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12
112화.
“그렇죠. 저는 이제, 직접 접대를 하러 다니니까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간혹 현물 준비해서 들키지 않게 보내라, 이럴 때 택배처럼 해서 어디 맡기거나, 지하철이나 백화점 사물함 이런 데 넣으면 본사 직원 누가 가져간다, 그건 알았죠. 그걸 했던 게 그 사람이었어요.”
재희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주경이 15년 가까이 서온건설에 뇌물을 줘 왔고 고정민을 죽인 뒤 수감됐다면, 최소한 부고 명단의 네 사람 중 규형을 제외한 세 사람과 함께 일했다는 뜻일 터였다.
“그럼, 고정민 씨 전에는 누가 일했는지 전혀 모르셨던 거죠?”
재희가 묻자 주경이 즉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고정민이가 언제부터 일을 했는지, 그런 것도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굳이 알려고도 안 했고요. 일단 제가 주는 방식은 그랬으니까, 그 사람들하고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까. 다른 업체에서는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정민 씨가 그 자리에서 어떤 말을 했습니까?”
주경이 하얗게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이고는 잠시 기억을 더듬다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 말은 자기가 이거 누가 받는지 다 알고 있다.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냐, 매번 돈 이렇게 갖다 바치면서도 언제 모가지 잘릴지 몰라서 덜덜 떠는 거 언제까지 할 거냐. 발상을 바꿔 봐라. 이 리스트 언론에 터트리겠다고 협박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자기한테 투자하면 판을 뒤집어 주겠다는 얘기였습니다. 다이렉트로 국회, 정부하고 연결이 되면 지금처럼 서온에만 목 안 매도 된다고, 공공건설 하청 따는 거 쉽다고, 그거였죠.”
철저한 을 입장인 하청업체에서는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었다. 재희는 메모를 하며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접대를 하는 하청업체가 주경공사 하나가 아니었을 텐데, 선생님한테만 연락을 한 겁니까?”
“그 부분까지는 제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중에 생각하기에, 고정민이 꼬리를 밟혔잖아요. 그게 아마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걸리지 않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죠.”
주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재희는 펜 끝을 멈추며 잠시 생각했다. 주경의 말대로일 수도 있었다. 전달책을 아무나 골라 맡겼을 리 없었다.
특히나 회계 과장이라면 회사의 자금 흐름을 파악하기 쉬운 자리였다. 사측에서 고정민을 믿을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리스크를 짊어지면서까지 굳이 전달책으로 쓸 이유는 없었다. 그런 인물을 바로 제거할 정도였다면 이미 그 전부터 무슨 낌새를 챘을 것이 분명했다.
“천중헌 이사에게 연락이 온 게 언제였다고 하셨죠?”
“제가 고정민을 만나고, 바로 다음 날 저녁에 전화가 온 겁니다. 새벽 한 시에 한강 둔치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저는 또 뭐 뒤로 달라고 하는 얘기일 줄 알고 나갔죠. 가끔 이제, 위에 알리지 않고 간부들이 개인적으로 필요한 돈 얼마 있으면 받아가고 그런 일이 많았으니까.”
동네 깡패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재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주경이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가니까 이제 차를 세워 놓고, 이쪽으로 오라고 전화를 한 거죠. 저는 제 차 세워 놓고 이사님 차에 탔고. 타자마자 딱 그러는 겁니다. 허 사장, 일 하나 처리할 게 있어. 이거 꼭 해 줘야 돼. 제가 뭐 거절할 그런 게 하나도 없었죠. 무슨 일인지도 얘기를 안 하니까. 뭔데 그러시냐 묻는데 대답은 안 하고, 모레 여기로 전화 오는 거 받아라 그러면서 핸드폰을 하나 주는 겁니다. 폴더폰, 구형 모델.”
“대포폰이었습니까?”
“네, 그렇죠. 저는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고 그냥 전화만 기다렸죠. 이틀 지나서 밤에, 아홉 시 열 시가 다 됐던가, 넘었던가, 그건 지금 확실하지가 않아요. 아무튼 제가 전화 기다리느라 너무 신경을 써서 그날 저녁도 못 먹었거든요. 회사에 있다가 아무래도 전화가 안 오려나 보다 싶어서 나갈까 하는데 그때 전화가 온 겁니다. 회사 근처에 오래된 공영주차장이 하나 있는데 거기로 오라고. 가니까 어떤 남자가 차를 대놓고 있다가 무조건 타라는 겁니다. 운전을 하라고 하면서.”
“제가 편지에 보니까 계속 그냥 어떤 남자라고만 적으셨던데 누군지 전혀 모르시는 겁니까?”
그 말에 주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 처음 본 사람이었습니다. 나이는 뭐 한 사십 좀 넘었을까 싶은데, 인상이 막 그렇게 좋진 않더라고요. 아, 이거 뭐가 잘못됐다, 이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할 수가 있습니까.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이미 찍어 놨길래 그냥 시키는 대로 갔죠. 가서, 가 보니까 거기가 일동저수지인 겁니다. 전에 가끔 낚시 가던 데라 알았죠. 시동 끄고, 라이트 끄고 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누가 맞은편에 차를 세우더니 내려서 담배를 피워요.”
주경의 목소리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되새기는 것이 무서운 듯, 주경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잠시 밭은 숨을 몇 번 쉬던 주경이 손끝을 말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거기도 라이트를 껐고, 나도 껐으니까 얼굴이 안 보이죠. 담뱃불만 빨갛게, 이렇게 보이고.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시동 켜고 밟으라는 겁니다. 거기가 차 한 대가 지나가기가 힘들어요. 어디를 어떻게 밟으라는 건가 싶잖아요. 네? 그러니까 저 새끼 치어 버리라고, 그럽니다. 내가 너무 놀라서 사람을 왜 칩니까, 하니까 갑자기 나한테 뭘 들이미는 겁니다. 보니까 큰딸 사진, 그때가 졸업 시즌이라 졸업사진 찍은 거. 앨범도 안 나왔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요. 딸이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그러면 좋은 데 시집보내야지 시집보내기도 전에 딸 시체 보고 싶냐…….”
