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이제 취재 끝나고 올라가요. 하청업체 체크했다면서요?”
정언의 물음에 민혜가 한숨 섞인 투로 대답했다.
『응. 자재 문제로 걸린 하청이 많아. 근데 허주경 사장 말도 그렇고, 아, 강 피디한테 주경공사 허주경 사장 얘기 들었어?』
“네, 아침에 통화했었어요.”
『오케이. 내가 알아보니까 서온건설은 원청에서 대부분의 원부자재 발주하고 공급하고 그러더라고. 그러면 자재 문제 생기는 거 당연히 원청 책임인데, 문서 자체에서 조작이 있었던 거 같아. 문서하고 실제 자재 다르니까 걸리면 무조건 하청 책임이고 우리는 모른다고 해 버린 거지.』
“감리에서부터 속이고 들어가고 단속도 형식적이고, 만에 하나라도 걸리면 뒤집어씌운다? 자기들이 안 걸릴 안전장치는 확실하게 마련했네요.”
정언이 미간을 누르며 내뱉자 민혜가 수긍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그런데 이렇게 당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닐 거 아냐.』
“취재 요청 응할까?”
『그러길 바라야지, 뭐. 일단 연락 기다려 보려고. 지금 올라오는 거면 저녁이나 돼야 오겠네. 점심은 먹었어?』
“대충 때웠어요. 사무실 들어가서 얘기해요. 아, 너무 늦으면 먼저 퇴근하고요. 전화로 해도 되니까.”
민혜가 그 말에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별걱정을 다 해. 조심해서 올라와.』
네, 하고 대답한 정언은 전화를 끊었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으나 머릿속은 쉽게 깔끔해지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어질러 놓은 책상처럼 생각들이 난잡하게 뒤엉켰다.
그들이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태평하게 믿었던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도리어 이상했다. 뭔가 대비책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그게 이런 방식이라는 건 그다지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정언은 애써 생각들을 떨어 버리려 노력하며 앞을 보았다. 평일 오후의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액셀을 밟으며 속도를 올리자 닫힌 창 너머로도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넘어왔다. 만약 그게 정말 자신을 향한 경고라고 해도 당연히 멈출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정언은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에 불편하게 걸리는 감정의 정체를 곧 알아차렸다.
김윤.
어제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위협은 정언에게 이미 익숙했다. 그러나 윤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윤은 이런 일에 면역이 전혀 없었다. 차라리 윤이 아니라 자신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건 직후였다.
순간 윤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런 생각 안 해요. 대답 된 거예요?
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퍼뜩 그런 물음을 떠올렸으나 쉽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거기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싶었다.
외면하고 싶다는 건 결국 두려워한다는 말의 동의어다. 윤에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했을 거냐고 물었을 때, 정언은 윤이 아닌 자신 쪽이 선을 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이 궁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물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이 윤에게 정말 특별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게 이기적인 감정들은 정언에게 낯선 것이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정언은 손을 뻗어 라디오를 켰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은 마치 먼 곳의 소음처럼 와글거릴 뿐이었다.
내내 달려 방송국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이미 오후가 다 지난 뒤였다. 카메라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린 정언은 바로 사무실로 올라갔다.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던 민혜가 한쪽 어깨에 수화기를 끼운 채 정언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눈으로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자, 잠시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통화를 한 민혜가 곧 전화를 끊으며 정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제 잠 못 잤어? 왜 그렇게 피곤해 보여?”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뭐, 아침부터 멀리 왔다 갔다 해서 그런가 봐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자 민혜가 아휴, 하고 한숨을 쉬고는 손을 깍지 끼어 뒷머리에 대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어 죽는 줄 알았어. 지금 전화가 왔는데, 서온건설 자재 관련해서 제보할 게 있다네. 청명토목 퇴사자래.”
“퇴사자가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지?”
정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말에 민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내부에서 말 나간 거 같아. 지금 회사 있는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고발하기 어려우니까 퇴사자 통해서 제보하려고 하는 거 아닌가 싶더라고.”
“자기 신분 밝혔어요?”
“이름은 신병민이고, 자재부 부장이었대. 작년에 단속에서 철근 문제 생겨서 뒤집어쓰고 퇴사한 모양이야. 자세한 사항은 자료 첨부해서 메일로 보내겠다고 하더라고.”
“내부고발자 타령 그렇게 하더니 하나 건졌네. 이훈주 씨는 어떻게 됐어요?”
이훈주라는 이름을 듣기 무섭게 민혜가 펜 뚜껑 끝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딸하고 통화했는데 여기도 낌새가 이상해. 죽었을 당시에 엄마가, 그러니까 이훈주 씨 부인이지. 부인이 부검 요청했었대. 이유가 뭐였냐 물어보니까 엄마가 작년에 암으로 죽었다고 하더라고. 말을 안 해서 자기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거야.”
