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이것들이 전화를 안 받아?”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민혜가 옆에서 누구, 하고 물었다. 정언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경일용역이요.”
“관련 있을 거라고 생각해?”
“증언 생각하면 조창식이 상당히 중요한 멤버 같지 않아요? 사망한 게 최소한 2주 전이면 연락 두절된 지도 그 정도 됐다는 거잖아요. 만약에 손경일이 조창식한테 무슨 일 벌어진 걸 알았으면 이틀 전보다는 먼저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럼 경일용역 쪽에서 처리했다고?”
민혜가 얼굴을 찌푸렸다. 정언은 펜 끝을 책상 위에 톡톡 치며 관자놀이 부근을 눌렀다.
“내가 이미 박규형 과장 건으로 취재하고 있다는 거 잘 알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증인인 조창식이 없어졌다고 하면 손경일이나 서온건설 입장에서 엄청 위험한 거고. 얘들이 조창식 집을 몰랐을 리 없는데 죽은 지 2주가 되도록 방치했다? 그러면 답은 얘들이 조창식 죽은 걸 미리 알고 있었고, 일부러 방치했다는 거 아니겠어요?”
“조창식이 그 정도 일까지 했으면 오른팔 아니었을까? 그런 애를 잘라 내?”
“지금 오른팔이 아니라 뭐라도 잘라야 할 정도로 절박할 수도 있지.”
으으, 하며 민혜가 머리를 감쌌다. 정언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형광등 빛이 하얗게 떨어졌다. 경일용역에서 더한 일을 안 당한 게 다행인가 생각하자 어이가 없어 웃는 소리가 났다.
손경일, 손경일, 하고 입 안으로 몇 번 그 이름을 중얼거리던 정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때 경일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더니 곧바로 인터뷰에 응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전화를 받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심석건에게 호출 당했던 재희가 그 일에 대해 물었던 것을 떠올린 정언은 눈썹을 좁혔다. 국장급에게 다이렉트로 말이 들어갈 정도라면 이미 그때부터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분명했다.
만약 조창식을 죽인 게 정말 손경일이라면, 이쪽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지켜본 것일까. 위기감을 느꼈기에, 사냥개를 죽인다. 사냥개가 배신해 자신들을 추적하게 하지 못하도록. 그렇다면 자신들이 뒤쫓는 방향이 정확하다는 건 분명했다.
정언은 책상 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조창식을 죽이고, 자신을 협박하고, 그리고 다음은? 그들이 판을 뒤집을 선택지를 몇 개나 가지고 있을지 당장 가늠할 수 없었다. 서로의 패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필승을 확신할 수 있는 카드는 무엇일까.
해법은 단 하나, 상대를 제거하는 것.
머리 위로 누군가가 얼음을 쏟아부은 듯한 한기가 돌았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정언은 사무실로 들어선 윤이 선배, 하고 부르는 소리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윤이 상기된 얼굴로 회의실을 가리켰다. 정언과 민혜가 회의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윤이 노트북을 켜 두 사람 앞으로 돌려놓고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건넸다.
정언은 그 파일을 펼쳐 보았다. 현장 감식반의 보고서였다. 정언이 펜 끝으로 보고서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시체는 현관 근처 거실에 있었다? 흉부하고 복부에만 자상이 여섯 군데, 손바닥에 방어흔, 후두부에 둔기로 인한 타박상. 사용된 흉기가 두 종류로 추정되는데 둘 다 발견이 안 됐고,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온 흔적이 없어서 면식범으로 본 모양이네. 지문이나 족적은 없고. 용의자가 있어?”
정언의 물음에 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에서 찾은 핸드폰은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들어갔고, CCTV하고 주변 블랙박스 영상까지 싹 걷어가서 분석중이래요. 연립 반지하인데 집주인 말로 사람들이 워낙 자주 들고 나고 한다고, 조창식도 처음 계약할 때 말고는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다네요. 같은 연립 사람들도 무슨 소리도 못 들었고, 누가 드나들고 하는 것도 전혀 몰랐대요.”
윤이 몸을 숙여 자기 노트북에서 폴더 하나를 열었다. 현장 사진을 찍어 온 영상이었다. 정언은 화면을 확대해 들여다보았다. 사진에 찍힌 시체는 이미 부패가 시작되어 피부가 검붉은 색이었다. 엎드린 채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육안으로도 선명한 뒷머리의 상처에 머리칼이 엉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몸 아래로는 말라붙은 핏물이 번져 있었다. 상의 허리 부근에는 얼룩진 핏자국이 어두웠다. 정언은 그 영상에 눈을 둔 채 물었다.
“연립이면 방음 잘 안 될 텐데. 사람들이 소리를 전혀 못 들었다는 거 보면 살해 과정이 아주 빨리 이뤄졌을 수 있겠네. 흉기가 두 종류로 추정된다니까 범인이 여러 명일 가능성도 있고. 국과수로 넘어간 거지?”
