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그런 것이 아닐까. 정언이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바로 그때,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마른 어깨와 등을 토닥일 때 느껴지던 가는 떨림,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숨소리, 막 내린 눈 같은 차갑고 희미한 향. 어둠 속에서 품 안으로 녹아들던 그 서늘하고 위태로운 감각들이 환각처럼 되살아났다.
윤은 긴 숨을 뱉었다. 허공에 흩어지는 숨결을 따라 그 환각의 입자들이 잠시 부유하다 다시 기억 속으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21.
여주교도소 주차장에 들어선 재희는 다이어리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교도소 취재가 처음도 아니었고 여주교도소는 시설 좋기로 이름난 곳이었으나, 그렇다 한들 썩 기분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한 남자가 다가왔다. 재희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취재 요청 드렸던 강재희 피디입니다.”
“아, 네. 소장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먼저 총무과에서 서류 작성해 주시면 바로 접견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재희는 앞장서는 남자의 뒤를 따랐다. 총무과 사무실에서 접견 신청서를 작성하자, 남자가 신분증과 신청서를 확인한 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 몇 마디를 나눈 남자가 곧 전화를 끊고는 재희에게 물었다.
“40분 정도 후에 접견 가능하시답니다. 녹취나 촬영 불가한 건 아시죠? 먼저 대기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네, 그렇게 하죠.”
재희가 대답하자 남자가 재희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한 긴 복도를 지나자 접견 대기실이 나타났다. 남자가 대기실의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어떻게 딱 한가한 날에 맞춰 오셨네요. 원래 이렇게 급하게 취재 요청하시는 거 소장님이 잘 안 받아 주시는데…….”
“미리 공문 준비해서 보내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이, 아닙니다. 접견 준비되면 불러 드리겠습니다.”
재희가 바로 사과하자 남자가 웃으며 손을 젓고는 대기실을 나갔다. 텅 빈 대기실 의자에 앉은 재희는 몸을 숙이며 깍지 낀 손 위에 이마를 대었다. 밤새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머릿속은 또렷했다.
편지를 보낸 허주경은 하청업체인 주경공사 대표였다. 주경공사는 주로 서온건설이 수주한 공공건설의 하청을 맡는 업체였다. 회사 수익의 큰 부분을 서온건설에 의존하고 있어, 경쟁사 사이에서는 자회사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했다.
주경은 편지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자신이 오랫동안 서온건설 본사에 로비를 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직원 수 다섯 명으로 시작했던 소규모 업체가 수백 명 단위의 회사가 되는 데는 로비의 힘이 컸다. 주경은 회사에 붙어 있는 날보다 접대를 하러 다니는 날이 더 많았다.
간부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본사 직원들에게 먼저 로비를 해야 했다. 수시로 선물을 보내고 명절에는 과일 세트 아래 돈 봉투를 따로 넣어 부치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렇게 공을 들여 간부들을 직접 접대하게 되자, 판검사, 국회의원, 국토부 공무원들이 접대 자리에 하나둘 끼기 시작했다.
접대 자리에 동행하는 이들의 레벨이 높아지는 만큼 공사 규모도 늘어났다.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간부들은 심지어 주경에게 공사 발주처로 뇌물을 전달하는 일을 시키기도 했다. 만일 입찰 비리가 들통 난다 해도 하청업체에 뒤집어씌우려는 손쉬운 수작이었다.
알면서도 그때는 이미 발을 뺄 방법이 없었다. 유착이 궤도에 오르고 일상이 되어 버린 채 수년이 흘렀다. 주경이 본사 회계 과장 고정민을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정민은 본사에서 로비 대상을 관리하고, 대상들 사이에 직접 뇌물을 전달하기도 하는 전달책이었다. 주경은 상당히 오랜 시간 서온건설과 관계를 맺어 왔으나, 본사 전달책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처음이었다. 따로 만난 자리에서 정민이 먼저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은 탓이었다.
거기서 정민은 주경에게 솔깃한 제안을 건넸다. 자신이 전달책으로 로비 리스트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역이용하면 크게 한탕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민의 제안은 리스트에 있는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들을 협박하고, 이걸 빌미로 주경공사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줄 테니 자신에게 투자조로 돈을 달라는 소리였다.