“등산하다 추락사했다면서요? 사고라고 생각했으면 부검 요청 안 했을 거 아냐?”
정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민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김정환 교수님한테 연락해 봤는데 이거 본인 케이스 같대. 오래전 일이라 알아보고 연락 주신다고 했어.”
“선배나 김 피디는 아직 연락 없었어요?”
“응. 강 피디 오전에 허주경 사장 가족들 만났다고는 하더라. 자세한 건 와서 얘기하겠대. 그리고 공윤승 아주 거기서 잡으려고 대기 타는 거 같더라고. 김 피디는 오전에 윤대석 씨 다닌 병원 갔다가 오후에 조창식 집에 가 본다고 하던데 아직 별말 없네.”
그때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에 윤의 이름이 떠 있는 것을 본 정언은 속으로 양반 못 되네, 하고 중얼거리며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마디도 떼기 전, 건너편에서 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조창식이 죽었어요.』
그 말이 완전히 이해되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란 정언은 저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로 뭐? 하고 되물었다.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언을 쳐다보았다. 윤이 빠르게 말했다.
『집에 찾아갔는데 폴리스 라인을 문 앞에 쳤더라고요.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이틀 전에 옆집 사람이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신고했는데, 경찰이 와서 보니까 조창식이 죽어 있었다는데요. 영등포경찰서 관할이라고 해서 그쪽으로 왔어요.』
정언은 바로 윤을 다그쳤다.
“언제? 언제 죽었다는 거야? 사인이 뭐래?”
『부검 결과 아직 안 나왔는데, 현장 감식반 말로는 이미 2주 이상 된 것 같대요. 타살 정황 확실하고요. 저 바로 들어갈 테니까…… 아, 사무실 들어오셨어요?』
윤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정언은 눈썹 위를 문지르며 응, 하고 대답하다 미간을 좁혔다.
“현장 사진 촬영할 수 있어? 내가 지금 갈까?”
『아니에요. 눈 감고 찍죠 뭐.』
“지금 장난이…….”
윤에게 언성을 높이려던 정언은 자신을 보고 있는 민혜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건너편에서 윤이 짧게 웃는 소리가 돌아왔다.
『농담이에요. 하루 종일 운전해 놓고 뭐 하러 여기까지 오려고 그러세요. 감식 자료 촬영 끝났고 복사할 수 있는 건 다 복사해 달라고 했어요. 강 피디님한테도 문자 넣어 놨고요. 금방 들어갈게요.』
전화가 끊어졌다. 정언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내려다보다 이마를 짚었다. 심각해진 정언의 표정에 민혜가 가까이 다가앉았다.
“무슨 소리야? 누가 죽었대?”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정언은 민혜의 물음에 대답했다.
“조창식이 죽었다는데요.”
“조창식이?”
눈알이 당장 튀어나올 기세로 눈을 휘둥그렇게 뜬 민혜가 목소리를 높이다 제풀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머, 어머머, 하고 몇 번을 반복하던 민혜가 의자 밑으로 발을 콩콩 굴렀다.
“미쳤어, 미쳤어. 왜 죽었대? 언제 죽었다는 거야?”
“타살인 거 같대요. 이미 2주 이상 됐다는데요.”
“아니, 걔를 누가 죽여? 어머, 세상에. 하나님 아버지. 걔가 한 짓 보면 언제 죽어도 이상한 놈이 아니긴 한데, 왜 하필 지금 죽어?”
“일단 무슨 원한 관계인지, 우발적인 건지 그런 걸 아직 하나도 모르니까. 김 피디가 자료 가지고 지금 오겠대요. 그거 보면 감이 오겠지.”
민혜가 어우 소름끼쳐, 하며 두 팔로 자기 어깨를 감싸 안고 부르르 떨었다. 정언은 의자를 돌려 앉으며 책상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조창식이 지금 죽어야 할 이유가 뭘까. 지금 조창식을 없애야 할 사람이 누굴까.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조창식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떠올리던 찰나, 누군가의 얼굴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손경일.
결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자들을 대신해 기꺼이 자기 손을 내주는 자. 어젯밤의 일과 조창식의 죽음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자신과 윤이 현장 사무실에 취재를 갔던 직후 조창식이 돌연 결근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조창식의 행적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만약 해나가 준 주소가 아니었다면 조창식이 죽었다는 것도 더 뒤에나 알았을 게 뻔했다.
토끼 사냥이 끝난 뒤에는 사냥개를 먼저 솥 안으로 던진다. 사냥개는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한가하게 사냥한 토끼를 뜯을 때가 아니라면, 그들이 추격당하고 있는 입장이라면…….
정언은 즉시 책상 위의 수화기를 집어 들고 경일용역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계속해서 신호만 갈 뿐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걸어 봐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