“네.”
“그러면 송 작가님, 지금 김정환 교수님한테 이 건에 대해서도 같이 좀 물어봐 줘요.”
정언의 말에 민혜가 오케이, 하고는 핸드폰을 들고 회의실을 나갔다. 잠시 영상을 멈춘 정언은 노트북 화면에 눈을 둔 채 윤에게 물었다.
“김 피디, 이거 담당 형사 누구야? 결과 나오는 대로 연락 달라고 얘기했지?”
“영등포서 강력형사 2팀 노이섭 팀장님이에요. 강 피디님하고 안다고 하시던데요.”
“취재 때문에 만난 적 있나 보네. 선배하고 안면 있으면 좀 쉽겠다. 일단 그분 연락처 알려 줘.”
윤이 자기 핸드폰의 주소록을 열어 아래위로 스크롤을 몇 번 하더니 정언의 곁에 밀어 놓았다. 정언은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르며 다른 손으로 서둘러 노이섭 팀장의 연락처를 저장했다.
“윤대석 씨 병원 얘기는 어떻게 된 거야?”
정언이 묻자 윤이 탁자 위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아, 그게 동네 가정의학과인데 개업한 지 십 년이 넘은 데래요. 원래 원장은 김회영 원장이라고, 이 사람이 윤대석 씨한테 처방전 쓴 사람이에요. 김회영 원장이 자기 학교 후배인 이서욱 원장 데려다가 공동으로 경영했는데 윤대석 씨 일 있고 나서 이서욱 원장한테 병원 넘기고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고 하더라고요.”
“우연의 일치야?”
“그건 모르겠어요. 이서욱 원장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고, 자기한테는 자식 교육 때문이라고만 얘기했다고 하던데요. 개원할 때부터 프런트에서 일했던 최정미 씨라는 간호사가 자기보다 더 잘 알 거라는데, 오늘은 쉬는 날이라 안 나왔대요. 연락처 받았는데 저녁 여덟 시 이후에 통화 가능하다고 해서 그때 전화해 보려고요.”
“알았어. 하루 종일 고생했겠네.”
뭘요, 하고 웃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정언은 무심코 윤을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미소 띤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그 얼굴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붙들렸던 정언은 곧 그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시선을 내리며 말을 돌렸다.
“선배 들어오면 일단 이거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노이섭 팀장님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 있으면 우리가 가진 정보 공유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손경일 쪽 의심스러우니까. 경일용역 사무실이 지금 전화를 안 받는데, 내일 아침에도 계속 안 받으면 사무실에 가 볼 거야.”
“손경일이요?”
되물은 윤이 뭔가 생각하는 듯 이 끝으로 아랫입술을 누르고 있다가 몸을 조금 더 숙였다.
“선배, 어제 일 뭐 짐작 가시는 거 있죠?”
정언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어떻게 눈치챈 걸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바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정언이 잠깐 대답을 망설이는 것을 알아차린 듯, 윤이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선배한테 경고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김 피디, 이거 누구한테 얘기했어?”
인정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급하게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재희가 이 사실을 안다면 가만있지 않을 게 뻔했다. 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선배가 강 피디님한테 얘기 안 하신 것 같아서요.”
정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문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입가에 손가락을 댔다.
“당분간은 말하지 마.”
“왜요?”
“확실한 거 아니잖아. 심증만 가지고는 안 돼. 팩트가 있어야 무기가 된다고.”
그 말에 윤이 정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정언은 눈을 들었다.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에 왜, 하고 물으려는데 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무기 얻기 전에 선배가 먼저 위험해지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우리가 간이 배 밖에 나온 새끼들인데 뭐 얼마나 오래 살겠냐, 하는 소리는 피디들의 입버릇이었다.
언제나 누군가가 자신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한다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일을 그만둘 게 아니라면 그런 부분은 어쩔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정언은 늘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막연한 바람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엄마보다는 오래 살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바람이 이루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마음 한편에서 항상 떠나지 않았다.
“그런 거 감수할 생각 없으면 이 일 못 해.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도 목숨 걸고 방송 내보낸다 생각하고 하는 거지.”
정언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윤이 선배, 하고 막 운을 뗀 순간 민혜가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민혜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했다.
“분위기 왜 이래, 갑자기?”
“뭐가요. 전화는 해 봤어요?”
정언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눈을 깜빡이던 민혜가 아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창식 부검 내일 오전이라고 했대. 자기 제자 팀에서 담당한다고, 일단 현장 사진 보내 달라고 하시더라. 이훈주 씨 부검 자료하고 당시 경찰 기록도 가지고 계신대서 다 받았는데 이거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어.”
“뭔데요?”