목이 메는 듯 주경이 말을 멈췄다. 코끝을 문지르던 주경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그러면서 칼을 이렇게 목에 대는데 제가, 제가 그때 벌벌 떨면서 시동 걸고, 갑자기 깜깜한 데서 시동 거는 소리 나니까 그쪽도 놀랐겠죠. 그런데 바로 이제 액셀을 확 밟아 버리니까, 피할 틈도 없이 그냥 팍 부딪치고…… 사람이 날아가서 떨어지는데, 브레이크를 못 밟고 위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놈이 계속 가라고, 그냥 가라고 막 소리를 지르니까 나는 무슨 정신으로 갔는지도 모르고…….”
앙상한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주경이 수용자복 위로 어깨를 감싸며 몸을 숙였다. 재희는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주경이 마른 몸을 작게 웅크린 채로 더듬거렸다.
“그, 저, 피디님은 그런 경험이 없으시겠지만, 사람을 이렇게 치고 지나갈 때 그게 물컹하면서, 그 느낌이…… 뭐라고 말로 설명을 못 합니다. 제가 아직도 그게 하나도 안 잊혀요. 자다가도 꿈에서 그 물컹하는 것 때문에 소스라쳐서 깨고 그럽니다. 눈을 감잖아요. 그러면 그놈 목소리가 귀에 막 생생하게 들려요.”
주경은 헛웃음 같은 소리를 뱉었다. 그 소리는 허공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주경이 혼잣말처럼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 사장이 지금 안 하면 딸이 죽는다, 자기가 애들 시켜서 아주 못 볼 꼴 만들어 주겠다, 곱게 안 죽인다 그래요. 딸이 처녀냐 그러면서, 허 사장이 정 하기 싫다고 하면 딸 죽기 전에 우리가 처녀 딱지는 떼고 저승 구경시켜 주겠다…… 우리가 못 할 거 같냐, 우리가 사람 한두 번 죽인 줄 아냐 그 소리 하면서 자기들이 회사 사장도 죽여 보고, 경찰도 죽여 보고, 기자도 죽여 보고 그랬다고. 자기들은 돈만 받으면 대통령도 죽일 수 있다 그래요. 대학생 여자애 하나 어떻게 하는 거 일도 아니라고.”
그가 느꼈을 공포감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재희는 대답 대신 주경을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바닥을 보고 있던 주경이 잠시 손으로 눈가를 눌렀다.
“이게 어디부터 잘못됐는가, 내가 정직하게 살지 않아서 그런 건 알지만…… 내가 그러면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내가 자살했어야 하는데, 겁이 많아서 죽지를 못하고…… 그냥 다 뒤집어쓰고 죄인이 돼서 여기 있지만 그래도 한 번은, 누가 좀 알아줬으면 생각을 한 겁니다. 물론 내가 제일 큰 죄인입니다. 내 자식 지키자고 남의 자식 죽인 죄를 어떻게 덮습니까. 그런데, 그래도…….”
“무슨 말씀이신지 압니다.”
재희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간인 이상 누구도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할 수는 없었다. 던질 때마다 뒤집어지는 동전의 양면. 매번 같은 면이 나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남자에 대해 기억나시는 건, 다른 건 없습니까?”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질문을 바꾸자 주경이 눈꺼풀 위를 몇 번 더 누르더니 고개를 들었다.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굴리던 주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키가 크거나, 그렇지는 않았어요. 한 사십 좀 넘었으려나, 오십까지는 모르겠고. 보통 체격인데 눈매가 좀 사납고, 말투도 그렇고. 좀, 그, 뭐랄까…… 경상도 사람인가, 그런 느낌도 있었습니다. 말투가, 서울 말씨 같은데도 억양이 있어요. 용인휴게소에 내려 달라길래 내려 주는데, 가는 길에 누구한테 전화를 하면서 사장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사장님, 일 마쳤습니다. 잘 끝났습니다.”
“사장님이요? 서온건설 남제선 사장 말씀하시는 겁니까?”
재희가 눈썹을 좁히며 묻자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주경이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제가 지금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아니었을 겁니다. 그게 통화음이 설정이 크게 돼 있어서,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어요. 전화를 거니까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는데 그게 남제선 사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래요. 저 조 군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조 씨인가, 제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조 군, 하고 재희는 그 말을 입 안으로 뇌어 보았다. 조 군, 사장님, 서온건설…… 어떤 이름이 뇌리를 치고 지나간 건 그 순간이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조창식, 조창식 아니었습니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주경의 눈이 약간 커졌다. 기억을 더듬던 주경이 자신 없는 투로 더듬거렸다.
“확실하지가 않아서, 아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장석이, 창석이, 뭐 그렇게 이름을 말했나 싶기도 한데 그게 상황이, 막 그런 게 귀에 들어오질 않으니까요.”
정언은 박규형 과장을 죽인 범인이 조창식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 사측의 프락치, 규형의 감시자, 사건 현장의 최초 발견자.
만일 천중헌 이사가 보낸 살해 사주자가 조창식이라면, 고정민 살해는 박규형 과장 사건의 예고편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고정민의 경우를 겪었기에, 아예 처음부터 배신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바로 곁에서 내내 감시하는 역할을 부여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