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근데 강 피디 지금 이럴 시간이 있어?”
민혜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재희가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나 강재희야, 왜 이래. 소스 미리 다 준비해 놨으니까 구성안 나오는 대로 바로 편집 들어갈 거야. 한 작가님 말로 주말에나 될 것 같다고 하고, 아직 내 회차 방송하려면 기간 좀 있으니까. 지금 정보 너무 많아서 물리적으로 소화할 시간이 안 되잖아. 잠깐 도와주는 거니까 너무 큰 기대 갖고 그러지 말라고.”
“강 피디가 백업한다니까 엄청 기대하려고 그랬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니?”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눈빛을 보내는 민혜에게 재희가 짐짓 정색을 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줄래? 나 삐딱한 거 알지?”
“어머, 강재희 매몰찬 거 봐.”
“나 매몰찬 거 하루 이틀이야?”
진지한 얼굴로 농을 친 재희가 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 피디, 서 피디가 의원실 쪽에도 제보 들어온 거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던데 연락 없었어?”
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황형두 의원실에서 연락 주기로 했었는데 아직 얘기 없습니다.”
“이태영 의원실이나 양창훈 의원실에서도?”
“네.”
윤의 대답을 들은 재희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알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쪽에는 내가 다시 얘기할게. 그리고 부고 명단에 한 사람 더 있지 않았나?”
“네, 이훈주 씨요.”
“그러면 송 작가가 거기 연락해 보는 걸로 하자. 만약에 부검했다고 하면 김정환 교수님 쪽에 바로 콜 넣고. 일단 김 피디는 윤대석 씨 관련된 사항 먼저 확인하고 시간 나는 대로 조창식 집에 가 봐. 혹시 상황 안 좋아지면 무리해서 취재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연락하고. 서 피디가 김 피디 위험한 짓 못 하게 해 달라고 아주 신신당부하더라.”
재희가 무심하게 던진 마지막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김 피디가 다칠까 봐 걱정됐어.
정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불현듯 되살아난 까닭이었다.
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심장 부근을 눌러 보았다. 이런 순간 느껴지는 어떤 감각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재희가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쳐 딱 소리를 냈다.
“허주경 사장 인터뷰 정리한 건 메일로 보내 놓을 테니까 확인해 봐.”
시작합시다, 하며 회의실을 나서는 재희를 따라 자리로 돌아온 윤은 컴퓨터를 켰다. 부팅이 되는 사이 핸드폰 주소록에서 상우의 번호를 찾은 윤은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아버지가 다녔던 병원이나 약국 이름을 알 수 있겠느냐, 처방전이 남아 있는 게 있느냐 하는 윤의 메시지에 답이 온 건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 문정동 한마음우리병원이고 약국은 병원 아래층에 있었어요윤은 포털 사이트의 지도 메뉴에서 병원 이름을 검색해 핸드폰에 주소를 메모했다. 다행히 아직 영업 중인 모양이었다. 윤은 재빨리 선준에게 받은 의 취재 자료 폴더를 열어 동영상을 찾았다. 다행히 대석이 사망한 사고 현장의 CCTV 영상이 거기 들어 있었다.
법영상분석연구소의 메일 주소로 영상을 첨부해 추가 감식 부탁드립니다, 하고 메일을 보낸 윤은 시계를 확인했다. 영상을 추가하면서 스케줄 변동 가능성을 확인해야 했는데, 아직 연구소 직원들이 출근했을 것 같지 않았다.
우선 차 키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 윤은 재희에게 말했다.
“저 일단 문정동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윤대석 씨가 다닌 병원이 거기 있대요.”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지 그새 수화기를 한쪽 어깨와 귀 사이에 끼고 있던 재희가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민혜가 갔다 와요, 하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답 대신 웃어 보인 윤은 서둘러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내비게이션에 병원 주소를 입력하고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이른 아침의 햇살이 창 앞으로 길게 스며들었다.
윤은 창을 열었다. 어느새 아침 공기에서도 서늘한 기운이 가신 뒤였다. 여름도 순식간일 것 같았다. 에 오게 된 지 아직 몇 달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삼십 년 가까운 인생에서 고작 몇 달, 그 짧은 시간이 자신의 많은 부분을 바꿔 놓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삶을 상상도 한 적 없었다는 것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낮은 한숨을 쉰 윤은 빨간 신호에 차를 세웠다. 문득 옆에 던져 둔 핸드폰에 눈이 갔다. 핸드폰을 집어 든 윤은 잠시 망설이다 핸즈프리를 꽂고 정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대여섯 번쯤 갔을 때 건너편에서 정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왜, 무슨 일 생겼어?』
앞뒤 없이 본론부터 묻는 그 말투가 평소의 정언 그대로라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아무 일 없을 땐 선배한테 전화하면 안 돼요?”