뜻밖의 말에 얼떨떨해진 주경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경에게 생각할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었다. 본사의 천중헌 이사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온 건 그다음 날이었다.
새벽 한 시에 한강 둔치에서 주경을 만난 천중헌 이사는 주경에게 처리해 줘야 할 일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주경은 무조건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틀 뒤 주경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남자는 미리 가져온 차를 주경에게 운전하게 하고 자신은 조수석에 탔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남자가 시키는 대로 내비게이션에 입력된 주소로 향한 주경이 도착한 곳은 서울 근교의 일동저수지 부근이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 위에서 누군가가 서성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남자는 주경에게 무조건 액셀을 밟으라고 강요했다. 절대 죽지 않는다며 칼을 들이밀고 고함을 치는 남자 앞에서 주경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라이트를 모두 끄고 그에게 돌진한 주경은 차에 묵직하게 부딪치는 이물감을 느꼈다. 허공에 떠올랐던 몸이 마치 다 익은 열매가 떨어지듯 도로 위로 들러붙듯 추락했다. 그러고도 브레이크를 밟지 못해, 떨어진 몸 위로 차가 다시 한 번 지났다.
주경은 남자가 재촉하는 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남자는 자신을 근처 휴게소에 내려 주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주경에게 엄포를 놓았다. 주경은 꽁지가 빠지도록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정민이라는 사실을 안 건 사흘 뒤였다. 회사로 찾아온 경찰은 고정민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주경을 체포했다. 고속도로 CCTV를 추적한 결과 주경의 얼굴이 찍힌 화면이 발견된 것이다. 정민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했다.
천중헌 이사가 보낸 변호사의 조언대로 주경은 정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법정에서 정민과 따로 만난 음식점의 CCTV와 주경의 번호로 발송된 문자가 증거로 제출됐다. 그날 밤 일동저수지 낚시터에서 만나자는 내용의 문자였다.
주경은 그런 문자를 보낸 적이 없다고 항변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살인 및 위증 혐의로 12년 형이 내려졌다. 변호사는 회사와 가족을 지키고 싶다면 항소를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주경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재희가 이 편지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었다. 주경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었기에, 어느 정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각색되어 있을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모든 내용이 전부 거짓이라고 판단할 근거도 없었다.
실제 당시 사건을 보도한 기사도 몇 개 있었다. 하청업체 사장이 뇌물을 요구한 본사 직원에게 앙심을 품고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서온건설 게이트와는 전혀 관련 없는 별개의 건으로 보도된 것이었다. 누구도 이 사건이 거기 연관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세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신에게 그 편지들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강재희 님, 장소변경접견실로 이동하시겠습니다.』
벽에 붙은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생각에 빠져 있던 재희는 퍼뜩 고개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도관 한 사람이 문 밖에서 재희를 접견실로 안내했다. ‘장소변경접견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접견실 앞에서 교도관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피디님, 취재 시간은 한 시간으로 제한된다고 전해 달라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재희는 안으로 들어섰다. 교도관이 들어와 등 뒤에서 접견실 문을 닫았다. 미리 와서 앉아 있던 남자가 눈을 들어 재희를 쳐다보았다. 작은 체구에 깡마른 중년의 남자였다. 겁을 먹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눈을 굴리는 남자에게 다가간 재희는 손을 내밀었다.
“ 강재희 피디입니다. 허주경 선생님 맞으십니까?”
“네, 저…… 제가 편지를 여러 번 보냈는데…….”
주경이 재희의 손을 잡았다. 앙상한 손은 거칠고 차가웠다. 잡은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재희가 웃어 보이고는 자리를 권했다.
“앉아서 얘기하시죠.”
“아, 네.”
주경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무릎 위에 놓인 손끝을 불안하게 긁적이던 주경이 재희를 마주 보았다.
“라고 하셔서 제가 좀, 그……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 작년부터 편지를 여러 번 보냈는데 얘기가 없으셔서…….”
의도를 가늠하는 듯한 말투에, 재희는 바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