대부분의 진심과 약간의 농담이 섞인 투로 되묻자 잠깐의 정적이 지났다. 보이지 않는 실을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전파 너머로 느슨했던 공기가 문득 예민해졌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단어들은 사무적이었으나 말투는 차갑지 않았다. 윤은 핸드폰 너머 정언의 표정을 그려 보았다. 약간 찌푸린 눈썹 밑의 서늘한 눈매와 당혹감을 감추려 할 때 슬몃 비틀리는 입가. 그리고 곧 보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그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는 걸 깨닫자, 아무도 없는데도 귀 끝이 뜨거워졌다.
“취재 나가는 중이에요. 잘 가고 계신지 궁금해서 걸어 본 거예요.”
윤은 서둘러 말했다. 괜히 전화한 걸까 싶은 생각에 막 후회하려는데, 정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운전 조심해.』
곧 전화가 끊어졌다. 열린 창밖에서 도로의 소음이 넘어왔지만 윤은 잠시 무엇도 듣지 못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걱정됐다고…… 지난밤,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던 그 얇은 다정함의 데자뷔에 순간 심장 어딘가로 낯선 감각이 지났다. 부주의하게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처럼 그 짧은 두 어절이 아릿했다.
초록색으로 바뀐 신호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기꺼이 착각하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떠올린 윤은 액셀을 밟았다.
* * *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와 증정품인 주스가 든 비닐봉투를 조수석에 던져 놓은 정언은 잠시 시트에 등을 기댔다. 잠을 설친 채 이른 아침부터의 장거리 운전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문서 보관실에서 켜켜이 쌓인 먼지를 아침 식사 대신 먹어 가며 기록을 찾고, 당시 담당 공무원들의 소재를 찾아 서너 사람 만나고 나니 이미 오후였다.
취재 내용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가장 규모가 있는 축인 건설사였기에 공공 건설 수주가 남정건설에 몰리는 건 당연했다고 말하던 사람들도, 정언이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면 결국 커넥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도청장, 시장, 국회의원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남정건설을 말단 공무원들이 떨어뜨릴 방법이 전무했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입찰 때면 선물세트나 돈 봉투 따위가 공공연하게 들어오곤 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 전의 일이니 법망을 피하는 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다시 서울까지 올라갈 일이 까마득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정언은 조수석에 던져 놓았던 봉투를 뒤져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차가운 마요네즈와 머스터드, 삶은 달걀과 감자 따위가 뻣뻣한 식빵과 뒤섞였다.
맛을 즐길 여력을 그다지 주지 않는 샌드위치를 입 안에 빠르게 밀어 넣은 정언은 주스를 따서 마셨다. 의무방어전 같은 식사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손에 묻은 식빵 부스러기를 대충 털어 낸 정언은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그새 재희와 민혜, 윤이 보낸 메시지들이 들어와 있었다.
― 평진 앞에서 대기 중. 사무실 도착하면 연락해.
― 강 피디가 가져온 하청업체 리스트 확인했어. 주경공사 포함해서 금목건설, 노경건설, 청명토목, 당원기술공사 전부 자재 문제로 처벌받은 적 있어. 취재 요청 넣었음!
― 윤대석 씨가 다닌 병원 원장이 바뀌었어요. 동업하던 사람한테 병원 넘기고 작년에 캐나다로 이민 갔다고 하네요.
글자들이 머릿속으로 잘 입력되지 않았다. 그 짧은 메시지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어 본 정언은 잠시 핸들 위에 이마를 대었다. 간밤의 일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을 타깃으로 한 것이 분명하다는 의심이 짙어지고 있었다. 불안한 동시에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입을 다물어 왔을까.
그러나 재희나 민혜에게 자신의 의심에 대해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윤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침에 주차장에서 윤의 차를 본 순간 느꼈던 감정은 복잡했다. 당황했고, 놀랐고, 약간 화도 났고,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고마웠다. 윤이 밤새 걱정이 돼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는 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만약 어젯밤에 위협 같다는 말을 한마디라도 꺼냈다면, 자신이 뭐라고 하던 윤은 죽어도 곁에 있으려 했을 게 뻔했다. 더 늦어지기 전 서둘러 윤을 보낸 건 그래서였다. 이게 정말 협박이라면 다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든 윤을 거기 휘말리게 하는 건 더욱 사양이었다.
한숨도 못 잔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윤의 얼굴을 떠올린 정언은 한숨을 뱉었다. 재희나 민혜가 이 일을 안다 해도 반응이 크게 다를 리 없었다. 일단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정언은 문득 재희와의 통화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차세진 의원실에서 온 편지, 허주경 사장, 공윤승 변호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재희에게 되물으며 내용을 확인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일이 현실로 벌어졌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던 정언은 민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서너 번 가기 무섭게 민혜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정언,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